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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초의艸衣의 찻잔

초의艸衣의 찻잔

 

 

 

아리수 건너 광주廣州 땅 외진 곳

백토의 숙명으로 태어나

호주가豪酒家의 분청사기 호로병보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계영배戒盈盃가 되고 싶었다

 

힘 센 사기장은 당찮은 욕심 지우라며 찬물에 담가 채로 거르고 하루를 더 채워 내 몸에서 욕심 사라지지 않은 것을 알아보고 발로 뭉개고도 부족해 사흘 동안 욕심 가라앉히라며 마지막 소망의 기포마저 짓이겨 없애고

 

소망이 쉬 이루어지는 세상은 없는 거라며

깨질 때까지 뜨거운 물을 받아야 하는 찻잔의 운명 되어

소망과 욕심 사이를

초벌의 불길이 나를 감싸고 돌고 돌면서

끝없이 태운다

 

추상같은 대나무 그려놓고 비스듬히 바라보는 사기장의 서늘한 눈매에 마음 녹이고 그 마음 갈라지지 말라고 실금조차 금지한다고 다시 곱게 화장化粧 시키고 달보다 더 뜨거운 불속에 집어넣고, 가마 속은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며 순환하는 번뇌쯤은 가벼이 식혀버리는 차가운 우물

 

꼬박 하루의 재벌 여행에서 살아온 기적을 겪으며

사기장 어머니 천도제의 보답으로

초의의 찻잔 되어

우전雨前의 떨떠름한 맛과 일지암 새벽안개 향 가득 채워

맞이한

다산茶山, 추사秋史, 소치小癡의 입술

 

다산의 입에서는 오랜 유배를 버텨낸 쓰디쓴 냄새와 더불어 한지의 깊고 그윽한 향기가 났으며 추사에게는 제주의 거센 바람 이겨낸 난향과 검은 묵 내음이 났으며 소치에게는 항몽抗蒙의 결기와 남해의 비릿한 냄새와 붓털의 묵은 냄새가 났다

 

지루한 겨울 이겨낸 봄

이슬 젖은 우전雨前 부족해

곡우 뿌려 자란 세작細作 걷으려 오체투지로

무문관 나서는 초의의 긴 그림자 하나

산 밑까지 뻗어 흐르는 새벽

그믐달 졸린 눈으로 가늘게 걸려 있다

 

 

*아리수 : 고구려 때 한강의 이름

*계영배 :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오르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잔으로 절주배節酒盃라고도 한다.

*초의 : 다성茶聖. 선승으로 이들과 차를 통한 교유가 깊었다.

*다산 : 정약용

*추사 : 김정희

*소치 : 허련. 남종화의 대가. 진도 운림산방 조성.

*우전 : 곡우 전에 딴 최상급 차.

*세작 : 곡우 지나고 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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