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설에 관한 종합 설명
관찰해야 할 현실 상태는 무상∙고∙무아의 일반적 연기현상이지만, 성취해야 될 이상은 연기에 대한 관찰로 생기는 열반적정의 상태이다.
『증일아함경』 권18에는 아예 열반을 포함해서 사법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삼법인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힘든 교설은 무아설이다.
예로부터 무아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불교학의 발전 양상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금 분명 ‘나’라고 하는 것이 경험하고 있다. 이 경험하는 ‘나’가 엄연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무아로 부정되는 그 ‘나’라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상식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부정하신 것은 당시 외도들이 말하는 ‘영원불멸의 실체적인 나’ 혹은 ‘본체로서의 나’이다. ‘나’는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5온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내가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나’인 것이다. 이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진아(眞我)’와 ‘대아(大我)’같은 수식어를 붙여 놓으면 이를 ‘고정된 실체적인 나’로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무아를 설명하면서 잠시라도 연기법의 원칙을 벗어나면 실체적인 관념의 ‘나’가 침입하여 무아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켜 버린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상∙고∙무아의 삼법인 교설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 이 교설의 실천적 의미 는 무엇일까?
3) 무아의 실천적 의미
괴로움만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나’도 실체가 없다. 즉 무아이다. 위에서 연기법을 설명할 때, ‘나’라는 존재는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연기해 있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느낌, 개념, 생각 등도 또한 내가 아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느낌, 개념, 생각 등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 온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ㆍ수ㆍ화ㆍ풍(地 水 火 風) 또한 이 우주의 가득한 그 물질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 다 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늘 먹고 있는 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한 톨의 쌀이 있기 위해서 땅과 물, 태양 빛과 공기가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농부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정성이 깃들어야 양질의 쌀을 얻을 수 있다.
이 쌀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물[水]과 열[火]의 인연을 만나야 한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먹고 나면 밥은 더 이상 밥이 아닌 몸속의 자양분으로 된다. 살이 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이다. 밥상의 국 도 반찬도 과일도 먹고 나면 ‘내 몸’이 된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 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본래부터 ‘나’ 혹은 ‘나의 것’이였던 것은 하나도 없다. 잠시 인연에 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 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처음 잉태되었을 때 ‘내 몸’이라 고 하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한 방울의 이슬과 같았다. 이 이슬방울과 같은 몸이 어머니가 주신 자양분을 의지해서 지금 우리의 몸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머리도 변하고 살결도 변한다. 끊임없이 ‘나의 모습’은 변한다. 이처럼 변화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나’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느낌, 생각, 가치관 등에서 ‘나’라는 실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좋다 혹은 싫다’라고 느낄 때 그 느낌이 ‘나’일까? 나의 느낌이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세계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 이거나, 교육을 통해서 배웠거나, 살아오며 경험하고 환경에 의해 익혀 온 개념이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가정, 이웃, 사회, 국가라는 환경 속에서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책과 대중매체를 통 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받아들인 정보를 내 느낌, 내 생각, 내 사상, 내 가치관이라 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배우고 익혀서 받아들인 느낌, 생각, 가치관, 관습,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점령하여 온통 나의 가면을 덮어쓰고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성격의 온화함과 포악함, 몸매의 좋고 나쁨, 능력 혹은 지식의 차이,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조건들이 만났을 때 연기해 생겼을 뿐인데 ‘나’라는 주머니 속에 주워 담고는 좋으니 싫으니, 행복하니 불행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날씬하니 뚱뚱하니, 크니 작니, 숱한 분별과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나’와 남을 구분하여 비교하면 할수록, ‘나’라는 주머니는 자꾸자꾸 커져만 간다. 너무 커져 주체할 수 없어 결국 쓰러지게 된다. 그냥 놓아버리면 모든 분별심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고 자유로운 줄을 모른다.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 목숨을 내던져 아이를 구하다 발목이 잘린 어느 역무원의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일화나, 일본인 지하철 승객을 구하려고 철길로 뛰어들어 목숨을 잃은 어느 한국 유학생의 국경을 초월한 감동적인 행위는 바로 무아적인 실천행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무아/비아의 발견자 붓다
니르바나를 얻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 가운데 하는 아나타, 즉 無我라는 독특한 불교 교리에 관한 명상이었다. 붓다는 영원한 자아(아트만)가 최고의 실재라고 믿지 않았다. 붓다는 ‘깨어있음’을 훈련함으로써 인간이 늘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몸과 느낌은 순간마다 변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변하는 신념, 감정, 인식을 체계적으로 검토한 후 이 가운데 어느 것도 그토록 많은 출가자들이 구하는 자아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너무 결함이 많고 덧없기 때문이다.“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붓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안정된 ‘일반적 자아’라는 실재도 부정했다. 그는 ‘자기’나 ‘나 자신’ 같은 말은 단순한 관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모든 지각 있는 존재라도 그저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상태의 연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가 아나타, 즉 무아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바로 니르바나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외부인이라면 공황에 빠져 “나는 말살되겠구나, 나의 존재는 파괴되고 끝이 나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아를 부정하게 되면 ‘자기중심주의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게 되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욕심, 갈망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淸淨을 자각하게 된다. 붓다는 ‘자아란 없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해보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붓다는 행동으로부터 분리된 추상적인 교리적 공식을 싫어했다. 붓다는 어떤 사람의 신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권위에 의지하여 도그마(독선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해로운 일이다. 이것은 개인적 책임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신앙은 니르바나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결의를 의미한다. 붓다는 늘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시험해보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종교적 관점은 정신적 우상, 또 한 가지 집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붓다는 “영혼은 존재합니까, 내세는 있습니까?”를 묻는, 형이상학적으로 기운 제자에게 답했다.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너의 비통과 고통과 비참함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지금 이곳의 이 불행한 조건에 대한 치유책을 설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 설명하지 않은 것과 설명하지 않은 이유를 늘 기억하기 바란다. 그런 질문은 너의 깨달음에 방해가 될 뿐이다.”
붓다는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四無量心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그리고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들이 좋은 업을 쌓아 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설사 다음 생이 없다고 해도 사려 깊고 친절한 생활방식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반응하도록 자극을 줄 터였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언제나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의 생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복 받으시라, 모두 붓다가 되시기를”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환생의 주관자
178.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지와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깨달음의 무한한 장점들은 더없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더 이상 업의 영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자비와 지혜의 힘을 가지고 중생들의 선을 위하여 제약된 세계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티베트어로 ‘고통을 넘어서’라는 의미다. 티베트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극단적인 것’으로 불리는 윤회 전생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끝없는 환생으로 이끄는 업의 노리개가 아니기 때문에 윤회에 머물지 않으며, 또한 그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열반의 평화에도 머물지 않는다.
-승려와 철학자
연기의 발견자
말나식/이기적 유전자/식의 발견자
나의 까시나
우주의 존재법칙을 깨고 사라진 해커 붓다
제2의 붓다 나가르주나/용수의 진공묘유에 대한 친절한 설명
제3의 붓다 구마라집의 파계
전식득지의 기쁨
공과 유식의 화해
유식과 여래장의 화합
선재동자의 먼 길, 구도
화엄의 세상. 원융무애
마침내 꽃이 된 진리/법화경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나라로
아아, 승조여!
히말라야의 시인 미라래파
삼예의 논종/삼예사의 논쟁
지장을 위하여 건배
법성게와 해인삼매도
깨달음은 없다
유아론도 화엄의 마음으로
진공묘유의 비밀
붓다의 농담, 붓다의 눈물
금강경, 붓다의 비틀기, 모른 척 하기
깨달음은 없다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깨어남 궁극의 목적인가, 과정인가
승려와 철학자
설화의 미학
불가지론자 붓다
깨달음의 허허실실
뇌의 作難
주관·객관의 비존재, 아울러 그 비존재의 존재 - 공
*無我非我에 메이지 마라.
네가 있다 할 것이 아니고 없다 할 것도 아니다. 아울러 네가 나다 할 것이 아니고 네가 나가 아니라다 할 것은 더욱 아니다. 잘못 짚었다. 자성은 불성이니라. 너의 오온이 아니라 부처님이니라. 그런 연유로 無我非我에 메이지 마라. 有我/唯我, 곧 영원불변의 아트만은 없다. 너라고 할 것이 없다. 인드라망의 수많은 그물코에 달린 금강석은 서로를 비춰보니 수많은 불성이 서로를 보는 것과 같다. 양자물리학에서는 그것이 세포이며 그물은 신경세포줄기, 곧 시냅스라 한다.
自性은 自性佛性의 줄인 말
-지눌의 돈오점수론
4.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이 모든 성인의 길이라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에 있어 이미 단박 깨달음이었다면 왜 점수를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 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범부가 미(迷)했을 때는 사대(四大)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게 된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는 지혜 성품(無漏知性)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나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깨달았으나 끝없이 익혀 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하여 공(空)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동안의 세월이 지낸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다만 네 자심(自心)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 앎을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면서 다시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없어지지 않는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 때문에 또 앎을 구할 것인가.
만약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무아론에 대하여 당신에게 드리는 겨울의 기도
죽을 때가 된 지금 붓다를 보고 싶음이 이토록 절실할까. 나는 본시 설화나 전설 따위를 믿지 않고 기적은 더욱 믿지 않는다. 내가 결코 기독교도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살아 계신다면 107살이 된 부친은 일제 때 배제학당을 다닌 학력이 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조차 귀뜀을 하신 적이 없다. 다만 부친의 학력에 관심이 없으므로 주고받은 편지에 한자가 자주 들어가 있음의 이유를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눈물겨워할 따름이다. 수많은 설화를 이겨내고 항상 따뜻한 언어로 상대방에게 스스로 자신을 알게 하는 성찰을 가져다주고 마침내 통찰력을 갖게 했던 위대한 성자여
지금 이 시대는 비록 당신이 말할 리가 없는 말법의 시대라 하더라도 당신의 가르침은 소멸할 수는 없지 않겠나이까 이 가을 한 권의 책을 집착하는 나는 아직 수많은 의문에 갈등을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차마 불자라 말씀드리지 못하는 제 마음을 헤아려주실 분이 당신 아니고는 어디서 찾겠나이까 세상은 항상 높은 산 또는 깊은 바다를 감아 도는 짙은 안개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중입니다 저는 매일 산에서 오라 부르고 저잣거리에 할 일이 많은 나는 차마 산을 보지 않을 뿐입니다 감히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까요 다만 내 마음속에 혹시나 깃들어 있을지 모른 당신의 그림자이나마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도요, 신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정신병인 줄 알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은 당신은 신비의 존재이거나 절대자나 초월자는 물론 신도 아닌 까닭에 괜찮은 일입니다 당신의 빛이라도 보고 싶지만 눈 뜬 장님 청맹과니가 되어 시각화가 불가능하여 꿈에 무섭게 나타나는 것은 업보에 대한 경고인 줄 알고 있으니 따뜻한 미소와 함께 꿈에라도 나타나 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그렇다고 여래께서 금강경에서 설하신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을 모르고 드린 말씀이겠나이까
형태에 의해서 나를 보고 (若以色見我)
소리에 의해서 나를 찾는 자는 (以音聲求我)
잘못된 노력에 빠져 있나니 (是人行邪道)
마침내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不能見如來)
지금은 많은 논쟁을 즐기며 초월적∙신비적 서사를 삭제하가며 글을 쓰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하겠나이까
승조의 망나니의 칼에 머리와 몸이 동강 난 승조의 非無非有를 상기하며 ‘무아다 자성은 자성불성의 줄인 말이다 자성은 불성이다 진아다 참나다 진여다 그것들은 실체를 전제가 되므로 무아를 부정한다 그것은 붓다를 부인하는 것이다’를 주장하며 핑계를 찾아야 하는 나의 하루는 피곤하다 여기에서 중도를 거론하는 것은 난센스다
한자경 불교의 무아론 중에서
49.[잡아함경]<유아경>에서 붓다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내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내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지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短見/斷見이다.”
붓다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 다가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恒常된 것에 대해서만 상이나 무상,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 존재를 인정하는 有我論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붓다는 私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無我論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그래도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한다.
51.註-그러므로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기에,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즉,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견이나 단견으로 주장되는 자아, 즉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恒常된 자아와 붓다가 설하고자 하는 중도의 자아, 즉 연기 법칙에 따라 업으로써 이어지는 자아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자기 동일적 자아가 없이 과연 연기나 업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일생에서의 자아의 자기 동일성 문제를 두 순간에서의 행위자의 동일성 여부로 집약시켜봄으로써 상견이나 단견 상의 자아와 업의 자아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밝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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