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종교화시대, 불교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난 연말 통계청이 발표한 종교인구 통계는 불교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불교신도수가 자그만치 3백여 만 명이나 감소하면서 1위 종교자리를 개신교에 내주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탈종교화 현상을 그 이유로 꼽고 있습니다. 전체 종교인구가 10년전 통계청 조사결과보다 3백여 만 명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10년간 인구증가분 3백 만 명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많은 종교인구가 줄어든 셈이어서, 이제 한국사회도 본격적으로 탈종교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보통 서구사회에서의 탈종교화 현상은 기독교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들고,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전형적인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이 신자수의 10% 정도라고 하는데, 대개의 유럽 선진국이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이번 통계에서 한국의 20, 30대 가운데 종교를 갖고 있는 이가 30% 대에 불과하였듯이 특히 젊은 층들이 종교에 냉담한 것도 탈종교화 현상입니다. 또한 미국내 유대인 6천만명 가운데 3천만명 정도가 스스로를 ‘유대인 불자(Jubu)’라고 칭하듯이 한 종교의 틀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것도 비슷합니다. 더 이상 기성종교의 틀이나 규율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탈종교화는 ‘제도종교의 약화’와 ‘세속화’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 제도종교는 대개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등)를 말하는데, 근대들어 기독교의 사회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물리학과 생물학 등 과학의 발달로 신 중심의 세계관이 뿌리채 흔들렸고, 개인의 삶에서부터 사회 전반에 미치는 종교의 사상적 영향력이 크게 약해졌습니다. 제도종교의 약화는 세속화로 이어졌습니다. 세속화는 안팎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으로는 종교단체 내부의 운영원리와 풍토가 세상 일반의 그것과 비슷해졌다는 의미이고, 밖에서는 사람들이 종교를 특별한 대우나 취급을 하지 않고, 세상 일반과 같은 잣대로 보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도종교가 약화되고 세속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서구사회는 2천년, 혹은 그 이상을 지배해 온 ‘(절대자이자 창조주로 여겨온)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탈종교화는 이러한 보편적 현상을 일컫습니다.
서구처럼 탈종교화가 조직 종교인 개신교나 가톨릭에 먼저 닥쳐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의외로 탈근대의 종교로 취급받아 온 불교 신자수가 큰 폭으로 줄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서구와 다른 근대화의 길을 걸은 것과 연관이 깊습니다. 서양의 근대화는 탈종교화와 동일한 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종교의 지배를 받던 세속사회가 종교로부터 자유를 찾고, 신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곧 근대화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오히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되어 기독교를 믿어야 근대화가 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근대화는 곧 기독교를 신앙하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되었습니다. 해방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신교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종교-세속을 아우르는 방대한 종교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공동체 안에는 신앙적 정체성과 세속적 이익집단의 성향이 중첩되어 있어 쉽사리 깨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근대화가 갖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 신자수가 줄지 않은 것은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탈근대 움직임이 본격화될 때 개신교도 비로소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경이 어떻든 이번 통계청 종교인구 조사 결과 불교는 탈종교화 현상의 직격탄을 먼저 맞았습니다. 앞으도 오히려 불교인구가 먼저 감소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 불교의 역동성이 약화된 동남아 여러 불교국가에서 탈종교화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탈종교화 시대를 맞아 불교는 대체 어떤 희망을 만들어가야 할까요? 앞서 탈종교화는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현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단순히 말하면 이와 반대로 불교가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존재이유’를 인정받는 것이 탈종교화에 대처하는 해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 포교를 잘해야 한다거나,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양적 접근 보다 오히려 세상 일에 불교가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적인 문제가 중요한 시절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반反이민 행정명령’을 내린 일로 온 세계가 시끄러웠습니다. 트럼프가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정체성을 부정했다며, 많은 진보성향의 미국인들이 그를 악마화 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설문조사에서는 트럼프의 조치를 지지하는 여론이 반대보다 높았습니다. 마치 그가 대통령이 될 때 ‘샤이 트럼프’가 많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실은 트럼프의 조치를 지지하는 미국인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를 악마화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우리는 트럼프의 잘못을 비판해야 하지만, 그 악행을 유지시키는 정신적 토대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전환해야 합니다. 트럼프로만 좁혀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마치 수면위로 삐집고 나온 빙산의 일각과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좋게 없애도 그것은 끝없이 밀려 올라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류가 이러한 문제해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선과 악, 나와 너, 인간과 신을 나누는 이분법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관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이와 비슷한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탈종교화 현상과도 밀접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고쳐가는 한편으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이므로 나부터 살고봐야 한다는 우리 안의 이기주의와 두려움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사회 문제의 본질을 균형적으로 직시한다면 해법은 저절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세상이 종교에 바래온 것이기도 합니다. 다행스럽게 불교는 탈종교·탈근대의 대안으로 주목받을 만한 매우 훌륭한 가르침과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고통의 본질을 직시하고, 대안적 문제해결의 길이 열리도록 돕는 정신적 토대 역할을 한다면 불교의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내부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불교적 가치와 이상, 방법론을 구현하는 일입니다. 불교 내부가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게 운영된다면, 사람들은 저절로 불교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교계가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하더라도 심지어 약자를 돕기 위해 지극히 정의로운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불자들이 거칠게 남을 비판하고, 죽일 듯이 상대를 증오한다면 불교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아, 불교를 신앙하면 저렇게 되는 구나”하고 피하며 멀리하겠지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불신 받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하고 현명합니다.
지금의 변화속도를 보았을 때 앞으로 20년~30년 후면 아마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속절없이 세상에 물드는 종교는 허울만 남게 되거나,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존재이유를 스스로 찾아내고, 그 존재이유대로 스스로 살아내는 종교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신도 수나 출가자 수 감소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불교가 어떤 운명을 선택할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출처] 탈종교화시대, 불교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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