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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사진이 있는 마당 / 道峰 김정남 사진이 있는 마당 / 道峰 김정남 봄날은 오고 감이 잔인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3월의 마지막 날 한때 ‘사진이 있는 마당’ 집 주모는 한 사랑은 잃고 한 사랑은 버리고 바람으로 불을 식힌다고 먼 바다를 건너갔다 다시는 술을 팔지 않았다 애증과 시비는 묘하게 닮고 주모와 나도 닮아 마음속 불을 버리지 못한다 마음속 불이 펄펄 끓던 젊디젊었던 때 나는 사랑을 버리고 왔고 사랑은 나와는 인연이 없어져버렸다 경기도 광주 땅 하숙집 아래 청자 백자 빗는 가마 앞에 앉아보니 마음속 불과 가마 속 불은 닮아있었다 가마 속 불은 마당 안에 쌓인 수백 다발의 나무로 일주일을 버텨가며 1300도까지 올라 청자 비색이라도 내었지만 마흔 살 도공은 도망간 사랑을 버리듯 내 청춘까지 모두 깨버리곤 했다 그는 한을 버리지 않고 .. 더보기
도봉산 7 / 道峰 김정남 도봉산 7 / 道峰 김정남 노래 하나 짊어지고 도봉에 오른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배낭에 담고 음악은 바흐의 ‘환상의 폴로네이즈’ 반주 그 음정을 외우면 산에 오르는 기쁨을 배로 늘리고 힘듦을 반으로 줄인다 바흐의 음악은 오르는 발걸음을 가볍게 내려오는 발걸음을 힘 있게 만든다 점심은 ‘내 바위’에서 막걸리 한 병 김밥 한 줄이면 충분하다 내려올 때 베토벤의 ‘운명’이 되어 나만 아는 길로 내려온다 내가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인 까닭이다 *제3시집 에 수록 더보기
불의 유희遊戱 / 道峰 김정남 불의 유희遊戱 / 道峰 김정남 모든 것이 이기심으로 불타고 있다 노란 해가 바다안개 걷힌 바다 속으로 사라지자 불도 꺼졌다 바다가 조용해지자 동산 너머에서 어두운 달이 고개를 든다 어둠이다 어둠 못다 부른 노래가 들리며 나는 어둠이 된다 다섯 시간이 지나자 블러드문, 토끼가 죽어 흘린 핏빛 달은 맑아졌다가 개기월식이 시작되고 달은 다시 어두워졌다 잠시 후 달이 다시 밝아졌다 한숨 놓였다 해의 유희에 미친 사람들은 피를 좋아하고 피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빨간 것은 사과’인데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서쪽의 어느 민족은 신의 저주라 했다지 그때 희생제물은 순한 양뿐이었을까 흙과 물, 불과 바람일 뿐인 지구를 돈다던 태양은 매일 사람을 불쏘시게 삼아 하나씩 잡아먹어야 했고 동굴에 갇혀 희미.. 더보기
들꽃 언덕에서 / 道峰 김정남 들꽃 언덕에서 / 道峰 김정남 들꽃 피는 언덕에 서서 들꽃을 보며 알 수 없지만, 흔들리는 바람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과 삶은 달라진다는 노인의 말에 신은 하나다 모든 것이 신이다 신은 모두이며 하나다 신은 없다 신은 만들어졌다 네가 신이다 신은 존재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관념이다 신은 은유적 상징물이다 신은 종교의 영역에 맡겨두고 먼 훗날 과학을 통한 합리적인 판단을 하자는 불가지론 등 수많은 의견으로 갈리는 세상에 앉아서 자율적 불가지론자인 아인슈타인처럼 산을 보며 그냥 들꽃은 들꽃이다 혹은 들꽃이 바로 신을 닮은 자연이다 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고 살까 *제3시집 에 수록 더보기
회색인의 전설 / 道峰 김정남 회색인의 전설 / 道峰 김정남 가을 늦자리 산신령 옆 자리에 앉고 싶어 오른 설악 밤이 되면 전설이 되는 이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뒤꿈치가 닳은 등산화는 아름다워도 그 눈물겨움에 무거워진 달빛 받으며 내려가는 산길 누울 자리가 없어 동굴을 찾아 헤매다 아무도 가지 않은 검은 산길로만 가던 폭우 내리치는 밤이 흐르고 비와 구름 사이로 비치는 카시오페이아의 전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닮았다 이분법이란 허망해서, 회색은 비겁해서 양쪽에서 받는 혐오 산벚꽃 벗겨져 내리고 순간 숨이 멎고 영원과 찰나, 시작과 끝이 상극이 아닌 하나가 되는 환상에 내 눈의 인식작용을 부인함으로써 산에 굴복하여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북극성의 주인이어야 했다 북두칠성은 국자가 되어있고 반대편 카시오페이아는 여전히 의자에 .. 더보기
봉선사 - 산사山寺의 새벽 / 도봉 김정남 봉선사 - 산사山寺의 새벽 / 도봉 김정남 봉선사 사천왕상과 금강역사 앞에서 지장전地藏殿*을 곁눈질하며 붓다가 앉은 연꽃자리 어둑새벽까지 맴돌다가 주저앉고서 맥 풀려 목 놓고 맵찬 바람 이기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금강역사는 두려웠고 사천왕은 오히려 친근해졌다 다리 풀리고 나 그리고 우리는 거친 바다에 떠도는 섬이라서 하늘과 바람이 어둡고 땅이 반가울까만 내딛기 저어하게 되면 사하촌寺下村으로 내려갈 때 길섶 사이로 난 좁은 물길 옹알이 소리에 마침내 떠오른 해는 가슴을 친다 가슴 속 돌이 된 응어리를 맷돌 갈면 몸 돌려 일주문 앞에서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인다 *지장전地藏殿 :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해탈열반하지 않고 지옥에서 .. 더보기
복권에 대한 신화적 고찰 / 도봉 김정남 복권에 대한 신화적 고찰 / 도봉 김정남 1 98년을 신화처럼 살아온 늙은 철학자는 ‘60세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황금기’라는데 하릴없이 등나무 밑에 앉아 단식사斷食死를 검색하다가 머리 위에 툭 떨어지는 열매는 덜 익은 지혜 같은 것 상념은 갑자기 깨어지고 그것은 무엇이고 왜 내 머리 위로 떨어졌을까 궁금증에 잠시 목을 매다가 목련의 요절夭折한 열매임을 알아내고는 고목나무에 꽃 피우듯 갈 때는 낙엽인 양 툭 떨어지는 것이 목숨이라네 차마 치우지 못한 술병들 의자 밑에 넘쳐난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와 찢어서 버린 하찮은 복권으로 만드는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한데 햇살 예리해 아픈 오후 하늘마저 무심한 듯 지독하게 파랗다 2 순례자의 심경으로 묵은 빚 갚으러 남으로 간다 실패를 거듭한 후 정상에 섰다 .. 더보기
바보들의 바다 -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읽고 / 도봉 김정남 바보들의 바다 -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읽고 / 도봉 김정남 날개 없는 것을 한탄할 것 없다 때로는 북쪽 깊은 바다 물고기 곤鯤이 삼십 리 날개를 가진 붕鵬이 되거나 달이 반쪽으로 깨지거나 은하수가 하필 지리산 한신계곡 옆에 자리 잡고 은하계곡이 되거나 별이 사탕으로 둔갑하거나 태양이 얼어버리거나 구름이 과자가 되어 배고픈 자가 먹으면 번개가 배신의 엉덩이를 때리거나 바람이 땀 흘리는 농부에게나 불어 비 뿌리는 세상이 되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 유전자임을 주장하는 리차드 도킨스가 틀렸거나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가 맞고 성악설을 주장하는 순자가 틀렸다는 바보가 판치는 시공간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나도 바보가 되어볼까 공상한다 왜 지구는 부서지지 않고 더 버릴 것이 없어진 늙은 생일에 날개 달린 요트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