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업보의 관계
의지에 따라 반응한 것이 업과 보
무아설과 대비설명엔 다소 무리
무아설에 따라 불교는 무신론으로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신을 정의할 때 전지성, 전능성, 창조성 등과 함께 제일원인으로 정의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겼으며, 그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신이 궁극적 근원자이며, 일체의 제일원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은 제일원인에 해당하는 궁극적 실체를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무신론이라 말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아설과 업보설은 양립이 가능한가? 피차 아무런 문제도 없이 전개가 가능한가? 우선 업보설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업보란 자신이 지은 행위의 결과를 자신이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업이란 용어는 카르마란 범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며, 카르마란 바로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로 야기된 일체의 결과를 보(報)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업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몸, 입, 마음으로 만드는 일체의 행위다. 이 세 가지 중 기본이 마음이다. 마음이란 다른 말로 우리들의 의지를 의미하며, 이 의지가 결정적으로 표출되어 입이나 몸으로 구체화되면 그것을 겉으로 드러난 행위란 의미의 표업(表業)이라 부른다. 그러나 마음은 먹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위로 옮기지 않고 잠복 상태에 두거나 소멸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겉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기에 무표업(無表業)이라 부른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우리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란 점이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로 인해 일어나게 되는 모든 사건은 자신이 인정하든 아니든 자신의 의지가 투영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보(報)란 무엇인가? 이것은 과보란 말을 줄인 말이다. 행위의 결과 필연적으로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결과를 바로 과보라고 말한다. 예컨대 술에 취해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 역시 과보가 된다. 결국 몸, 입, 마음(의지)의 행위에 의해 야기되는 일체의 사건을 과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작용과 반응으로 해석한다. 즉 업이란 의지적 작용을 표현한 말이며, 보란 이에 상응한 필연적인 반응으로 본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지)의 여섯 가지 근본적인 기관으로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존재의 여섯 가지 대상을 의식하게 된다. 여기서 의식한다는 것은 작용과 그에 따른 필연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용과 반응 사이에는 필연성이 있으므로 작용을 원인(因)으로 반응를 결과(果)로 말할 수 있다. 인과란 필연성을 지닌 두 사건 사이에 붙여지는 말이듯이 업보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 따라서 업보를 업인과보(業因果報)의 법칙이라 말한다. 바로 인과법칙인 것이다.
상의 업보설 즉 인과법칙은 사회생활에도 적용되는데 이 경우 사회윤리적으로는 선인선과의 논리가 설득력을 얻게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누구는 부자 집에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사는데 반해 누구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며 산다. 누구는 24시간이 부족하다고 열심히 일하지만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하는데 비해 누구는 술 마시고 방탕하며 일생을 보내는데도 생활에 궁핍함이 없다. 기타 여러 가지의 사례들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인과법칙에 대해 그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논리적 결함이 있다고 비판한다.
매우 비참한 사건이나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경우 그것을 인과업보설과 윤회설을 결부해 설명하기엔 문제가 있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생에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했는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불행이나 비참한 사건에 대해 체념하게 하고, 그것에 순응하게 할 수도 있지만 자칫 인간을 숙명적인 결정론에 빠지게 만들어 역경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나약하게 만들 수 있다. 본래의 업보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임에 반해 업보윤회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배제돼 있다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업보설은 무아설과 대비하여 설명할 때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작용과 그에 따른 필연적인 반응 사이에서 일체 모든 존재가 성립한다는 것은 자연법칙의 세계에선 논리적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불확정한 인간의 삶 속에서, 더구나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과 그 결과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한 인간이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본질을 지니지 않는 인간이 그 결과를 받는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의 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도덕부정론자들이 부처님을 비판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