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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혜덕암 일기 / 道峰 김정남

혜덕암 일기 / 道峰 김정남

 

 

 

서울의 북쪽 맨 끝에서

천안에서도 한 시간 반을 더 들어가므로

다섯 시간 반을 졸면서 걸어와 도착한

호두마을위빠사나명상센터, 최근에 마하시 선원을 더 붙였다

오늘은 나의 꾸띠, 나만의 작은 공간

졸리면 자고

어둑새벽에 잠 깨어

잠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나와서

삼백 가지 수사법을 공부하다가

다시 졸리면 의자에서 잠시 졸고

배고프면 먹고

그렇다고 장자의 소요유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퇴계 이황과 기대승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 무엇을 위해 수 십 년을 편지를 주고 받았을까

'사단과 칠정은 구분되어 있다‘와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어 무엇을 위해 수 십 년을 논쟁했을까

대승불교 최후의 이론 유식론의 궁극의 정수 네 개의 전식득지와 맹자의 인의예지 사단은 같은 것 같은데 왜 유학은 불학을 불씨잡변이라고 폄하해서 배척했을까 주자도 처음에는 불학과 도학을 공부했으며 양명학의 왕수인도 불학과 도학을 공부했으니 이기심과 공명심을 버리지 못해 이것은 내 학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을까? 오래된 역사는 하늘이 두 번 깨졌다 붙었다 해도 믿을 수 없고 궁금해져도 알 길이 없어 졸음이 온다 꿈속에서 E. H.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강의 하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다

혜덕암에 오면 의사도 포기한 끊임없는 통증을 이기고 맨소래담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잠을 잘 자고 잘 먹고 새벽에 통증 때문에 깨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모른다

파리가 날아다닌다 1년생이니 때가 되면 해체되겠지 그들은 색은 있는데 수상행식도 있을까 단지 본능으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에 점을 찍고

심심하면 과자를 입에 물고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듣다가 졸고 굳이 졸음을 쫒을 마음도 없이 드립커피 한 모금에 마음 한 구석 가라앉는 편안한 일상

심심하면 올해가 가기 전에 발간을 다짐한 시집 초안을 다듬다가

묘한 시상이 떠오르면 초고를 쓰고

생각나면 거미줄을 걷는다 거미는 쫓기만 할 뿐

장사익의 ‘찔레꽃’을 듣다가 문득 자매간의 슬픈 전설을 생각한다

손숙 선생도 장례식 때 만가를 부탁했다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그런다고 물고기는 물이 편하고 나는 도인이 아니므로 도가 없는 세상에 사는 자신이 편하지 않다는 장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속 남들의 이야기 따위는

베토벤 교향곡 3번을 듣다가 처음 '황제'였다가 '영웅‘으로 바꾼 마음이 궁금하다가 의문을 접고

시를 정리하고

잠간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다가 유대인도 신을 향해 존재를 의심하고 왜 자신들을 선택했냐고 원망하는 것을 알고 감탄한다

배고프면 먹고 졸다가

곧고 빠르게 자라는 나무는 쓸모가 많아 수명이 짧다는 장자의 비유를 들고자 함이 아니고

내 시는 왜 형용사 수식어를 싫어하며 관념적 성향이 짙은가를 반성한다

시를 마무리 하고는 다시 낮잠을 즐긴다

일어나 가져온 임현담의 '나는 누구인가'를 읽는다

그는 왜 매년 의사의 일상을 덮고 히말라야를 갈까? 잠시 추리한다

다시 노트북을 열고 시를 다듬는다

입 안이 까칠하면 이를 닦고 개운한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지휴 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깨달음은 없다'를 들으며 나라고 할 것이 없는 오온의 무아인데 무엇이 깨달으며 무엇이 윤회하는가를 걱정하다가 꿈을 꾼다

무아를 알면 윤회를 멈춘다며

붓다가 나를 보며 웃는다 시인의 농담 같은 미소다

다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틀어놓고 짐을 정리한다

나의 만가는 이 곡으로 결정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죽을 때 이 곡을 들으며 죽으면 편안하겠다는 생각에 잠긴다

나올 때 파리는 현관에 죽어있었고

겨울의 하늘은 뿌옇고 나무들은 내년 봄 준비에 한창이다

무욕의 노인으로

그 하늘 밑을 통과하며

집주인 혜덕 보살의 회복을 잠시 빌어본다

짐을 싸고 50분을 걸어 내려가 30분을 기다려 반가운

버스를 타고 전철역으로 가서 세 시간을 졸다가

집 앞에 선다

하릴없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