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을 것인가는 부처님 돌아가시기 훨씬 전부터 많은 제자들의 관심사였나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의문이 바로 어리석음이라 질타하셨습니다. 그러자 데바닷따는 추종하는 무리들과 교단을 떠나버렸습니다. 참다운 법제자란 법을 대상화하여 소유하지 않습니다. 법을 단지 체현할 뿐입니다. 나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다면 아직 법을 온전히 체달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수행은 몸과 행위와 마음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고 그 모습은 사무량심으로 가득 차야겠지요. 니르바나는 지극히 자비롭고 평화롭고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지금 바로 여기 나툼인데 자꾸 소유화하는 우리네 질긴 습관이 수행마저 대상화하여 우열 시비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비밀한 수행이고 내가 하는 수행만이 가장 훌륭하다면서. <쌍윳따니까야>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발행 제4권 28~30쪽에서...
붓다는 자아를 규정하면서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존재다발인 오온을 설정한다.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은 존재의 물질적(신체적) 요소[色]와 정신적 요소[受,想,行,識]들의 총화를 일컫는다. 이 신체적, 정신적 과정들로서 오온을 자신으로 여기는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범부는 물질色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어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지낸다. 그런데 그 물질은 변하고 달라진다. 변하므로 그에게 우울과 슬픔, 고통, 절망이 생겨난다... (중략)... 의식識이 나이고... 의식이 나의 것이라고 속박되어... 절망이 생겨난다. <쌍윳따니까야> 제4권 28~30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色뿐만 아니라 정신적 과정인 느낌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을 각각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자아의 실체 없음은 다섯 가지 존재다발五蘊의 분석과 관찰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인간 존재는 오온 즉 다섯 가지 존재다발로 이루어져 조건에 의해 생성되었다가 조건에 의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일 뿐, 불변의 실체인 자아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개별적 실체를 부인하는 연기緣起의 이치는 몰리야 팍구나와 붓다의 문답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세존이시여, 누가 집착합니까?”
“그와 같은 질문은 옳지 않다. 나는 ‘누가 집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누가 집착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집착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엇을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해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라고 답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제2권 84~88쪽에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가 집착합니까”라는 주체에 대한 질문은 실체론적인 질문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연기적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신다.
불교의 무아는 자아가 ‘있다-없다’는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다. 붓다는 항상 이분법적 대극 논리를 지양하고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를 설한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중략...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중략... 또는 현재도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면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나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나의 자아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견해의 왜곡, 견해의 결박이라고 부른다. 수행승들이여, 견해의 결박에 묶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맛지마니까야>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발행 제1권 116~118에서...
무아의 진정한 뜻은 유론有論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 도 아니고, 무론無論 -자아가 없다는 견해- 도 아니다. 이것은 무아가 존재存在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意識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아’를 논의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없다면 누가 윤회하는가? 누가 생각하고 누가 행동하는가?’, 이렇게 회의에 빠지지만, 이것은 무아를 ‘존재-비존재’의 문제로 착각한 데서 연유한다. ‘내가 있다-내가 없다’라는 ‘존재-비존재’의 분별은 오온이 조작해낸 자아의식일 뿐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롭고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으므로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중략... 의식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으므로... 나의 자아가 아니다. <쌍윳따니까야> 제4권 73~74쪽에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안이나 밖에 상주하는 불멸의 본질로서 진정한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는 사상은 거짓된 신념이고, 단지 정신적 투영일 뿐이다. 무아의 전제 조건은 자아를 구성하는 정신적 신체적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름 등불이 타오를 때에 기름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심지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불꽃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불빛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기름 등불이 타오를 때에 기름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심지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불꽃도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인데,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제5권 41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