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序詩 - 괜•찮•다 / 道峰 김정남
-여래여 불교는 종교입니까 철학입니까?
-선재여 불교는 처음에는 여래의 가르침이었다 후에 직업종교인이 종교를 표방했고 또는 300년 전에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서양인이 Buddhism이라고 붙였고 불교로 해석을 해서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와 철학의 중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여래의 가르침에는 황량한 허구가 없다 시적인 표현이 많은 것은 8언4구의 슬로카라는 형식으로 여래 입멸 후 결집에서 전승을 위해 외우기 쉽게 바꾼 것일 텐데, 그 각색의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가르침을 전달했을 뿐이다 설화는 원래 승가의 확대 발전을 위해 수백 년이 지나서 과장했으니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다만 엄청난 분량이 전승된 불경의 양에 비해 과장한 설화는 두 손으로 셀 만큼 극소수다 그러므로 제대로 판단하여 과장법을 사용한 설화를 추리기가 어렵지 않으니 괜찮다 과장한 설화도 깊은 은유를 섞은 환유와 상징적 수사라고 생각하면서 가르침을 여실如實하게 판단하면 괜찮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불교와 과학이 상충相衝하면 과학을 따르라 했다 과학은 검증 가능하지만 종교는 검증이 불가능하므로 세상이 변한 과학의 시대를 살면서 과학을 무시하면 무명한 짓이다고 조용히 말한다 불교가 종교냐 철학이냐에 이르면 많은 사람들이 중간쯤 된다고 한다 조금은 억울하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여래여 동아시아 선불교는 도가와 유가, 불가 사상을 버무렸으므로 정통 불교는 아니지 않겠나이까
-선재여 선불교를 불교의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어서 그대는 오류라고 생각해도 여래가 언제 그런 것을 차별하던가 그런 견해는 사량•차별식인 제7말나식에서 나오는 바르지 않은 견해다 다만 선불교의 간화선에서 10종병*을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두 여래의 가르침이니 개의치 마라 괜•찮∙다
-여래여 인기 포교사 혜민 스님이 여래의 무아론과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의 유아론을 구별할 수 있을 텐데 ‘참나’를 자성과 동일시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아 비난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나이까 자성은 자성성불의 준말이라는 것을 하마 모를까마는 연기와 관련하여 보면 자성은 무아와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모른다 쳐도, 그가 참나가 영원불멸한 힌두의 아뜨만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고 중생구제를 위한 교화에 애를 써도 바로 잡아주는 도반이 없나이다
-선재여 무아론을 인정하면 상견이 되고 유아론을 인정하면 단견이 된다 그런 논쟁은 논쟁을 계속 끌어가는 것이 되므로 입을 다무는 것, 즉 무기가 낫다 시간이 2천5백 년이 지났으니 각자 소신대로 알아서 행동해도 무방하다 브라만교도 불교도 모두 평화의 종교이며 사상인 까닭이다 무아론자는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를 주장한다 얼듯 봐도 업보는 있으나 업보를 지은 자는 없다는 의미라 황당해 하는 불자가 있다 해도 증명하기 어렵다 그것이 불가지론의 3대 명제이지 않느냐
여래는 실체적 논리에 따라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생각된 자기 동일적 자아인 아트만을 부정한다 인간의 업에 대해 그 업과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작자로서 상정된 자아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설정이고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업이나 보는 존재하며, 그 둘 간에 인과응보의 법칙은 성립하지만 그렇다고 업을 짓는 자, 보를 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며, 업과 보의 인과응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연기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자작과 타작의 상견과 단견을 비판한 후에도 그렇고, 유업보 무작자를 논의한 후에도 그렇고, 언제나 상견과 단견의 극단을 피하는 중도의 길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연기의 원리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고 하면, 상견에 떨어지는 것이고, 남이 짓고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에 떨어지는 것이다 바른 말은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즉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에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며, 무상 · 고 · 무아 삼법인을 모르는 것이며,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라고 한 의미를 특별히 유념해야 한다
선재여 다시 강조한다 여래는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물음에 대해 세 번이나 무기를 보이다가, 그 무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여래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사견私見을 더할 뿐이다 만일 여래가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부터의 의혹을 더할 뿐이다 내가 어찌 의혹을 더하게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이제 단멸하였다고 말하겠는가? 본래부터 자아가 있어 지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상견常見이다 이제 단멸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견短見이다”
여래는 둘 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둘 다가 본래 있는 자아의 존재를 일단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함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즉 일정 기간 자기 동일성을 항상恒常한 것에 대해서만 상常이나 무상無常, 즉 불멸이나 단멸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두 관점은 다 무상하지 않은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아론有我論에 속한다 일정 기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아론적 관점을 여래는 상견常見이라고 말한다 자기 동일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아란 찰나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이 불교 무아론無我論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래는 위의 물음에 한마디로 ‘자아는 없다’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가진 의혹이 더하기 때문이다 왜인가? 우리에게 무상하지 않은 항상恒常된 자아는 없지만, 무상하게 항상 변화하되 나로서 연속되는 그런 자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여래가 인정하는 자아, 즉 연기의 자아이며 업의 자아인 오온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앞의 인용에서처럼 자아에 대한 단견과 상견을 모두 비판한 후, 이어 중도의 견해로서 연기와 업을 설했다
불교가 말하는 일체 존재의 무상성 또는 우리 삶이나 자아의 무상성은 우리 젊음과 청춘이 너무 짧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아 단지 7~80년밖에 지속하지 않기에, 언젠가는 죽어야 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즉, 덧없다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지나면 색이 바라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존재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자체 안에 비존재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안에 이미 비존재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존재의 핵이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것을 공이라고 부른다 그 공성 때문에 어느 존재도 그 어느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견이나 단견으로 주장되는 자아, 즉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항상恒常한 자아와 여래가 설하고자 하는 중도의 자아, 즉 연기 법칙에 따라 업으로써 이어지는 자아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자기 동일적 자아가 없이 과연 연기나 업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일생에서의 자아의 자기 동일성 문제를 두 순간에서의 행위자의 동일성 여부로 집약시켜봄으로써 상견이나 단견 상의 자아와 업의 자아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더 공부하여 밝혀보라 힌트를 준다면 자아는 연속성은 있되 동일성은 없다 그래서 무아 또는 비아라 한다
-여래여 성철이 티베트불교와 남방상좌부불교를 무시하고 오직 간화선만을 통한 견성이 최고라 하면서 자신의 서재에 수천 권을 쌓아두면서 제자들에게 경전을 읽지 말라는 허황한 주장에도 아무도 직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재여 그는 조계종에 적을 둔 절에 들어와서 수계를 받아 열심히 공부한 수행자다 당연히 티베트불교와 남방상좌부불교를 알 겨를이 있었겠느냐 한 종파에 몰두한 것만이라도 충분히 수행자의 역할을 하고 존경을 받았다 그것으로 그는 수행자로서 훌륭하다
-여래여 과학적 합리성을 무시한 설화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성자 밀라래빠의 흑마술도 사실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허황한 방편의 전개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이제 그런 것들은 확실하게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선재여 종교를 확장시킬 때는 직업종교인이나 경제적 종교인은 어느 종교나 허황한 기적도 내세우는 방편을 사용한다 네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괜•찮•다
-여래여 성철이 조계종의 종조인 지눌의 돈오점수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돈오돈수가 맞으며 돈오한 후에는 점수가 필요하지 않다고 고집스럽게 버텨서 수많은 불교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혹여 돈오, 곧 깨달음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까닭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재여 깨달음의 돈점이 중요하겠느냐 돈오는 점수를 위한 마중물이며 점수는 돈오의 설거지다 그는 조계종의 종조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에도 반대의 의견을 주장한 수행자다 같은 대승불교이지만 티베트불교는 점오점수점오를 주장하지 않느냐 여래의 가르침도 세상이 변하는데 영구불변하겠느냐 그것은 원리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의 몫이니 괜찮다 다만 돈오는 쉽다 그러나 점수는 어렵다는 것이 지금의 여래 생각이다
여래는 깨달음에 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므로 궁극의 목적이 아니고 오직 과정이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즘 경지병境地病에 걸린 수행자들이 많은 것은 안타깝다 깨달음은 경지가 아닌 방향과 경계의 지평이다 시방삼세를 볼 수 있다면 온전한 깨달음이겠으나 그것이 시•공을 초월한 경계와 방향이지 현재의 4차원에서 갑자기 평행우주론의 11차원으로 승화시킬 개념은 아니라고 본다
-여래여 좌선의 뜻은 ‘밖으로 모든 경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고 주장한 육조 혜능의 풀이임을 모르고,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 좌선인줄 아는 수행자가 많습니다
-선재여 불교의 용어는 중의重義적인 것이 많으므로 초심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스승은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티베트불교는 스승을 수행자가 직접 고르는데 7~8년이 걸리지 않느냐 비슷한 이유로 쫑카파는 수제자에게 비전을 직접 전하는 밀교적 성향이 이어지고 있다 답답해진 전재성* 박사가 여래는 수행의 자세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여서 가르쳐도 참선 수행은 앉아서 해야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라고만 믿는 수행자가 거의 대부분이다 반면 원불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내세우고 있다 깨달음의 순간은 좌선의 순간에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선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에게는 그때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수행자가 대부분이라 해도 괜∙찮∙다
-여래여 자신을 깨친 사람이라고 쳐도 누가 인가를 해줬으며 인가의 신빙성은 지극히 주관성을 띤 것들이어서 믿지 못한다 해도 문파를 만들어서라도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나이다
-선재여 네 가지 해서는 안 될 행동 중에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자랑하는 사람을 예로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그런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후에 모두 알게 될 것이며 그럴 때 자신의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신경 쓰지 마라
-여래여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가 유투브를 통하여 강의한 ‘불교와 뇌과학’을 듣고 깨달음은 불경 공부를 통해 엄청난 정보를 입력하고 미치기 직전까지 목숨을 건 집중명상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는 과학적 주장에 신뢰를 가졌으므로 돈오는 순간이며 점수는 오래 걸린다거나 ‘깨달음은 쉽지만 실행은 어렵다’ 하는 주장을 받아들여도 되겠나이까
-선재여 여래가 깨어난 후 처음으로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곧 사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바른 방법으로 팔정도를 설하였다 연기도 깨달았지만 인연생기因緣生起법은 여래의 독자적인 창작이 아니다 그러나 설명하기 어려워 알아듣기 어려울까봐 때가 익기를 기다렸다 많은 수행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으나 아라한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박문호 박사의 주장은 맞다
-여래여 보조지눌 선사는 조계종의 종조宗祖로서 돈오점수를 주장하고 정혜쌍수 교선일치를 내세우고, 같은 조계종의 성철은 돈오돈수에 대한 온갖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죽을 때까지 몰고 가는 고집도 인정해야겠습니다
-선재여 옳다 선재善哉 선재善哉*
-여래여 성철 자신의 서고에는 불경을 제외한 수많은 서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책을 보지 말라는, 즉 불경 공부보다 참선을 많이 하고, 정작 자신은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발심했다는 성철에 대해 그가 이중적 태도를 취했거나 그가 반어법적 수사를 사용한 임종게를 보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며 여래와 아라한들은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선정을 닦았는데 자신은 돈오돈수, 곧 한 번 확철대오하면 더 이상의 수행은 불필요하다던 그의 사자후에 반발하던 젊은 날의 나의 경계 또한 무상하니 그 경계는 어디로 흐를지 나도 모르므로 계속 비난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선재여 의문은 얼마든지 가져도 되나 함부로 비난은 하지 마라
-여래여 성철 그는 처음에는 종정 취임 법문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900년 전 송나라 청원 유신 선사와 야보 도천 선사의 흉내를 냈고 종점에서는 효봉의 임종게를 복사했으니 하나는 복사이며 하나는 반어적 수사법을 사용했을까마는 세상에 대단한 선사가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는 현상이 발생해도 그는 나의 말이 아니라는 한 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고 즐겼는지는 몰라도 분개한 나는 자꾸 그의 이중성을 비난합니다
-선재여 성철에 대해 아는 만큼 관심이 많구나 내가 판단하건대 그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
-여래여 조선조 말 백파 선사가 조사선과 여래선의 서열을 논하면서 조사선을 여래선의 앞에 두는 희론적 망상戱論的 妄想에 화가 나서 과연 선불교가 감히 불교의 주류에 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다시 일어납니다
-선재여 그것이 선불교의 특징이거늘 신경 쓰지 마라 그들은 윤회도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화두와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의 깃발로 간화선을 통한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 그들에게는 파격破格의 묘유妙有라는 장점이 있다
-여래여 여래께서는 수행자들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14가지를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후세에 14무기無記라 합니다 14무기는 오늘날 불가지론과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재여 좋은 질문이다 불가지론에 대한 생각을 말하겠다 오늘 날 과학이 발달해 창조론을 희론적 망상戱論的 妄想으로 간주하고 진화론을 거의 정설로 인정하는데 138억 년 전 빅뱅의 순간(10-43 초 동안의 플랭크 시간) 창조주는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찰나였으므로 신은 당연 존재할 수가 없다는 스티븐 호킹의 익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창조주를 믿는 자들의 신념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을 증명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해도 합리적 이론을 구성하지 못하는 창조론자들의 속수무책을 비웃지는 마라 논리학에서 유무의 논쟁이 있을 때 증명의 책임은 존재 부정, 곧 무의 측에 있지 않고 존재 긍정의 측, 곧 유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창조론자들이 안타까워진 다윈주의 진화론자 토마스 헉슬리라는 생물학자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는 용어를 창출하였으며 불가지론자들이 3대 명제*를 제시하여 종교가 과학적 합리성을 가지고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을 과학은 신경 쓰지 말고 종교의 영역에 맡기자는 제안을 했으니 고마운 일이나 현대는 불교 철학자들처럼 악으로부터 도피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아기小兒期가 아니다 과학으로 무장한 성년기의 문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모든 주어진 자연 조건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언젠가는 거역할 수 없는 파도가 뱃전의 사람들을 심해로 쓸어가듯이 우주의 변화 과정이 인류 문명을 쓸어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악을 구축하면서 문명을 발전해 나가야 하는 인류인 것이다
불가지론의 3대 명제는
①우주의 시작과 끝 ②신과 영혼의 존재 ③선과 악의 구별 및 인과응보의 귀결
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현대적 관점에서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여래여 여래는 진화론을 알았기에 윤회를 방편으로 사용했으며 업보를 묻는 수행자에게 없는 것보다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는 반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행자는 지금도 끄덕임을 계속합니다
-선재여 창조론을 포기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아니면 진화론을 포기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138억 년 전에 일어난 빅뱅이 930억 광년으로 팽창한 우주에서 티끌보다 작은 시•공간인 지구를 비교해보면 한낱 인간인 여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여래여 생물은 35억 년 전에 단세포로 발생하여 존재하다가 진화를 거듭하여 20억 년 전에 동물과 식물이 갈라지고 동물의 줄기로 물에서 뭍으로 올라와 진화를 거듭하다가 공룡이 세상을 지배할 때 구석진 곳에서 겨우 연명을 하던 꼬리 달린 포유류였던 인류의 조상이 공룡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작은 포유류로 큰 짐승을 피해 긴긴 세월 살아남아 600만 년 전에는 유인원으로 살아가다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겨우 20만 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에 모두 고개를 끄덕여도 그 전의 윤회 때는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미개한 포유류였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궁색한 대법對法이지만 아뢰야식을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하는 유식학파에서는 아뢰야식도 진화해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윤회사상을 부정하는 과학적 종교론의 관점에서는 견강부회식牽强附會식 해석이라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선재여 꼬리 달린 포유류가 진화를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아 이성을 갖게 되자 존재의 이유인 이기적 탐욕이 생기고 인구가 늘어나고 부족한 양식을 구하기 위한 약탈전쟁은 필수적 현상이었다 해도, 그로 인한 전쟁의 고난은 수많은 성자를 태어나게 했고 그 시대를 일컬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 축의 시대’라 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통찰을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해도, 윤회를 주장하는 종교의 핵심 주장은 분명히 진화론에 위배된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인간의 고등의식이 무척 뒤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이 침팬지와 갈라선 것이 겨우 600만 년 전이며, 원시인류가 등장한 것은 겨우 100만 년 전쯤이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기나긴 진화를 거쳐 겨우 20만 년 전에 출생하였다 지구에서 생긴 생물의 역사 35억 년 가운데 자그마치 34억 9,900만 년을 하등의식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부분의 기간을 무지 속에서 살아왔고, 의식이 깨이기 시작한 지난 100만 년간은 온갖 망상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무지와 망상 속에서 발전한 것이 종교이다 종교에는 암중모색의 지혜와 모래 섞인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생존지혜가 들어있다 무수한 화석의 증거가 현존하고 지질학적, 천문학적, 생화학적, 물리적 증거 앞에서도 창조론자들의 행태를 자폐적 신앙 또는 신앙적 자폐증, 광적 신앙이라 해도, 그들의 신앙의 자기중심주의 동굴에 갇혀있어 답답함이 하늘을 덮어도, 야훼가 전쟁의 신이었다는 신화적 주장에도 끄떡 없이 다른 신화로 버티는 직업종교인들을 보면 분노 대신 안타까움이 바다를 메워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니 서둘지 말고 기다려라
-여래여 여래에 대한 직접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여래가 갓 태어난 갓난애로서 일곱 걸음을 떼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는 설과 석가국의 왕자가 아니고 석가 족 공화제 부족장의 장자였다는 것과 여래께서 사문유관四門遊觀*과 관련하여 자진하여 출가하지 않고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성인이 전륜성왕이 되거나 훌륭한 수행자가 될 거라는 예언에 따라 전륜성왕이 될 것을 두려워한 코살라 국의 재상에 의해 쫓겨났다는 설이 있나이다
-선재여 여래는 분명 말한다 갓 태어난 어린애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래를 포장하기 위한 과장치고는 유치한 발상이다 석가 부족연맹은 국가라 하기에는 너무 작았으며 도올 김용옥 교수가 본 카필라 성의 유적 규모는 겨우 50미터의 폭에 400미터의 작은 성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대국 코살라 왕국에 예속된 부족의 모임이었다 만약 국가 여부의 판단에 대하여는 지금 추정하고 있는 조그마한 카필라 성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단지 코살라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였을 뿐, 석가 족의 연맹이었으며 부친은 부족장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늘날 공화제(귀족정 과두정)의 형태를 지녔다 부족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제였다 여래는 단지 부족장의 장자로서 여래의 능력에 맞는 직위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수행했다 결혼의 경우를 들면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여래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무술경쟁(각술쟁혼角術爭婚)을 통하여 우승함으로서 콜리야 족의 야소다라와 결혼할 수 있었다 만약 여래가 왕국의 왕자였다면 쟁혼爭婚을 통하지 않고도 야소다라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무술경쟁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석가 족이 공화제를 시행했고 아버지 숫도다나는 임기제 부족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특별한 잘못이 없어 계속 연임을 했다 여래는 부족장의 장자로서 아버지를 도와 행정과 소송 및 각종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소송을 통하여 있는 자가 이기는 경우와 노예계급인 수드라의 불평등한 대우 등 불합리한 참상을 많이 봐왔으므로 지배계급이면서 거의 무의도식하면서 희생제의犧牲祭儀를 통하여 독점적으로 경제적 부를 쌓아가는 바라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다 그런 이유로 바라문들의 존경과 질투를 동시에 받았으나 결국 그들의 계략에 빠진 코살라 국의 재상이 살려주는 대신 코살라 국을 떠나 마가다 국에서 살 것을 조건으로 여래를 내쫓았다 여래의 운명이 그렇다면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따라 훌륭한 수행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결심했다 오랜 수행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으나 결국 ‘스스로 깨어난 자’가 되었다 여래에게 가장 적합한 칭호라고 생각한다
-여래여 당시 전쟁과 희생제의의 폭력과 살육에 대응하여, 여래와 초기 대중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윤리적 변혁을 추구했으며, 카스트와 여성차별의 불평등에 대면하여 어떻게 대응했으며, 경제적 불평등에 대하여, 끊임없는 정복전쟁과 강대국 군주들의 압제에 어떻게 대응하였으며, 이상국가의 꿈을 추구해 갔는가? 궁금합니다 여래는 이러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 가셨습니까
-선재여 브라흐만의 발바닥에서 나왔다는 수드라(노비 shudra) 계급은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고, 바라문과 크샤트리야 등 상위계급은 그들을 마음대로 처분하였으며, 주인이 버린 옷이나 신발 같은 필수품만 사용할 수 있었고, 주인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어야 했다 바라문 문헌에서는 노비들이 오직 노동하기 위해 육도윤회六道輪迴 중 아수라(阿修羅. asura)로부터 태어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극한적인 불평등의 사회와 종교체제로서 거주, 교육, 신앙권이 없었으며, 탄생의식에서조차 배제되어 내생에 더 좋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재생再生의 기회마저 영구히 박탈당했다 여성의 복종은 전면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여성. 노비. 개. 까마귀를 동격으로 취급하여 어리석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리잔, 곧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의 제도화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젠가는 표출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으니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이며 잔인한가 대중은 자신의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벌이는 왕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여래여 티베트불교의 혁명아 밀라래빠가 복수를 위해 터득한 흑마술이 과장의 손을 가진 설화가 아닐까요 과연 깨달음은 없다는 쪽에 손을 드는 지휴 선사나 자신이 조사의 대물림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가마를 타고 나타나는 진제 종정의 행태에 화가 나고 남南진제 북北송담의 조직적 형태를 인정하더라도 종교적 관점을 떠나 객관적 입장에서 창조론을 인정하는 두 선사의 행태를 보면서 정식 학교에서 과학수업을 받지 않아 그런 마을을 갖데 되었는지 참 궁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스승을 고르는 데 7~8년에서 10년이 걸리기도 하는 것이 부럽고 한국 선불교는 제자들이 자신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스승을 대선사로 만드는 풍토가 부끄럽습니다
명상을 하다가 문득 여래가 하늘을 날아다녔다는 신여의통과 달마는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과 달마가 실존인이어서 소림사에서 면벽9년을 보냈다 하는 것과 달마가 주석한 곳은 소림사가 아니라는 설과 도적을 만나 담림과 함께 잘려 한 팔이 없었던 2조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가 무지한 과장이라는 설과 창 너머 선비가 읽은 금강경의 핵심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구절을 알아들은 것은 육조 혜능을 위한 무대장치요 설화이며 일자무식이 아니었다는 설과 이미 불교의 주도권이 신수 대사에게 넘어가버린 상황에서도 혜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신회의 경우 만일 안사의 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을 끝내 이루어낸 신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지 죽은 혜능에게 6조가 붙고 이미 죽은 자신에게 7조가 붙여진 것을 허황한 짓이었을 텐데 욕심을 버리지 않았던 신회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재여 옛날에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지금 일어날 수 없다면 전설이며 설화다 신여의통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 새도 아니면서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겠는가 합리적 검증 기구를 통하지 않고 주장하는 현상은 과학적 합리성을 무시한 직업종교인 혹은 생계형 종교인의 이기적 습관이다 일부 선사들의 형태는 세상물정 모르고 어릴 적에 절에 들어와서 제자들이 시킨 대로 한 유아적 행태다 이해하라 소림사는 달마가 있던 곳이 아니다 북조의 효문제는 불타 선사를 존경하여 도읍을 옮길 때 불타佛陀 선사도 함께 낙양으로 향하였다 도읍을 옮긴 2년 후(태화太和 20년 : 496년)에 황실의 명령으로 소실산少室山에 오직 불타 선사만을 위한 선사禪寺를 수조修造하였는데, 이 사찰은 소실산少室山의 산림 중에 있기 때문에 ‘少林寺’라 불렀으며 그 소림사를 중심으로 선습禪習이 대대적으로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적胡適의 『보리달마고菩提達磨考』에서 “보리달마의 면벽面壁 고사는 바로 이후 사람들이 소림사 불타의 고사를 달마의 고사로 혼동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듯이 사실상 소림사는 보리달마의 수행처가 아니었다 이러한 고사의 혼동은 아마도 달마-혜가達磨-慧可계가 불타-승조佛陀-僧稠계를 사상적으로 계승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불타 선사의 법을 계승한 이가 바로 승조 선사로서 제2대 소림사의 2대 사주寺主를 맡았다고 하겠다 혜능의<금강경구결>을 보면 그가 일자무식이라는 말은 앞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 혜가의 입설단비立雪斷臂도 명백하게 담림과 함께 도적떼를 만나 팔을 짤린 것은 기록상 확실하므로 설화다 달마의 실존설에 대하여는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므로 판단하기 어려우나 신발에 관한 것은 분명 설화다 그런 이유로 설화 쪽에 무게를 실고 싶다만 그게 수행에 도움이 되느냐 ‘깨달음은 없다’는 지휴 선사의 입장은 깊이 생각해보라 과학적 합리성의 입장에서는 분명 맞는 영역이 있다
-여래여 종교와 철학과 과학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나이다 지금 한국불교는 도가 가장 높다는 진제 조계종 종정과 송담 스님이 강력하게 진화론과 우주팽창을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우주는 항상 지금과 같은 상태이고,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개는 개, 소는 소, 말은 말, 닭은 닭이었지 유인원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100%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과 신도들을 미혹하므로 어느 정도 강도로 강력하게 비판을 해야 사람들이 이들에게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과학에 위배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도, 거꾸로 그런 이유로 존경받는 ‘기이한’ 존재들입니다 이들의 말은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건강한 정신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대중은 이들의 사상의 밑바탕이 ‘우주와 생명에 대한 무지’라는 것을 모른 체 지금까지 아무도 이들의 반反과학적인 사상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학자들도 신비주의에 빠져 맹목적으로 추종한 면이 있으니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선재여 철학은 종교의 위대한 적수이며 동반자인 이유는 철학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워 마침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를 바라보고 지향하고 있는 점에서 같은 방향이다 그 사이에 과학이 끼어들면 종교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다행히 중립적이지만 무신론적 입장에 가까운 불가지론이 나타나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논리적으로 존재를 주장하는 쪽에 증명의 책임이 있지만 증명이 불가능하다면 종교에 맡겨두라는 과학적 철학의 입장에 서면서, 과학은 종교에게 철학을 통하여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 것을 힘주어 경고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만들어진 신’이 인간을 제어하려 하므로 보이지 않는 신이 제어하는 세상은 부조리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불멸할 것이며 이 불멸이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종교의 속성은 인류가 멸망해도 자신만은 남는다는 오류에 물들어 과학적 증명을 통해 그들의 오류를 아무리 강조해도 듣는 이가 없다 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종교를 믿지 않고 철학을 배우는 이유를 다시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할 사람이 있겠는가 신이 존재함으로서 이익을 얻는 자가 있다면 그가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의문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아도르노가 “악은 집합사회의 속성이며, ‘아우슈비츠대학살’ 이후에 낭만주의는 죽었으며 낭만주의의 자식인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 합니다만 어느 순간부터 시를 쓰는 짓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선재여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겠으니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항상 숙고하며 생각하라 어떤 길이 자신과 인류에게 좋은 길이겠는가를, 마음은 얼마나 자주 변화하는가 너의 변화를 당연히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치다 유념하지 마라
-여래여 왜 한국불교가 세계불교에서 개혁대상의 맨 앞자리에 서야합니까
-선재여 특히 한국불교의 지도자들이 여래의 무소유의 정신을 외면하고 재산의 증식에 몰두하는 사이비들이기 때문이다
-여래여 불자들은 지금이 말법시대라 하여 걱정이 많습니다 여래가 반열반에 든 후에 불교에서는 그 가르침이 3단계로 변화한다는 견해가 생겼습니다 이 견해는 사람들의 기근능력機根能力은 차차 저하하고 그 교설이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게 된다는 역사관으로 이 견해에 따르면 시대는 정법正法 · 상법像法 · 말법末法의 3시三時로 나눠졌습니다 말법 시대末法時代는 정법이 절멸絶滅한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윤회하는 불교도에게 강한 반성과 분기奮起를 촉구하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선재여 틀린 생각이다 일부의 승려가 여래 입멸 후에 정법 상법 말법의 순서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여래는 예언을 거부해왔다 도작과 선도가 말법상응의 가르침으로써 정토교淨土敎를 퍼뜨렸으며 서민사회에 침투했지만 1500년이 지난 지금 정토교가 얼마나 성행했느냐 그것도 여래의 법을 가르치므로 유념하지 마라 여래의 법이 끊어지면 무엇으로 세상을 지탱하려느냐 다만 여래의 법은 견해와 해석이 다양하여 많은 논쟁 끝에 주장이 다른 20부파 등으로 갈라섰지만 여타 종교와 달리 분리의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살육과 폭력, 박해가 있었느냐 고려 중기의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시대가 변한다 하여 법과 도를 흥하고 쇠한다고 보는 것은 대승의 이치를 모르는 이의 소견이라 하였다
또한 고려 말기의 야운野雲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말법시대에는 마魔가 강하고 법은 약하며 슬기롭게 중생을 옳게 이끄는 이는 적고 어리석고 남을 그르치는 이는 많다고 하며 스스로 도를 닦아 말세를 근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래여 과연 종교인이 존재하는 한 종교가 개혁된 적이 있나이까 많은 수의 종교는 개혁의 과정에서 수많은 살육이 발생했나이다 아울러 수많은 성자가 다녀갔어도 개혁을 진전시킨 성자가 있었나이까 노력은 했겠으나 명성이 주는 행복에 주저앉아버렸나이다 여래여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선재여 불교는 결코 종교가 아니다 나는 종교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다만 진리라고 말했을 뿐이며 나의 말을 믿지도 말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진리의 성취와 실현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라 했느니 나는 신을 섬긴 적이 없고 섬기라고 말한 적도 없으며 신을 단지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오십 보를 양보하더라도 철학과 종교의 중간쯤에 위치하여 괴로움의 제거를 위한 철학일 뿐이다 여래는 행복을 말한 적이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은 흔적조차 없다 신은 직업종교인 혹은 생계형 종교인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든 수동태의 도구일 따름이다
불교는 여래의 가르침이다 300여 년 전 서양의 학자가 붙인 이름 때문에 종교라고 오해를 받고 있기는 하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만 종교를, 그중에서도 불교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는, 종교 가운데 불교가 가장 과학적인 입장과 가깝고 또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평등하며, 과학에 기초한 인본주의가 인류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에 가장 기여하는 까닭이다 자유•평등•박애와 이를 실현한 물질문명의 발달은 과학기술발전이 가져온 것이다 과학기술발전이 가져온 풍요로움은 약육강식의 원시적인 착취와 침략을 몰아낸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속담처럼, 기아와 궁핍 속에서는 아귀다툼이 일어나서 위대한 문명건설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정한 부의 축적이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발달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 유전자가 인간 존재의 이유이기도 한 까닭이다 한편으로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모여 애국심으로 포장하고 그것은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보석의 원석이 된다고 일찍이 ‘국부론’에서 주장했느니라 불교에서는 유식학파에서 인간의 인식작용을 큰 분류인 심왕 8가지, 작은 분류인 심소 51가지로 분류하고, 후에 오위백법五位百法을 창안해서 마저 100가지를 채웠느니라 그 중 제7말나식이 너와 나를 사량思量하고 구별함으로써 차별의식이 생기고 당연히 이기적인 인식작용이 발생하느니라 이기심이 없어지면 청정한 아뢰야식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느니라
종교를 개혁하면 인류의 행복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극대화될 것이다 명상∙기도∙주문∙순례 등을 통해 뇌세포 뉴런과 연결접합부인 시냅스 간의 연결망, 곧 뇌회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얻는 행복은 개인에게 한정되지만, 과학을 통한 교리 개선이 선사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진정한 지혜’의 증진은 대중에게 막대한 파급효과를 갖는다 이것이 종교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만 년 전에 이성이 등장하기까지 35억 년 동안 사랑·미움·기쁨·슬픔·분노·즐거움·공포·안전 등의 감성과 본능이 주인 노릇을 해왔다 바로 종교가 그런 감성을 다스리는 역할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종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과학을 통한 종교개혁이 우주와 생명에 대한 시각과 틀을 바꿔, 우리 미래세대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무한한 고등행복을 선사할 걸로 믿는다
-여래여 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에 대한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이와 관련한 무아에 대하여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는 ‘나’는 있지 않은가? 고통 받고 시달리는 지금 여기의 ‘나’가 어찌 없단 말입니까?
-선재여 맞다 그것을 현상은 있는데, 본질적인 실체는 없다고 한다 공성에 입각한 ‘유업보 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다 현상이라고 하는 업보는 현상이 생겨나는 그 순간에 있는데, 그 현상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업보의 실체는 없다고 본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서 죽음 앞에서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로 시각을 전환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 ‘나’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우주적 연기의 조합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아無我라는 방편 보다는 비아非我라는 방편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내가 없다’는 관념보다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념이 현대인에게 더 설득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에 따라 현상을 다르게 본다 똥을 예로 들어보자 똥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그러나 몸 밖에 나오면 더럽다고 여긴다 똥은 더러운 것인가, 더럽지 않은 것인가?”
-여래여 깨달음의 돈점頓漸에 대하여 아직도 계속 논쟁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것이 여래의 근본사상에 맞다고 보십니까
-선재여 자신이 깨달은 자가 되었다는 인식 자체가 큰 죄업이 된다고 말했느니 미망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적합하다 여래는 스스로 깨어났다고 생각하며 항상 깨어있는 자라고 불러주기 바란다 다시 강조한다 인간의 뇌는 뉴런이라 불리는 1000억 개의 세포와 세포마다 분산하여 시냅스라 불리는 200조 개의 접합연결부가 작용하여 많은 신경전달물질이 오고 가면서 기억이라는 메커니즘(작용기제)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만큼 많은 작용이 찰나마다 이루어지는데 인간의 생각을 일률적으로 규정하겠느냐 그런 이유로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점오점수를 두고 옳고 그름을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각자의 방식대로 수행하면 되느니라 다만 문둥병환자 3조 승찬 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 따르면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곧 ‘도에 이르는 것 어렵지 않다 다만 구별하지 마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돈오는 점수를 위한 마중물 점수는 돈오의 설거지다 가장 적합한 풀이다 돈오는 쉽고 돈오를 유지하는 점수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티베트의 점수점오점수의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여래여 여래의 사상과 수행방식에 가장 가까운 남방상좌부는 아직도 소위 원리주의를 유지하고 있나이다 그러나 북방으로 흘러간 대승이라는 이름 중 북방불교는 선이라는 풍조를 앞세웠으니 가히 불교의 혁명을 이루지만 도가와 유가 사상이 합쳐서 버무린 사상이므로 여래의 가르침과 어긋난 점이 없지 않으므로 엄격한 근본주의적 사상의 의미에서 불교가 아니란 주장이 있나이다
-선재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한편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까닭을 되새겨 보라 또한 석가 족이 멸망한 이유를 기억해보라 석가 족의 멸망은 하찮은 자존과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한 것이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져 변방으로 물러난 이유를 생각해보라 거기에도 교만이 들어있느니 너무 합리성을 추구한 전통이 있어 대중의 기복신앙을 도외시하였으며 너무 사변적•철학적이어서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여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했지만 대중은 바로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 했다 거기에 큰 고통을 해소하면 바로 밑에 행복이 있지만 대중은 그것을 보기에는 삶이 팍팍하여 그런 여유가 없었으므로 거기에 틈이 있었다 이슬람의 침공으로 불교도의 학살을 큰 이유로 드는 사람이 있지만 약간의 까닭은 되지만 모두가 사실이 아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다만 포교의 방식이 약간 강제성을 띠었을 따름이다 “용서는 하나 잊지는 않는다”는 잠언이 나온 나란다 대학의 학살도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 요즘 미얀마의 이슬람 로잉야 족 학살사건도 같은 업보의 맥락이 아니겠느냐 유일신교의 특성이 포교의 적극성에 있음은 세계를 거의 정복한 몽골제국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히 이슬람은 개종을 요구했으며 개종을 거부한 수행자 중에 강성의 수행자는 변을 당했거나 일부는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갔다 거기서 토착사상인 뵌교와 화합하여 특유의 밀교불교를 꽃피웠다 불교는 무역상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번성하였으니 당연히 열린 종교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념을 기치로 내걸었으므로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반대했으며 바라문 사제들과 많은 논쟁을 벌여 수행자 또는 재가수행자로 받아들였다 이슬람의 침공으로 무역로가 끊겨 상인의 몰락은 불가피했으니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종속적인 탁발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선불교의 백장 선사가 주창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마라는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실천한 동아시아 불교와 달리 인도불교는 자생적 경제력이 없었다 경제적 지원이 어려워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개종을 해야 했지만 브라만교로 돌아가면 다시 수드라, 곧 노예계급으로 전락하게 되어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뿐이다 여래의 가르침을 고수하기 위한 일부의 수행자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로 나아갔으니 처음에는 티베트 밀교라 했다 밀교라고 해서 비밀의 결사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의 전승에 관련한 방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은 말법의 시대라 하지만 틀린 견해이며 인정하더라도 정법 상법 말법의 시대 또한 순환 연기하니 걱정하지 마라 다시 정법의 시대가 오리니 역사를 거슬러가도 불교국가인 채로 망해서 소멸한 나라는 없나니
-여래여 대승의 다른 줄기인 티베트불교는 스승을 불법승 3보의 맨 앞자리에 놓는 경우가 있나이다
-선재여 졸렬한 생각이다 그들의 일부가 그럴 뿐이며 그만큼 여래의 가르침에 사무쳐 정확한 가르침을 얻고자 올바른 길을 인도해줄 스승을 찾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니 그런 현상이 나왔느니 걱정하지마라 그 스승도 여래의 수행자이니라
-여래여 시간과 공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라 하여 답하지 아니한 14무기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이까
-선재여 시간은 빅뱅부터 시작했으므로 시간에 대하여 언급할 수 없다 공간에 대하여 빅뱅은 138억 년 전에 발생하여 우주는 팽창을 거듭하여 빛보다 빠른 가속도가 붙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한 쪽으로 465억 광년 양 방향으로 930억 광년까지 팽창하였다 나의 능력 범위를 넘어섰다 그러므로 역시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지구는 우리은하의 중심도 아니며 중심에서 230만 광년 떨어진 태양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여래여 바라밀이 늘어나도 부족한 혼돈의 시대에 통일신라 때는 십바라밀이 일반의 형식이었는데 고려를 거쳐 오히려 불교를 탄압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육바라밀로 축소되었나이다 이유를 늘어놓지만 마뜩치 않나이다
-선재여 육바라밀의 지혜바라밀과 십바라밀의 지智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유식30송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면 육바라밀의 지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에 해당하고, 십바라밀의 지혜는 분별지分別智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무분별지는 자아의식인 제7말나식의 작용이 자각됨으로서 주객의 분별이 사라지는 단계다 처음으로 진리를 비추기 때문에 유식 오위五位의 계위 중 견도(見道, 진리를 보는 단계)라고도 하고, 순수직관에 의해 보는 것이므로 직지直知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에 분별지는 인식의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는 초세간적인 지혜다 무분별지 단계에서는 진리를 보는 주체가 여전히 남아있다 분별지 단계에 이르러야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지고 각성만이 남게 된다 즉 색色에서 공空으로 이동한 것이 무분별지라면 공에서 다시 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분별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제 육바라밀에 더해서 4바라밀을 더 닦아야 하는 이유는 자명해 진다 무분별지, 즉 견도에서는 그야말로 그냥 진리를 보는 단계다 그런데 진리를 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진리를 본다는 것은 여전히 보는 나와 보여지는 진리는 하나가 아닌 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본 그 진리를 내면화•내재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재화는 온 몸, 온 마음으로 체득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득하고 내면화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십바라밀의 4바라밀이 바로 자기가 본 진리를 내면화하고 내재화하는 과정과 방법인 것이다 즉 인식의 주체인 자아와 인식의 대상인 타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를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타자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본 진리를 남들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방법과 과정이 바로 4바라밀인 것이다 한마디로 십바라밀은 육바라밀 수행에서 얻은 지혜를 실제 삶과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바로 보살이고, 그 보살의 종착점에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가 있는 것이다
-여래여 무아라는데 믿지 않고 가상의 아 및 임시의 아를 주장하며 무시하는 설일체유부와 선불교 작태를 그냥 놔두실 건가요?
-선재여 그건 14무기 외 제3의 무기로 놔둬야 할 것이다
-여래여 그러하시다면 무아니 윤회를 무시하여 자신들이 마치 여래의 적통이며 유가와 도가와 비빔밥에 불과한 선불교 외는 불교로 치지도 않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냥 두고 보시겠나이까
-선재여 역시 단견과 상견의 논쟁으로 더 시끄러워지며 결코 승복할 경계는 이미 지나버렸다
-여래여 그들은 윤회를 여래 이전부터 전래한 관습으로 이미 불교의 가르침로서의 자격을 두지 않나이다 불교의 핵심은 무아 윤회 아니옵니까
-선재여 아니다 연기와 사성제다 나머지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래여 성철은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삼천배를 하라고 합니다 바른 견해이겠나이까
-선재여 조주의 뗏목을 타고 오다보니 저기 다리가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매우 더 멀리 다리가 있다 뗏목을 만들어 건너와서 물에게 물어보니 깊은 물도 아니고 물살도 세지 않다고 한다 헤엄도 칠 줄 알고 겨울도 아닌데 그냥 벗고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올 것을 후회한다 뗏목을 지고 갈 것도 아닌데 조주도 버리고 뗏목도 버리고 길을 나선다 명상과 비슷하다 명상은 망상과 성찰의 경계선에 있다 둘은 하나이며 둘이고 같으면서 다르다 이기고 지고의 경계가 아닌 어느 방향으로 흐르느냐의 갈등구조 속에 서있다 거기서 나아가면 이기심으로 불타는 세상을 구할 통찰을 갖게 된다 선재여 삼천배보다 3권의 경전과 세 번의 바른 명상이 낫다 그러나 수행자들이란 여래가 설하는 진리를 듣고 자신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니 모두 붓다의 자질이 있으므로 곧 나의 제자들이며 수행자들이니라 성철의 삼천배도 방편이므로 괜찮다
-여래여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금강경입니다 특히 아상我相에 대하여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선재여 반야심경은 압축적이고 조직적이다 금강경은 산문적이며 예언적이다 여래는 금강경을 통해 ‘마음’을 확인시켜주고자 한다 이유는 대승경전의 중심이면서 선의 소의경전所衣經典, 곧 근본경전이기 때문이다 반면 반야심경은 불교를 오래 섭렵해본 사람의 최후의 법설로 그만이다 공을 중심으로 불법의 핵심이 간결하게 조직되어 있다 야부 도천의 격외의 시는 맛이 다른 수확이다 가장 강한 것이 금강이다 그러므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깊이 새겨 수행의 고장孤嶂을 겪고 남의 해석을 따르지 말고 너의 해석을 하라 혜능은 반야, 즉 지혜가 반야를 닮았다고 해서 금강반야라 부른다 반야는 마음의 내적 방해물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혜능은 예리하며 견고한 반야를 통하여 번뇌와 절망을 부수고자 했으나, 인간의 마음은 금강을 닮지 않아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린다 그러나 결국 어떤 절망과 번뇌에도 파괴되지 않으니 거기에 지혜의 금강을 발휘하여 번뇌와 절망을 쳐부수라
-여래여 뭇사람들은 순서를 정하기 좋아하고 구별하고 규정짓기를 즐기나이다 예를 들어 수행의 정도에 따라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를 나누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두고서는 성문•연각•보살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과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여래의 교법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데 비유하면서 대승과 소승을 구별하나이다
(1) 성문승. 4제(諦)의 법문이니, 여래가 말씀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성찰(관觀)하여 해탈을 얻음.
(2) 연각승.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따위의 이치를 성찰(관觀)하여 깨닫는 것. 벽지불이라 한다
(3) 보살승. 6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이 법문에 의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여래를 이르며. 영웅들의 수레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런 것들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
-선재여 세상은 평온한데 여래의 마음은 공연히 바쁘다 언제 한번 마음을 쉬어보나 이렇듯 같은 여래의 가르침인데 구별함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기적 유전자인 제7말나식을 다루지 못해 그렇다 그게 어렵다 이런 행태를 보면 한 찰나에 팔만사천 번의 상념이 오간다 이 뿌연 먼지들을 가라앉히는 작업은 다만 자성自性을 믿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라고만 권한다 이를 테면 혜능의 돈교는 그 믿음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즉 자기 내부의 불성의 자각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정화해나간다는 것이다 반야지般若智를 이루어 망념을 버려 증애憎愛를 일으키지 않고 육진에 물들지 않게 하여 생사의 고해에 빠지지 않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여 사악한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색증시공色卽是空이라, 우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 내부의 사랑과 미움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적 관심이 어지럽게 분출하는 것을 조정하고 편견의 고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꿈꾸는 세상은 성큼 다가올 것이다 여래는 바라문의 크게는 네 계급, 곧 카스트제도 더 세분하면 200여 가지의 계급을 구분하는 것이 싫어 자비희사慈悲喜捨 평등의 사무량심*을 항상 가지라고 가르쳤다
-여래여 혜능의 돈교는 새 불교의 목소리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선재여 그렇다 선禪의 정체는 자성불이면서, 핵심은 ‘자신에 대한 전폭적 신뢰’라고 답할 것이다. 자성불이라, 나 자신이 붓다이므로 따로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야부가 그러하였듯 선재여 그래봤자 모두가 공의 궁전 안이거늘 차별하지 마라, 두두불리공왕전頭頭不離空王殿이니라
-여래여 선의 속도로는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나이다
-선재여 그렇다 이제는 선방 안의 선이라는 방편도 화두로도 세상의 변화를 좇지 못한다 저잣거리로 나와 함께 참선하며 동고동락하여야 한다 그것이 중생구제의 지름길이다
-여래여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선재여 좋은 질문이다 대중들은 연기라 생각할 것이며 그에 대한 가르침을 바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어떤 불멸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성을 고려한다 그것은 12연기설처럼 상호의존적이다 여래는 연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연기를 알아 깨어난 것이다 여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기를 바랐고 45년을 그것을 위해 길 위의 삶을 멈추지 않았다 핵심은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고집멸도를 설명했고 행동양식을 거기에 맞추도록 가르쳤다 고통의 종류와 고통의 원인, 고통을 극복한 결과 그리고 고통을 벗어나는 길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쳤다 나머지는 방편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善哉 善哉 : 옳다 또는 좋다의 감탄사
*사문유관四門遊觀 : 동서남북 네 개의 성 밖에서 생노병사의 비참한 현상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는 설화
*10종병 : '조주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不得作有無會)
② 진무(眞無)의 무(無)로 생각지도 말고 (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 (不得作道理會)
④ 의근하(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 (不得向揚眉瞬目處 根)
⑥ 어로상(語路上)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 (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 (不得揚在無事甲)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 (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 (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 (不得將迷待悟)
*사무량심四無量心. :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 자비, 함께 슬퍼함, 함께 기뻐함, 평정과 평등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