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작시

남도로 간다, 지리산 혁명의 성지로, 다시 혁명을 위하여 / 道峰 김정남

남도로 간다, 지리산 혁명의 성지로, 다시 혁명을 위하여 / 道峰 김정남

 

 

 

젊은 날

울분을 산에다 털고 온 것을 미안해하는 마음과

다시 방랑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불편한 몸을 가지고 남도길에 올랐다

지도는 필요 없다

머릿속은 온통 길과 높이와 바람으로 차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구례시장에서 맛으로 절로 힘이 솟는 김치를 사면서

석 달 열흘은 끄떡없겠다는 용기를 짊어지고

성삼재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막걸리 한잔

뒤통수에 반골이 솟아 하지 마라면 더 하는 수상한 성격은 나도 모른다

가까운 길옆의 노고단은 가짜이니 진짜를 보러 멀리 오른다

임걸령 피아골삼거리에서 잠시 갈등

노루목 지나 삼도봉에서 물 한 모금

동판銅版 지도는 여전하다

중봉은 자주 지나쳤으나

이번은 그럴 수 없다

 

40년 전 남원 은선, 강가에서 아침밥을 지어먹고

뱀을 닮은 길을 따라 긴 뱀사골을 올라 산장에서 잠들 때

뱀귀신 소리가 들렸다

뱀을 하도 많이 잡아먹었으니 환청에 시달려도 별 수 없다

그 기억을 잊을 수 없지만 산장이 없어진 것이야 안타깝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

새벽에 밥을 지어먹고 주먹밥도 준비하지 않고 반야봉 지나 중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무지막지한 구보로 시작해서 임걸령을 거쳐

전사들의 죽음이 널렸던 피아골에서 만장의 걸음으로 장엄하고 거룩하게

그들의 핏빛을 닮아 피처럼 피어난 단풍꽃에게 삼배 그리고 묵념

피아골을 지나 연곡사에서 촛불 하나와 향 세 개로 철 지난 재를 올렸었다

 

기억을 떠올리다 지나치는 갈등을 이기고 중봉에서 내려와

피아골 가는 것은 피하자

 

다시 선비샘을 향해 가면서 마른 목마름은 김지하의 전용어가 아니다

전라 경상인들이 만나 열었다던 화개재 장터를 믿지 않지만

선비샘은 여전하다

가파른 토끼봉을 넘어 편한 길 따라 가면서 내 나이가 길 위의 유행기遊行期임을 상기한다

명선봉을 우회하는 쉬운 길로 바람 따라 간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짐을 푼다

몰래 감춰둔 더덕주를 풀고

대피소 참치캔과 구례 김치로 여독을 풀었던 10년 전

늦은 점심 겸 마신 막걸리 생각 간절하다

대피소에서 열흘만 지내면 욕심이 없어지겠건만

속이 없어 내려놓을 것도 없는데 가도 가도 솟는 욕심이 많아지는 위인이라

삼대의 공덕은커녕 악업만 가득 차 있는데

업이 끝나면 맞는 죽음은 언제 오려나

공덕을 쌓아도 보지 못할 일출을 맞으러 천왕봉으로 한 걸음부터 뛴다

벽소령대피소는 잠시 꽃단장하며 휴식 중이라

거친 바람 속에서 피었던 보름달 아쉬워 지나치고

덕평봉 칠선봉 반갑다

영신봉에서 반달곰 조심하라는 표식을 보며 문득

삼신이 바둑 둔다는 삼신봉을 떠올리고는

청학동으로 내려가 애들 훈장 노릇하면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즐겁다

세석대피소 세석평전 너른 풀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죽어가는 구상나무 아래서 역시 더덕주 한 잔 뿌리고 애도의 한잔

대피소의 밤은 깊어도 잠이 들지 않아

잠시 밖으로 나오니

구상나무 피톤치드 바람에 쓸려가도 향은 여전하고

촛대봉을 구도의 희망으로 삼아

영영 내려가지 않고 살다 가고 싶어라

아침에 출발하며 손바닥에 침을 뱉고

내심 왼쪽 40년 전의 바보 같은 한신계곡으로 하산할 것을 바랐지만

아직 소망의 끈을 놓지 말라며 앞으로 뛴다

이런 경우 점은 내 운명을 닮는다

가까운 연하봉 거쳐 장터목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로 하자

일찍 행장을 꾸리고 제석천과 고사목이 춤추며 기다리는 제석봉은

언제나 슬픔으로 장렬하다

천왕봉에 올라 혁명의 피를 닮은 해를 기다리다 지쳐

백무동계곡은 다녀갔고

빨치산사령부 법계사도 지나왔고

원시림 칠선계곡은 다음으로 미루고

써리봉 지나 치밭목대피소에서 잠시 쉬고 대원사로 가자

그들 실패한 혁명의 넋을 기리러

힘들어 한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 준 것은 땅과 물, 불, 바람의 힘이었다.

 

대웅전에서 마주친 붓다의 눈은 내게 항상 무서워 마주치지 않는다

무상 · 고 · 무아 삼법인을 주창한 붓다여 무아인데 누가 열반하며 윤회하는가요

나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며 나의 것이 아니라면서요

실체는 마음이 그린 영상이라면서요

그래서 공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요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성불할 날이 올까요

카스트 제도를 못 마땅해 한 당신은 평등의 혁명가였습니다

나무불木佛이여, 이만 내려갑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납시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