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와 철학 공부의 즐거움- 일요일 아침 혜덕암의 斷想
살면서 느끼는 점은 쉬운 삶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가장 나쁜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면 나오는 국회의원의 막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짜증나는 세상사에서 벗어나는 길은 철학이 좋다고 생각한다. 일석오조는 될 것이다. 잠시 책을 보고 읽었던 감회를 돌이켜본다. 철학공부를 하는 것이 10년 남은 여명을 정리하는 기간으로 정하고 공부에 열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철학적 작업을 '논리와 언어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혜는 오류와 실수를 줄이는 조건이므로 철학과 지혜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철학의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여섯 개의 질문이 존재한다.
1)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가, 현상계 및 인간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2)내 생명의 근원은 무엇이며 현상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3)인식론, 더 근원적 표현을 빌리자면 유식론과 관련하여/ 의식의 중심과 세상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4)현상계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름과 형태의 성품은 무엇이며 그들은 인간 및 우주의식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5)육체가 살고 있는 동안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 사후에도 삶은 지속되는가?
6)진리란 무엇인가, 어떻게 진리의 의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에 도달할 수 있는가?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세 가지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1)우주의 기원은? 우주의 끝이 있는가?
2)보이지 않는 신과 영혼의 존재는? 존재한다면 미치는 영향은?
3)선과 악의 인과응보의 결과는?
시산회답게 시와 글을 씀에 있어 우리는 일상사적 이야기만을 늘어놓는다면 신변잡담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내 글을 내놓을 때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빼놓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 신념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1)개인은 선한데 개인이 모여 형성한 사회는 왜 이기적으로 굴러가는지, 이유는?
2)종교는 많은데 사람들이 선해지지 않는 이유?
3)인류의 사상과 철학은 훌륭한데 개인의 생각은 어리석은지?
4)먹고 살만한데 개인의 인격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지?
5)살면서 많은 감동을 받으나 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누구(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두의 화두이고 대명제다.
'누구'와 '무엇'의 의미와 차이를 잘 새겨야 한다.
자주느끼는 것은
당신을 만든 신과 당신이 만든 신은 같습니까? 틀립니까?
힌트 : 만들어진 신 / 리처드 도킨스
세상의 모두가 잘 되기를.
옴 마니 반메 훔. 연꽃 속의 보석 같은 그대여.
나마스떼.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 드립니다.
항상 좋은 언어를 사용하며 잘 살기를 바랍니다. 불가의 사섭 중 하나인 愛語攝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주위에 폐를 끼칠 염려도 없고, 쓸데 없이 남 얘기를 하다보면 자신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정신의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혜덕암에서 나에게 묻는 질문의 요지 여섯 가지 +α 알파
1.붓다의 가장 중요한 이념은 인연생기, 즉 연기법이다. 그를 보충 설명하기 위하여 무상 · 고 · 무아 삼법인과 고집멸도 사성제, 계· 정· 혜 삼학, 팔정도 및 육바라밀 혹은 삽바라밀, 중도, 공, 색수상행식 오온, 탐진치 삼독인데 그렇다면 연기법의 적용을 받는 유위법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하면서, 즉 아공법공이라면서 제법무아론을 강조하여 주장을 펼친 조사들이 많다. 그러나 왜 조사들은 참나를 찾아라, 자성을 보라고 하는가. 백봉 김기추 선생과 혜민 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아트만의 실체를 주장하는 힌두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고 할 것이 없고 나의 것이 없고 나의 자아가 없다고 하면서 일견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말들을 하는가. 한때 상좌부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아공법유는 주장했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무아론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일시의, 임시의 가상의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아공법공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이 만든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론자들의 주장은 불교의 정수다. 당신의 견해는 어떤가?
2.유가 사상가 주에 양웅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배움이란 성을 닦는 것이니 배움이란 성을 닦는 것이니, 視, 聽, 言, 貌, 思는 성이 갖춘 바이다. 배우면 올바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릇되어진다.(학행)
그러므로 선사나 선생들이 자성을 보라는 말은 배우라는 것인지, 자성을 봐야 작은 깨우침이라도 얻는 것인지 븐명하지 않다. 물론 그들도 뜻을 모른다. 당신은 견해는?
3.깨달음은 없다는 지휴 스님은 연기의 주체는 없지만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 즉 업이다. 업이 활동을 멈추면 죽음을 맞는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붓다도 ‘有業報 無作者’를 주장하면서 업보는 있으나 짓는 자는 없다고 했다. 업에 대하여 묻는 제자의 질문에 “업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바쁠 것이 없다.”고 하며 무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아론과 앞뒤가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유식론자들이 주장하는 異熟識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그들은 업의 결과에는 선악이 없고 苦와 樂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것을 알아버린다면 누가 업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것인가. 당신의 견해는 어떤가?
4.나는 깨달음은 없다는 지휴 스님의 말을 동의하게 된 이유는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스님들의 행태를 보면 거기에 동의하며, 특히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에 대하여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나는 시간의 관점에서 점오점수를 주장하는 지눌 스님의 주장에 동의한다. 조계종은 종조인 지눌 스님의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가. 당신의 견해는?
5.범일을 비롯한 정신공부를 한다는 분들은 내가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결 같이 얘기한다. 내가 문학을 그만 두고 다시 정신공부를 하기 위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나는 수많은 성자들이 다녀갔어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고 주장하는 유식론자의 말나식, 순자 성악설의 이기심,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 동의한다. 이기심은 존재의 이유이면서 인류가 존재를 이어가는 이유가 아닐까. 다만 이기적 유전자도 진화하면서 자리이타심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옛날에 토마스 모어 주장하면 유토피아, 즉 이상향이며 극락이 아닐까. 토마스 모어는 훗날 영국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반석 위에 올린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천일의 앤에 나오는 앤 왕비를 비호하다가 헨리 8세에게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한 사람이다. 당신은 어떤 견해일까.
6.깨달음은 뇌파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집중 명상을 하다보면 뇌파가 고정되어 베타파가 섹터파로 일시적으로 고정되는데 이때는 여운 선생이 주장하신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도 감성적인 의식으로 무장해야 할 시를 쓸 수 없는 목석같은 경우가 6개월이 지속되었으니 여운 선생이 본 사람들의 경우와 다르지 않는가. 목석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당연히 감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하는 시를 쓸 수가 없으며 미워해야 할 타인을 어떻게든 이해하며 미워하지 않게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래서 홍 선생이 수상한 행동이라고 했다. 당신의 견해는?
*알파 : 무아론 ㅡ유업보 무작자, 좌선과 관련한 수행법, 돈점논쟁, 깨달음 뒤의 행태ㅡ포교 입전수수, 깨달음의 실체 ㅡ뇌파의 작난 시냅스 인드라망의 보석과 관련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 ㅡ이기적 유전자, 이타심으로 바꿀 수 있는가, 불가지론의 입장, 연기의 주체는 아뇌야식, 수상행식은 끼리끼리. 선불교는 불교인가. 불가지론의 3대 명제. 철학의 여섯 가지 명제. 시적 표현과 논설과 설명의 주된 표현 방식인 만연체의 표현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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