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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비석을 만지면서 / 道峰 김정남

비석을 만지면서 / 道峰 김정남

 

 

작년에 본 박인환의 망우리 무덤은

흙과 잔디가 반반인 성지 같았다

비석을 쓰다듬는 왼손은 죽음의 장엄함을

통증을 이기지 못하는 오른손은

삶의 비장함으로 가득 찬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지난밤 꿈에서 만난 박인환

백구두를 신고

명동백작이란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신설동 풍물시장 안에

부안이 고향이라는 장금이네 식당에서

소맥을 곁들인 아귀찜을 먹으며

밤을 태웠다

취하면서 세상은 넓어졌고

목에 낀 때를 벗기며

우리의 거칠고 악의적인 단어들은 취기로 비도덕적인 연금술을 거쳐

금이 되었고 때때로 꿈이기에 가능한 금강석이 되었다

‘목마와 숙녀’에서는 트로이 목마가 되고 술병 속에 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환생한 듯 이름이 비슷한 박인희의 ‘얼굴’에서는 무욕의 복면을 썼고

‘세월이 가면‘에서는 시간이 열렸다

 

순수는 야릇한 것

사막에서는 여인의 육신이 굴곡지고

바다에서는 파도가 일고

산에서는 바람이 되었다

닮은꼴을 한 백작과 나는 서로에게 물었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백작이여

그대의 전설을 닮은 죽음의 메마른 비석이 되어

그대의 술병 속 신화에서

술의 순수와 낭만을 배워야 할까

심장병 동지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눈을 떴을 때 그믐달이 동녘 하늘을 빛냈다

비석을 만진 왼손과

막걸리를 닮아

장애를 만난 오른손은 여전히 아팠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