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람의 색깔 / 道峰 김정남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 안에서
혹카이도의 유빙 속으로 사라진 사내를 보며 시작한 바람은 색이 없다
다행히
‘바람의 색은 없다’로 시작하는 시의 결말은 항상 억울하다
1월의 추위 속에 핀 동백꽃 곁에 부는 바람의 색은 빨갛다
2월의 매화와 함께 부는 센바람을 분홍색이라 하겠는가
3월의 제주의 유채와 광양의 산수유와 함께 피는 바람의 색은 노랗다 3월의 산수유를 보지 못한 사람은 조금 올라와 지리산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생강나무꽃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4월의 매화가 뒤늦게 지면 솟는 벚꽃과 함께 내리는 바람은 벚꽃스럽다 지리산 등성이로 오르며 만나는 너도바람꽃 남바람꽃 노루귀 얼레지꽃에 얼을 뺏기면 어떠랴
4월의 수선화의 색과 황사가 노랗다고 바람과 흙을 구별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언제나 나의 웃는 얼굴만을 기억해주세요 그러므로 나를 잊지 않을 거예요 – 노예 흑인의 유언
5월의 수수꽃다리 옆에서 살랑거리는 명주바람은 보라스럽다고 한다
강남에서 오는 제비는 바람을 타지 못하면 강북으로 올 수 없다 그때 바람의 색은 따뜻하다
6월의 산들에 핀 노루귀에는 깊은 색의 바람이 분다 노루귀는 사슴꽃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현명하다
7월 도봉산을 바라보며 창포원에서 익어가는 히야신스와 튜울립은 노랑과 빨강이 겹쳐 눈을 미치게 한다 소나기꽃이 피기 전에 부는 바람의 색을 보려면 마땅히 밀물이 드는 바다로 가야 한다 밀물이 그치고 썰물이 시작할 때 잠시 바람이 멈춘다 그때야 바람의 색이 보이기 때문이다
8월의 쪽동백에서는 동백기름 냄새보다 고소한 바람의 색이 흐른다
9월의 연꽃에서는 깊이 배어든 붓다의 냄새를 닮은 바람의 색을 통찰해 세상이 해탈열반의 색으로 물든다
10월의 단풍꽃은 온 산을 미친 듯 돌아다녀 혼란을 잡을 수 없다 그럴 때, 검정과 흰색을 합한 새, 북방에서 오는 기러기는 바람을 타지 못하면 날 수 없다
11월에 촛불을 태우는 바람의 색은 자유를 닮았고 고창의 국화 바람은 사람 환장하게 한다
도봉산 양지 녘에 막차를 겨우 타듯 생뚱맞게 핀 진달래꽃은 계절을 놓친 듯 양달의 색을 내지만 나는 그 색을 아직 모른다 피카소의 색이 그랬다던가 고흐의 색이 그랬다던가
12월, 바람은 을씨년스럽게도 눈물을 닮아 투명하다
블루는 투명을 닮았다
1년 동안 불어온 바람의 색을 한꺼번에 버무리면 민주와 평화와 자유와 평등의 색이 되어야 마땅하다
지구보다 수천 억 배의 수천 억 배보다 큰 우주는 조용한 바람이 부는데 지구의 바람은 왜 이리도 시끄러운 색으로 나대는지
시끄러운 바람의 색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봄날의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마당의 어지러운 꿈의 바람색은 없으니 ‘이 같은 물음이나 논쟁은 실익이 없다 할 것이다’
죽는 것에는 색이 있으나 죽지 않는 바람에는 색이 있을 수 없다
새와 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와 바람이 그러 하듯이
바람에겐 그림자가 없으니 죽음이 없고 멈춤만이 있을 뿐
그림자를 버려서 남기지 않는 나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니까
바람의 마음은 자기 맘대로 자신의 색을 정하고 나른다
별빛의 색은 별의 수만큼 많으니 구별이 불가능함을 아쉬워한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