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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서가 빨래 / 道峰 김정남

서가 빨래 / 道峰 김정남 

 

 

 

나의 독자적인 역사이자 골칫거리들

머리를 비우듯

서가의 책들을 빨랫감처럼 정리한다

 

기준은 10년 동안 한 번도 읽지 않고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책은 버린다

버리는 책은 방의 반에 찼으며 고물상은 단돈 3000원을 치뤘다

물론 거울의 눈금을 속인 것을 안다

미리 재봤기 때문이다

저울 눈금은 부자지간에도 속인다는데

 

다섯 개의 서가에서 네 개의 서가를 비우면서

10년 넘은 책 중에서 살아남은 일곱 권

주역周易 / 남만성 역. 1969. 현암사

존재와 무 / 사르트르. 1972. 을유문화사

종의 기원 / 다윈. 1972. 을유문화사

현대문명비판 / 토인비 + 세계문화소사小史 / 웰즈. 합본 1972. 을유문화사

실존주의實存主義는 휴메니즘이다 / 사르트르. 1969. 신양사

반야심경 / 홍정식 역해. 1977. 동서문고

바둑정석 / 조남철. 1966. 출판사 미상

 

40년이 넘은 책들의 내용을 그때 이해했을까, 부정한다

 

가장 최근에 산 책 - 마음과 철학 유학편 /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가장 최근에 얻은 책 –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 / 김재영

가장 최근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책 – 삼국지 10권 / 이문열, 사람의 아들 / 이문열

가장 최근에 동네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 벽암록, 이기적 유전자, 티베트의 즐거운 지혜, 만들어진 신

 

이문열의 책들은 큰딸이 버렸다

 

다시 돌아온 책 – 선심시심禪心詩心. 부제 불문학자와 선시禪時 / 달공 조홍식. 도피안사

10년 전에 내가 준 그 시집은 10년이 지나 내게 다시 돌아왔다 그 시인은 내게서 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서

선시에 왜 때 시時를 붙였을까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와 ‘실존주의는 휴메니즘이다’를 뒤적거리다

낡은 냄새에 젊은 날의 치기를 재채기하면서 궁금해 한다

서가의 자리를 빼고 남南을 향해 뚫린 창으로

8시 전에 어김없이 불암산 넘어 얼굴 붉게 내미는 서늘한 섣달 겨울의 해, 햇빛, 햇볕에

종일 호사 누리고

내려다보이는 중랑천

불암 · 북한 · 수락 · 도봉산 사이로 넉넉하게

얼지 않고 흐른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