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순례자의 길 / 道峰 김정남
내가 길이 되지 못했으니
어설픈 신화와 슬픈 전설을 찾아
한 번은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
순교를 위해
달이 눈물을 흘리는 어둡고 험한 길에서 죽을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을 건져주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은
마음이 그린 영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린 다음에야
내 순례의 마지막을 길 위에서 맞아야 했다
쓸데없는 무익함에 바친 정열에 찬사를 보내며
눈은 쏟아지고
모든 길이 모이며
새벽불이 하나둘 켜지는 광장 화형대 기둥과 땔감을 친구삼아 죽음을 대할 때
허기로 물든 민중은 잔인했으며
비로소 순례의 길을 고달프게 간 것을 후회하고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시간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 안에는 ‘나’가 없었다
멈추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대해 무한한 평온을 담아 경배를
나는 시간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안녕, 빛으로 찬란했던 가을이여
내 수수께끼 같은 삶은 아름다웠고
얼어붙은 경건으로 가득 찼도다
비로소 지친 내 넋을 치유했다
*무한우주론을 주장하여 교황청의 이단 결정에 의해 화형을 당한 이탈리아의 조르다노 부르노(1548~1600)를 생각하며 은유적으로 표현.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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