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비교고찰(Anatman Theory of Buddhism and Jung's Self Realizzation) / 정현숙
불교의 무아설을 인도의 전통적 아트만 사상과 비교하고, 초기불교, 부파불교, 유식불교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는 무아설과 윤회설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업의 개념이 도입되고, 업의 상속을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 아라야식이 핵심개념으로 들어온다. 무아설을 상세히 입증하기 위하여 5위 100법의 존재론적 분류와 함께 8식의 인식체계가 도입된다.
아라야식을 정점으로 하는 8식의 인식체계는 정신분석학의 의식-무의식 체계와 심층심리학으로서 비교대상이며, 이중 무아설과 진여의 관계는 자아와 자기실현의 관계와 유사점과 차이점이 비교된다.
Ⅰ. 서론
불교의 사상 중 무아(無我)와 윤회 사상은 가장 널리 일반에 알려진 설이라 하겠다. 윤회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무아설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업(業)의 상속이란 개념과 의식보다 심층에 있는 아라야식 개념이 도입된다. 아라야식은 일체의 업이 함장되는 식으로써 의식과 자아는 이 아라야식에서 생멸하는 일시적 가유(假有)로 인정된다.
불교의 무아설은 각 개체에 영원불멸의 실체인 영혼 즉 아트만이 실재한다는 바라문의 전통사상에 반대되는 사상이며,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철학과 유식불교의 심식설(心識說)을 통하여 정교한 인식 심리체계에 바탕하고 있다. 초기에는 실체로서 영혼을 부정하는 인무아(人無我) 사상에서 대승불교에서는 일체 현상적 존재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법무아(法無我) 사상으로 발전했으며, 모든 존재를 허상으로 보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이런 존재의 기반이라는 유식설(唯識說)에 근거하고 있다.
유식설의 핵심은 인식하는 주체로서 8가지 식(識)을 상정한 점이다. 이중 5가지 식은 5감의 인식체계이고, 제6식은 일상적 경험의 주체인 의식이며, 제7식은 자아의식의 원천이고, 제8식은 아라야식으로 모든 업이 갈무리되는 장식으로 이의 견분(見分)을 제7식이 자아라고 집착한다. 의식을 넘어선 제7식과 제8식을 심층심리로 상정한 점에서 현대서구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의 무의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특히 아라야식과 융의 집단무의식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부영 등 많은 선행 연구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불교의 무아설을 아트만 사상과 부파불교의 관점에서 개괄한 후 유식불교의 아라야식의 종자-업 개념 및 윤회설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다음 융의 분석 심리학의 자아(自我 Ich)와 자기(自己 Selbst) 원형 및 자기실현의 개념과 비교하여 유사점과 상이점, 상호 회통 가능성을 논하였다.
Ⅱ.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사상
불교의 무아설(無我說 anatman)을 이해하려면 석가모니 이전부터 있어온 우파니샤드의 아트만(atman) 사상을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사상은 인도 철학의 양대 흐름으로 실재(實在 Reality)에 대해 상반되는 견해를 대표한다. 바라문교의 전통에서는 각 개인마다 불변 부동의 실체인 아트만이 있어서 존재의 영속성이 유지된다고 보았다. 불교의 무아설은 이러한 아트만 존재를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어떤 사물도 불변의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
바라문교의 대표적 경전이라고 할 우파니샤드는 아트만과 브라만(Braman)이라는 둘을 현상적 세계의 근거로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로 본다. 브라만은 우주전체이며 이 세계의 객관적 측면이라 볼 수 있고, 아트만은 개체의 주관적인 측면이라 볼 수 있다. 우파니샤드는 상반되는 두 개념인 아트만과 브라만을 논리적 상호 배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결합하는 초월성을 보여준다.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 1) 라고 말한다 . 이러한 진술은 논리적으로는 오류이거나 무의미하다. 그러나 무제약자(無制約者)인 궁극적 실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받아들일 때 초월적 통찰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Self)가 브라만이며, 이 모든 것이다." 라는 진술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아트만이라는 개체적 실체와 브라만이라는 전체적 실체의 이해를 위해서는 논리를 초월한 특별한 통찰력이 요청된다는 종교적 언어의 상징성으로 보아야 한다. 아트만과 브라만이라는 개체와 전체를 상징하는 두 개념이 결코 서로 분리된 실재가 아니란 점이 종교적 통찰력을 요한다.
궁극적 실재로서의 아트만은 개인의 영속성과 불변성 및 정체성(identity)을 보장해준다. 「카타우파니샤드」의 다음 인용문은 대표적 진술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자아는 결코 태어난 것이 아니며 결코 죽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며 어떤 것도 그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는 태어나지 않으며, 영원하며, 변치 않으며, 최초의 것이다 그는 육신이 죽을 때에도 죽지 않는다." 2)
이 진술은 개체로서의 자아에 관한 유아설(有我說) 또는 영혼의 실재성에 관한 주장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의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 자아는 결코 개체에 한정되고 고립된 모나드(단일체, 불가분의 단위. monad)가 아니다.
"이 위험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곳(육신)으로 들어간 그 자아를 발견하고 깨달은 모든 사람, 그는 이 우주를 만든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만든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이다. 실로 그는 세계 그 자체이다." 3)
"실로 이 자아는 모든 사물들의 주인이며 모든 존재들의 왕이다. 모든 바퀴살이 바퀴통과 바퀴 테에 묶여 있는 것처럼, 실로 이 자아에 모든 존재들, 모든 신들, 모든 세계들, 모든 숨 쉬는 생명들, 이 모든 자아들이 묶여있다." 4)
우파니샤드로 대표되는 바라문교적 전통에서는 아트만의 실재는 보편적인 실존으로 불변부동, 불생불멸이며 영속적이라고 보았다. 무상하게 계속 변해가는 현상세계의 속에 아트만이라는 불변부동의 아트만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실재(Reality)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Substance view)을 갖고 있다. 계속 변화하며 다양한 피상적 현상의 실재성을 부인하였으며, 아트만을 중심으로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을 실체론적 틀에 맞추었다.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석가모니의 사상의 차이를 라다크리슈난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파니샤드와 붓다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경험세계(samsara 윤회의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nirvana 열반)에 대한 양자의 개념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불교와 우파니샤드 간의 근본적 차이점은 불변의 실체가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불변의 실체란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데 .....부단히 흘러가는 삶 속에서 또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붓다가 그 중심이 되는 실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는 그러한 힘의 요동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5)
바라문교의 전통에서 석가모니가 불러일으킨 개혁의 초점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점으로 영원한 실체로서의 아트만의 부정이다. 자기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은 오히려 모든 번뇌의 근본인 무명(無明)이라고 보았으며, 아트만을 부정하는 무아 사상이 불교적 형이상학의 중심이다.
Ⅲ. 초기 불교 및 부파 불교의 존재론적 무아 사상
석가모니 재세 시부터 무아 사상은 3법인(三法印)의 하나로 핵심적 교설이었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부처님 법의 인증과 같다고 본 것이다. 빠알리(Pali) 경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구(詩句)는 이를 잘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어찌나 순간적인지; 성장하고 쇠락함이 그 성품이도다. 생성되고 다시 소멸하니; 그것들을 지복(至福)의 경지로 이끌지어다."6)
아트만 사상에서 실재를 불변부동의 정적이고 공간적인 존재(being)로 파악한데 반하여 불교에서는 역동적이고 시간성에 바탕한 생성되는(becoming) 그리고 사멸하는 과정에서 실재를 파악했다. 부처는 아트만 사상을 부정하는 일에 강한 노력을 기울였다. 밧타차리야(V.Battacharya)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교파들은 영원한 자아, 즉 아트만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붓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였는데 그 방법은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다. 그래서 모든 욕망의 근원인 바로 그것(아트만)을 끌어 내렸던 것이다." 7)
불교 교리의 조직화와 철학 이론화 과정을 이룬 부파불교 시대에 무아론은 불교의 존재(法)에 관한 이론, 윤회와 업에 관한 이론과 결합되어 더욱 심화 발전하였다. 부파불교의 철학의 대표저작인 세친(世親 : Vasubandhu)의 「구사론(俱舍論: Abbidharma-Kosa)」은 아트만론을 철저히 논의 반박하였으며, 불교적 존재론을 제시하였다.
부파불교에서 존재(法)의 분류에 관한 이론이 발전하였는데, 세친의 ‘구사론’에서 5위 75법(五位 七十五法)이론을 제시하기 이전에 5온 12처 18계(五蘊 十二處 十八界)의 3과설(三科說)에 의한 제법의 분류가 행해졌다.
12처와 18계는 5온의 마지막 요소인 식(識)에 관한 사항인 바, 다음 절에서 8) 유식(唯識)불교의 핵심 개념으로 상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5온에서 ‘색’ 은 물질적 요소이고 나머지 넷은 심리 정신적 요소이다. 색(色:rupa)은 물리적 신체적 환경을 포함하며, 수(受:vedana)는 감각 또는 쾌∙불쾌의 느낌, 상(想:samjna)은 개념화(conceptualization), 인지(recognition)등의 정보처리 기능으로 컴퓨터의 CPU 기능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행(行:samskara)은 정서(emotion), 의지(volition), 또는 동기(motivations)의 의미로 파악되는 복잡한 개념이다.
5온은 부파불교 이래 모든 불교의 학파에서 택한 기본 범주로, 불교의 다른 핵심 교설인 연기(緣起)와 연계되어, 일체의 현상적 존재들(法)은 연기된 집합체(더미)로서 일시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5온의 각각은 영속적이고 불변적인 요소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무아사상과 직결된다. 색(色)과 무아설의 관계는 개인의 신체에 자아가 있을 수 없으며, 신체를 자아와 동일시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트만이 있다면 그것은 영속 불변 불생불멸인데, 신체는 항상 변하여 생멸이 뚜렷하므로 아트만이 신체와 동일시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아트만 또는 자아가 신체를 부리거나 갖고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므로 신체적인 것이 아닌 다른 요소가 자아인가를 분석하게 된다. 그래서 수∙상∙행∙식을 차례로 자아와 동일성이 가능한가의 관점에서 검토하게 된다.
개인의 감각[受]이나, 정보처리 기능[想], 의지[行]에서 불변적이고 영속적인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신체[色]에서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식 활동의 주체인 식(識)은 일종의 영적인 주체로 아트만이 깃들고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식과 무아설에 관해서는 다음절의 유식사상에서 상세히 논하겠으나 식과 아트만의 동일시는 허용되지 않는다. 출트림 갸쵸(Tsultrim Gyamtso) 의 다음 언급은 부파불교의 무아설을 요약하여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지속하며 단일하고 독립적인 자아를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런 자아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불교는 말한다. 다시 말해 온(蘊)은 자아를 결여하고 있다." 9)
부처님의 ‘짐진 자에 대한 설법’ 에서도 "오온이 짐이고 오온에 대한 집착이 짐을 운반하는 행위이며 오온에서 벗어나는 것이 짐을 내려놓는 일이며 짐을 진 사람은 경험적 개체이다"고 하여 오온에 자아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불교는 바라문교의 전통 사상 중 아트만설은 부정한 반면 윤회설은 인정하였다.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부파불교 이래 유식불교까지 무아설과 윤회설의 정합적 이해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부파불교에서는 업감연기(業感緣起)설로 이를 이해하였는데, 업력에 의하여 인과에 따라 윤회가 된다고 보았다. 도간경(稻竿經:Salistamba Sutra)에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동하는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업(業)이 익는다(熟)는 사실은 실현된다. 왜냐하면 인(因)들과 연(緣)들의 지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간 자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 태어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인들과 연들의 지속은 존재한다" 고 이를 설하고 있다. 10)
Ⅳ. 유식불교의 인식론적 무아설
초기불교의 3법인 중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보듯이 무아설은 현상적인 존재들인 법(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부파불교 시대에 법의 분석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구사론’에서는 5위75법으로 모든 존재를 분류했으며, 유식불교에서는 좀더 정교하게 5위100법으로 분류했다. 5위100법은 세친(世親)의 ‘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구사론은 4세기 부파불교 중 최대 종파인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 세친은 이 교리들을 수용하지 않고 비판했다. 여기서 ‘아비달마는 불법연구, 구사론은 창고’라는 뜻이다.
제법무아와 관련하여 ‘일체의 법은 무아’라는 뜻을 크게 둘로 나눠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누는데 인무아는 사람의 영혼이나 아트만과 같은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뜻이고, 법무아는 모든 존재에 영속적이고 불변적인 요소가 없다는 뜻이다.
본 논고에서는 인무아 즉 아트만의 부정만을 다루고 있으며, 이점에서 모든 심리현상의 주체로 유식불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심왕(心王)8법인 식(識)이론과 무아설의 관계를 고찰하겠다. 이는 불교의 무아설을 인식론적 측면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심왕 8법이 인식 주체로서의 8가지 식을 의미하며, 무아설은 이 8가지 식 가운데 아트만 또는 영혼이 없는데도 윤회는 가능함을 설명하고 있다.
8식 중 앞의 5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며, 안 이 비 설 신(眼 耳 鼻 舌 身)의 5감의 감각작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색법의 5근(根)과 5식(識)이 서로 상응하여 있지만 이의 현대적 해석은 명확하지는 않다. 예로 안근(眼根)을 눈(眼)과 시신경과 두뇌피질의 시각영역 중 어디까지로 봐야하며, 안식(眼識)은 두뇌피질의 시각 신경군과 여기서 나오는 정보를 처리하여 사물의 형태와 색깔을 판별하고 그려내는 정보처리 영역이 신경집합의 어디에 의지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근은 지각 기능 중 생리적 기관에 대응하고, 오식은 생리적 정보의 처리 해석 구상 기능에 대응한다고 대체적 구분을 할 수 있으나 엄밀한 해부 조직학적 분리는 어렵다.
전5식의 각각과 제6식인 의식(意識)의 관계도 엄격한 생리현상적 구분은 어렵다. 의식은 두뇌의 정보처리능력인 기억, 분별, 계산, 상상과 감정과 의지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5식의 작용도 정보처리 과정이 주요 작용이므로 기능 면에서 유사하며, 두뇌의 신경 구조면에서 6식과 전5식의 영역 구분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두뇌 피질에서 언어 영역과 시각 영역이 다른 점이 확실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분리가 확실하지만, 언어와 시각의 종합 영역 등 두뇌의 복잡한 기능까지 고려하면 상호 겹침 때문에 명확한 분리가 어렵다. 이에 6식의 각각이 독립된 주체인가 아니면 별개의 주체들이 모인 집합체인가의 문제가 유식불교 이전부터 제기되었었다.(팔식체일(八識體一), 팔식체별(八識體別)의 문제)유식불교에서 호법(護法) 계열에서는 독립된 8식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11) . 현대 인지과학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며, 민스키 등이 제안한 사회로서의 마음은 호법의 학설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제6식은 지(知) 정(情) 의(意)라는 일상적 정신활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는 제6식까지만 마음의 세계로 인정했다. 부파불교의 무아론은 5온(색수상행식)의 각 요소에 영속불변의 주체가 없다는 설로서 마지막 요소인 식(識)에 주체가 없음은 곧 6식 각각에 아트만이 없다는 뜻으로 보았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점은 윤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며, 이에 대해서 부파불교는 ‘업’의 인과적 연속성으로 답하였다. 이러한 답은 인식과 업의 윤회 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맺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개인의 인식 활동과 업의 윤회가 독립된 측면으로 기술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아트만적 인식 주체가 없는데, 우리의 일상 의식을 주관하는 경험적 주체의식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를 답하지 않는 점이다. 경험적 인식 주체의 기원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유식불교에서 제7식을 도입하는 소이이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manas)이라 부르며,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나’라는 아(我)의식의 경험적 주체의식은 제7식이 다음에 나오는 아라야식을 상분(相分)즉 대상으로 집착함과 동시에 견분(見分)을 자아라고 착각하여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나의 실체라고 사량 집착한다. 말나식은 오염된 식으로 생존본능이 강한 자아의식으로 4가지 근본적 번뇌의 뿌리이다. 아치(我癡: 미무아지리(迷無我之理), 아견(我見:망집아지오견(忘執我之惡見), 아만(我慢:어소집아상거오(於所執我上踞傲), 아애(我愛:탐착어소집지아(貪着於所執之我)라는 번뇌가 항상 따른다. 여기서 아의식의 시간적 연속성이 특징이며, 생사를 넘어 상속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개체의 신체적 사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의식이며, 찰나생 찰나멸하는 제6의식과는 달리 간단없이 연속된다 12) . 그러므로 말나식은 프로이드적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융의 개인무의식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제8식은 아라야식(阿賴耶識)이라 부르며 유식불교의 핵심적 식이며 무아설과 윤회설의 조화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루는 관건이다. 아라야식은 장식(藏識)이라 하여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의 세 가지 뜻을 갖는다. 아라야식의 특성은 세친의 ‘유식3십송’에 의하며, 김동화의 「유식철학」에 상세한 해설이 있다 13) . 능장의 의미는 일체 현상의 업을 종자로 함장한다는 뜻으로 갈무리하는 주체란 뜻이고, 소장의 의미는 종자가 갈무리되는 처소의 뜻으로 수동적 의미가 있으며, 집장의 의미는 제7말나식이 아라야식을 집착하여 아트만적 주체라고 믿고 집착한다는 뜻이다.
아라야식은 그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을 갖는다. 제7말나식이 집착하여 아집의 영속적 주체로 착각하고 있을 때를 아라야식(Alaya)라 하고, 선악 업보의 과보가 이루어지는 곳이란 의미에서는 이숙식(異熟識)이라 하고, 일체의 종자를 집지(執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 부른다.
아라야식은 부파불교의 업 사상과 식 사상을 결합하였다. 일체의 행위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함장된 후 연을 만나면 현현하여 과보로 나타난다고 본다. 본 논고의 무아설과 관련하여 보면, 아라야식은 아트만과 같은 영속 불변의 개체가 아니란 점이다. 아라야식은 일체의 기세계와 유정생명의 기반이 되는 근본식으로서 아라야식이 바다에 비유될 때 개체의 생명체는 파도 또는 물방울에 비유된다. 각 개인의 존재는 생노병사를 거듭할 뿐 그 안에 영속적 아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체의 생성과 사멸을 담지하는 것은 바다와 같은 아라야식인데, 이것에는 개체성이 없고 온 누리의 일체 현상이 해류와 같이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 흐름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종자로 있다가 생명체로 생장을 하는 과정일 뿐 아집의 대상으로 착각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사상은 불교의 무아사상과 윤회사상을 결합 조화시킨 대승불교의 인식론적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14)
Ⅴ. 분석심리학에서의 자아와 자기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크게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으로 나누고, 의식은 각 개인이 현재 인식활동을 하는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4가지 기본 기능을 포함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섬과 바다에 비유되며, 자아(自我:Ego)는 의식의 중심을 이루는 콤플렉스이다. 의식은 자아와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기능이라 할 수 있으며, 의식은 항상 변하며 무의식과 내용을 주고받는데 그 중심이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체의 정신활동 또는 심리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영역은 무한하여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personliche unbusste)과 집단 무의식(kollective unbewusste)으로 나뉜다. 개인 무의식은 한 개인의 삶에서 체험한 내용 중 의식 밑으로 잠수해버린 것들로 성적욕망, 심리적 갈등, 희구, 괴로운 감정, 의식하지 못한 약한 지각 등이다. 집단 무의식은 한 개인의 삶을 넘어서 인류 보편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아라야식과 유사성이 있다. 특히 원형(原型:Archetype)은 신화의 근원이고 종교적 심성의 뿌리로서 역사와 문화, 인종과 지리적 차이를 뛰어넘어 인류보편의 원초적 심리유형이다.
‘자아(自我 Ich,Ego)’는 의식이라는 유한한 심리영역의 중심이고, 여기에 대하여 의식과 무의식 전체 정신의 중심을 ’자기‘라고 한다.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나‘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일부인 의식의 중심일 뿐이다. 인간은 출생이후 자아의식이 점차 분화 발달하는데, 중년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서 무한히 넓은 무의식의 세계와 단절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15) . 자아가 사회적 평가에 맞추어 만든 페르조나(persona)에만 집착하다보면 사회적 성숙기인 중년에 이르러 한쪽의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자아가 의식에만 매달리어 그를 뒤받치고 있는 더 넓은 무의식의 세계를 못 보게 되어 반쪽의 삶으로 균형을 상실하게 되어 난관을 맞게된다.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무의식 세계로 확충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기(自己,Selbst)’는 의식과 무의식을 일관하여 전일성(全一性)을 갖는 개체성이며, 이것은 자아를 포함하며, 자아의 사회적 역할인 페르조나와, 자아의 무의식에 드리워진 그림자, 대극적 특성인 아니마, 아니무스 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무한한 세계인 무의식에로 확충 발전해 간다. 이것은 반쪽으로 갇혀 살지 않고 전체가 되고자 하는 원초적인 기능이므로 융은 자기원형(自己原型, Archetypus des selbst)으로 이 개념을 도입했다. 16)
자기는 한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기대 역할인 페르조나 또는 자아의식에 고착된 기계적인 삶, 의식계에만 갇혀진 반쪽의 삶을 넘어 전 생명력을 하나로 통합 분출하는 통일적이고 전체적인 정신을 회복하도록 한다. 이 전체성의 회복은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성(Individualitaet), 자신의 본성을 되찾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일(全一)적 인간성이 어떤 일정한 형식으로 정의된 특정한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성을 지닌 다양한 형태의 자기 고유의 모습이며, 동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자기 원형이다.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할 때 의식은 바다의 작은 섬에, 자아는 그 섬의 중심으로 비유되고 , 자기는 자아의 의식 한계를 넘어서 무의식까지 포함하는 전일성을 주는 원초적 가능성이다. ‘자기실현(自己實現)’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자기실현은 개성화이며 자아의 성숙을 의미한다. "자아성숙의 궁극적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정신을 구별하되 사회적 의무와 규범의 필요성을 자기의 전개성(全個性)에 합치되는 범위에서 인정하며,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며, 때로는 여기서 물러나 안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고 이부영은 기술한 바 있다. 17)
자아의식이 페르조나에 집착하여 사회적 역할에만 고착되고 무의식의 세계와의 단절이 일어나면 정신적 불균형에서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이 무의식 세계와의 통합을 추구하고 균형 있는 정신의 성숙을 위해서는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무의식의 내용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자아이다. 자기실현의 성패와 수준은 개체의 자아의 태도에 달려있다.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무의식이 꿈 등 상징을 통해서 제시하는 의미를 이해하여 전일성을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아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일은 유한한 작업이 아니다. 무의식은 무한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전부 의식화하여 완전해지는 것이(Vollkommenheit) 아니라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Vollstandigkeit)라 한다. 18)
Ⅵ.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
불교의 무아설을 종교적 측면, 역사적 측면, 문화적 측면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할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무아설을 논리적 측면, 존재론적 측면, 인식론적 측면에서 종합 검토하였다. II장에서는 아트만의 실체론적 존재론이 갖는 논리적 모순점을 초월적으로 해결을 시도하는 우파니샤드의 관점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다음에 이어지는 불교적 관점들과 대비하였다.
아트만설은 윤회사상의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지만 불변적 존재의 논리적 난제를 낳는데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철학적 문제를 ‘종교적 초월’로 회피하였다. 반면에 불교는 무아설을 주장함으로써 윤회사상과의 정합적 이론체계 구성이라는 과제를 안게 된다. 이의 해결을 위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추구가 불교철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아트만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인무아(人舞我)사상의 존재론적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존재론적 실체의 부정은 연기(緣起) 사상으로 해명하였으며, 존재론적 범주인 오온(五蘊)을 도입하고 각각에 존재론적 실체가 없음을 제시함으로써 무아설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실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주체의 존재와 윤회는 무아설과 논리적으로 대립이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업(業)에 의한 윤회인 업감연기(業感緣起)설을 발달시켰다.
존재론적 무아설이 윤회문제 해결을 위하여 업감연기설을 제안하였으나 윤회주체가 사멸 재생할 때 업의 연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며 이에 인식론적 과제로 되었다. 이에 부파불교의 6식에 제7식과 제8식이 추가되어 심층심리의 연구가 유식불교의 주요 업적이 되었다. 제8식인 아라야식은 인식주체뿐만 아니라 일체의 기세간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였고, 이에 윤회는 아라야식의 깊은 바다에 파도가 생겨났다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무아설과 윤회의 정합적 이해를 위한 철학적 노력이 결과적으로 심리학적 측면이 강조되는 인식론적 논의로 이어졌다. 이에 유식 불교의 무아설은 현대심리학 중 심층심리를 다루는 정신분석학 및 분석심리학과 상호 비교가 요청된다.
유식불교와 분석치료의 심리학적 비교 시론은 최동훈과 이부영이 일찍이 시도한 바 있으며, 이죽내 교수는 불교유식학과 정신 개념의 대비 등 일련의 연구를 했다. 필자는 융의 원형과 아라야식의 종자설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상이점을 논한 바 있으며, 본고에서는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실현을 비교 고찰 하고자 한다.
유식불교의 무아설은 5위 100법으로 분류되는 일체의 현상에 영속적이고 불변부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존재가 없다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부정이다. 이 주장은 정신(心法)뿐만 아니라 물질까지(色法) 포함하는 광범위한 점이 분석심리학의 정신세계에 국한된 점과 차이가 있다. 이제 무아설을 정신에 국한하기로 하고 심식(心識)에 한정하면 감각의 5식과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라야식에 관한 무아설로서, 영원한 불생불멸의 개체인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식주체로서의 절대적 개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유식불교 무아성과 융의 ‘자아’는 제6식 즉 의식에서 논의가 되므로 상호 비교가 가능하다. 무아설에서도 경험적으로 ‘자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란 점, 그리고 ‘무아’를 깨쳐나가고 노력해야할 주체로서 자아의 능동성을 인정한다는 점, 그러나 ‘자아’의 틀을 깨야한다는 점에서 융이 자기실현에서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과 일치한다.
융은 ‘자아’가 개인의식의 중심체로서 심리적 주체란 점을 강조한 반면에, 불교에서는 ‘자아’는 경험상으로 있어 보이는 가유(假有)에 불과하며 이것이 실체가 아니며 실재가 아니란 점을 강조한 면이 서로 다르다. 융은 이 ‘자아’가 사후에도 영속되는 어떤 개체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 연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면서 제6식에 나타나는 자아는 영속성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논의의 복잡성이 야기된다.
윤회설을 무아와 병립시키기 위하여 업(業)의 개념이 도입된다. 한 개체의 자아는 신체적 사멸과 함께 단절되지만 자아가 행한 업은 상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로 된 업이 어떻게 새로 태어난 다른 자아와 연결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며, 이에 대한 답으로 제8식인 아라야식 설이 대두된다.
아라야식은 모든 개체의 의식들이 생겨나는 근거인 바다와 같은 모체로서의 식이며, 각 개의 자아들이 행하는 업들이 종자로서 갈무리되는 장식(藏識)의 의미를 갖는다. 아라야식과 융의 집단 무의식은 다 같이 무한한 것이며, 자아는 여기서 나타나는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아라야식 자체는 불생불멸인 전체이며, ‘자아’의 의식은 업의 흐름을 따라서 인과의 법칙으로 일시적 생과 멸을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아설은 이 자아가 아트만이 아니란 점과 아라야식에서 생멸하는 가유인 점과 업에 따라 윤회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자아의 유한성과 의식 밖의 무의식의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점에서 유식불교와 분석심리학은 유사하지만, 업의 상속과 윤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둘은 크게 다르다. 융은 자아 의식에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무의식 상징의 이해 등을 통해 무의식을 의식에 확충해 감으로써 자기실현에로 나간다고 본다. 불교는 이 ‘자아’가 허상임을 강조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을 영원한 자아로 착각하는 제7식의 아집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피상적으로는 자기실현과 불교의 견성이 서로 반대로 보인다. 즉 ‘자아’를 더욱 확충하는 길과 ‘자아’를 깨버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피상적 차이는 ‘자기원형’과 아라야식의 진여 또는 여래장설과의 심층 비교에서 상호 소통으로 바뀌게 된다. 이 점은 이부영의 논문 ‘불교와 분석심리학’ 19) 에서 논의된 바 있다. 진여(眞如)와 자기(自己)가 근원적 본성의 실체란 관점에서 두 학설은 기본 바탕을 함께 하고 있다. 자기는 전일(全一)의 경지에 이르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전일의 경지 바로 그 자체이므로 진여의 사상과 흡사하다. 자아를 확충하여 자기에 이르는 것과 자아라는 작은 울타리를 깨버리고 진여에 합일하는 점이나, 실체의 본성에 이르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중생(자아)은 그 속에 불성(佛性)을 갊아(?) 있다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모든 자아는 원초적으로 전일성(全一性)에 이르려는 동인을 갖추고 있으며 이것이 ‘자기원형’ 이라는 융의 학설이 크게 보아서는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불교의 무아설과 융의 자기 실현설은 아라야식과 집단무의식의 유사성, 진여 또는 여래장 사상과 자기원형의 유사성 등에서 상호소통이 가능하다. 자아를 버리는 것과 자아를 확충하는 것이 상반되는 것 같지만 실재인 자기 또는 진여를 회복한다는 관점에서는 두 사상이 회통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설을 인정하고 업과 종자설을 기본 기작으로 도입한 점이 분석심리학과 다르다. 분석심리학은 원형의 무시간성 내지는 인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아의 윤회 가능성을 전혀 논하지 않는 가운데 자아의 자기 확충만을 고려한 점에서 결과적으로 의식의 세계에 국한된 점이 제한적이라 보며, 이는 서구적 객관적 과학논리에 바탕한 측면에서 이해되는 바이다.
Ⅶ. 결론
불교의 무아설을 아트만 사상과 분석심리학의 자기원형설과 비교하였다. 제6식인 의식의 중심으로서 자아의 경험적 존재는 이 세 사상에서 모두 인정하는 바이나, 이 자아의 본성에 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아트만 사상은 자아의 속에 영원불변 불생불명의 영혼이 있어 생명의 영속성과 윤회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영속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나 업의 인과에 의한 윤회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영혼의 존재와 실체성 등 형이상학적 논의를 하지 않으며, 자아는 의식의 중심일 뿐 사후의 존재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는 점이 다르다.
아트만 사상은 개체로서의 영혼의 실재를 인정하지만 이 아트만이 고립된 모나드가 아니라 전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임을 주장함으로써 상호 대극적인 통일을 모색한다. 불교에서는 자아의 의식에 영혼의 실재가 없다고 보지만 모든 업을 함장하고 자아의식의 생멸의 기반이 되는 아라야식을 통하여 무아와 윤회를 조화시키고, 아라야식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유식(唯識)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일체의 오염사량(汚染思量)이 없어진 아라야식을 진여(眞如)로 보아 불생불멸의 실재와 생멸하는 자아의식의 통합적 사상을 제시하였다. 융은 자아의식을 포함한 의식과 무의식의 전일적 통일로 자기원형을, 그리고 개체적 한계의식에 무의식의 확충을 자기실현으로 보았다. 자기실현을 통한 자아의 원만한 성숙을 분석심리학의 교육적 목표로 본점은 자아의 좁은 틀을 깨고 진여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견성 수도와 유사점이 있다.
아트만 - 브라만 사상과, 무아 - 업윤회 - 아라야식 사상과, 자아 - 자기원형의 사상은 많은 다른 문화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체와 전체의 합일, 변화와 불변, 허상과 실재라는 대극적 개념의 합일로 전일(全一)적 인간상을 파악하려는 유사점이 있다. 이들을 종합하고 회통하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현숙鄭賢淑 수원대학교(Suwo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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