4기 시 창작 교실 후기
굳이 버리고 갈 것 만 남아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노작가들의 말에 동감하며 새로운 인연을 쌓는 것이 내키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이진 선생님에게 처음 시를 배우면서 시에 대해 작정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이루어질 때, 참으로 즐거워진다는 생각은 법열(法悅)에 다름 아니었다. 만나야 할 것들은 만나져야 하는 법인지라 시가 내게로 왔다. 서로 다가갔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시간과 공간적으로 만나야 할 인연이었다. 나에게 불교는 아무리 봐도 결코 종교가 아닌 철학이며 붓다는 훌륭한 인격자로서 존경의 대상일 뿐, 불교는 종교와 철학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왔다. 시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다리 같다고 함에 적극 동의하는 입장에 서있다. 나아가 종교와 과학이 은밀하게 내통하면 세상에 끔찍한 결과가 올 수 있음을 아는 철학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게 하는 완충과 분리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한 생각일 수 있겠지만 시와 철학과 불교는 같은 길을 가는 평화로운 동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중용 또는 중도의 길을 걷는 자는 일단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재물과 육체와 감정이 일으키는 욕심에 대한 허상을 보고 알아버린 다음에야 가야 할 궁극의 목표가 만들어졌다. 돈이 되지 않으나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시다. 그래서 나는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 붓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모든 현상과 물체에는 실체가 없으니 제발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아상(我相)을 버리라며 말씀 곳곳에서 자비의 지뢰를 터트린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자기중심주의의 지하감옥에 갇혀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자들을 안타까워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이기에 그는 인간에게 지성의 주입을 철학을 통하여 해결하려 했다. 다만 좋은 결과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운 동물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납과 수은 등으로 금을 만들려는 허황한 꿈을 꾸었지만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에게는 대체로 소설의 허구성이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한다. 시인에게는 고결한 마음이 깃들기 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모두 고결한 연금술사가 되어 보지 않겠는가. 모든 인연이란 때가 되면 무르익는다. 그때가 올 때까지 부지런히 갈고 닦겠다. 지금 시 문단은 산문시와 자유시가 혼재하는 경향이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나도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을 저어하는 나에게 4기 문우들을 만나 함께 시 공부를 함에 회한과 아쉬움이 없었겠습니까!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혹여 나의 시평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문우가 있다면 부디 마음을 푸시기 바랍니다. 차기에는 친절한 선배(?)로서 조심해서 행동할 것을 약속합니다. 차기에도 문우들 모두 이진 선생님과 함께 공부할 수 있기 바랍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열심히 강의해주시는 선생님에게 무량한 감사를 드립니다.
2015. 8. 13. 도봉별곡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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