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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복권에 대한 신화적 고찰 / 도봉 김정남

복권에 대한 신화적 고찰 / 도봉 김정남 

 

 

1

98년을 신화처럼 살아온 늙은 철학자는 ‘60세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라는데

하릴없이

등나무 밑에 앉아 단식사斷食死를 검색하다가

머리 위에 툭 떨어지는 열매는 덜 익은 지혜 같은 것

상념은 갑자기 깨어지고 그것은 무엇이고 왜 내 머리 위로 떨어졌을까

궁금증에 잠시 목을 매다가

목련의 요절夭折한 열매임을 알아내고는

고목나무에 꽃 피우듯

갈 때는 낙엽인 양 툭 떨어지는 것이 목숨이라네

차마 치우지 못한 술병들 의자 밑에 넘쳐난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와 찢어서 버린 하찮은 복권으로 만드는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한데
햇살 예리해 아픈 오후
하늘마저 무심한 듯 지독하게 파랗다

 

2

순례자의 심경으로
묵은 빚 갚으러 남으로 간다
실패를 거듭한 후 정상에 섰다

순수한 햇빛과 바람을 접했으니

희생물로 한 목숨 바쳐서 뭐가 아까우리

서러운 것도 없으니 꺼이꺼이 한바탕 그렇게 가슴으로만 울었다

무심한 바람 불어

무성한 구름이 서로 뒤엉켜 하늘은 더욱 당당한 슬픔이 된다

내 마음은 흐려지고

구름과 바람을 구별할 수 없을 때
시간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바람에 지워지고

바람의 신화는 복권이었다지

 

3

로또만 복권이 아니다

운명에 대한 깨달음은 분명 당첨보다 감미롭고 황홀하다면

누가 믿겠느냐마는

엄살 많아진 나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통증과 약에 취해 빠지는 잠

조금씩 펴지기로 작정한 손의 관절과 통증
오름을 한사코 거부한 그 산에 오르는 것
히말라야의 성자가 가슴에 깃들 만큼 수행을 잘 해냈다면

히말라야에 올라 산과 땅과 하늘과 바람과 하나 되었다면

당첨과 별 다를 바 없다

 

4

우리는 신화에 대하여

경계라 쓰고 방향이라고 설명한다

자연의 변화를 재구성하여

천둥번개가 치면 싸웠다고 간주하고

비가 내리면 슬픈 일이 생겼다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화가 치밀었다고

이런 허황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복권은 신화와 같다


신화란 때로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처럼 숭배의 대상이 아닌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살다가 끝 모르고 다가오는

아픔도 잔잔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신화는

석양에 서쪽으로 비껴가는 태양의 각도에도 무심하다

오늘 밤

달은 어느 산을 넘어오나
당신의 긴 한숨 내게 쉬어 봐도 괜찮다

‘인생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프거나 불행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복권과 신화처럼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권과 신화와 삶이 ‘덧없는 은유’들이라도 말이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