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신념의 유형을 기복(祈福), 구도(求道), 개벽(開闢)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다. 복을 받고 화는 피하는 것을 종교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신행을 전개하는 것이 기복형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의 의지에 따라 화복이 나뉜다는 관념이 바탕이 된다. 한편, 세상과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와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것이 구도형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개인 단위로써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비하거나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개벽형이다. 세상 전체가 바뀌어 일거에 종교적 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어느 종교에나 이 3가지 요소는 다 있다. 교리의 차원에서는 뚜렷이 어느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별로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든 그 3가지 주제를 모두 다소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3가지를 다 다룬다 해도, 종교에 따라서 3가지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위한 노력이 구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고, 사회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이 개벽에의 기대와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이 결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내리는 은총으로 수렴된다. 개념은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지만,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에서는 기복형에 해당한다.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맡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불교는 흔히 구도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역시 구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념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구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극복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 방법은 곧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극기가 중심 주제인 만큼 구도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도 고행 극기가 대종을 이룬다. 출가 수행생활 자체가 고행의 총화이다. 엄청나게 많고 엄격한 계율의 항목들, 특히 비폭력, 청빈, 금욕의 계율들이 모두 구체적인 고행의 처방들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극복하는 데에 유일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이므로, 간파되는 모든 안일과 집착에 대항하여 온갖 고행의 항목이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기복이나 개벽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구도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교리에서나 실제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복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상으로 원래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복을 비는 것이라는 뜻에 한정하지 않고, 논의를 좀더 넓은 마당에 가져가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개 중생의 세간적인 삶은 온갖 제약된 실존의 조건에 얽혀 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해당되지 않는, 무한히 넓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차원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조화(造化)의 힘을 감지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특성이다. 그것은 꼭 인격적인 신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나 조화주 같은 것은 꿈에도 믿지 않으면서도, 밤하늘 가득히, 또 깊숙히 인지를 압도하는 숫자로 박혀 있는 별들을 곰곰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히 무한이니 영원이니 오묘함이니 불가사의니 하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꼭 신적인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감득할 수 있는 세상의 성스러운 차원은 이른바 자력 신앙에 철저히 충실한 종교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자력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불교인이 신격화된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힘이 자기의 세간적 이익을 위해 작용하기를 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신행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는 종교적 인간의 특징인 성스러움의 감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아주 간단하게 비불교적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들이 흔히 쓰는 불보살의 가피라는 말은 꼭 신격화된 불보살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계라고 하는 탁 트인 무한의 마당에서 감지하는 성스러움, 신비한 힘을 표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불교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기 자신의 혁명적 변혁을 중심 주제로 한다고 해도, 세상전체를 단위로 한 변혁은 대망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하면 그릇된 것이다. 특히 미래불인 미륵에 대한 대망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강력한 종교적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지상에 불국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은 불교인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활동을 위한 원동력을 무한히 제공할 수 있는 샘으로 역할할 수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긴 세월 동안 불교의 사회적 역량이 단절된 곳이 특히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지역 대부분의 사정이다. 불교 스스로 선도하거나 깊숙히 참여치 못한 근대화의 과정 뒤에 갑자기 닥친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불교가 과연 어떻게 그 엄난 사회적 역할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지는 예의 주시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