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뒤바꿔 놓은 최후의 종교 전쟁 30년 전쟁
유럽을 뒤바꿔 놓은 최후의 종교 전쟁
30년 전쟁
발생 | 16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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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 1648년 |
종교 개혁이 가져온 갈등의 불씨
십자군 전쟁이 실패한 뒤 아비뇽 유수각주1) 와 교회의 대분열각주2) 을 거치면서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이 크게 약해졌다. 또 가톨릭교회는 교회세를 거둬들이고, 토지 소유를 늘렸으며, 뇌물을 받고 성직을 사고파는 등 각종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교회의 횡포가 계속되자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14세기 말부터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프라하 대학의 교수이자 유명한 설교가), 에라스무스(네덜란드 출신. 《우신예찬》의 저자)를 비롯한 북유럽의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 본래 중세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던 학자들을 뜻함)들은 세속화되어 가는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베드로 성당)의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이때 독일의 마인츠 지역의 대주교가 자신이 내야 할 초입세(성직자로 임명 받으면 그 첫해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를 빌려서 낸 뒤, 그 차용금을 갚기 위해 면죄부를 가져다 마구잡이로 팔았다.
성직자였던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반박문을 독일어로 인쇄하여 뿌렸다. 또 “신앙의 근거는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면서 《신약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루터는 루터 파 교회를 세우고 가톨릭교회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그때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와 자치 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가톨릭을 지지하는 황제와 전쟁을 하였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 파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정식으로 공인을 받았다. 이것으로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신교가 탄생하였고, 신교는 북부 독일·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에 전파되었다. 이때부터 신교도들을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제후들에게 자기 영토 내의 종교 선택권을 주는 것이지 개인의 신앙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종교 전쟁의 첫 번째 불씨가 되었다.
두 번째 불씨가 된 것은 칼뱅의 종교 개혁이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영향을 받은 칼뱅은 본국인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로 옮긴 뒤, 제네바 시와 추종자들의 지지를 받아 장로제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개혁에 성공하였다. 칼뱅의 종교 개혁이 성공한 것은 직업을 존중하고, 이윤 추구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은 이미 신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예정설을 주장하면서, 신도들에게 직업에 충실할 것을 권했다. 이런 칼뱅의 주장은 상공업을 하는 시민 계층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재산 모으는 것을 탐욕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뱅 파는 주로 대서양 연안의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간 칼뱅 파는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 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공인을 받은 루터 파와 달리, 칼뱅 파는 신교로서 공인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와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전쟁’이라는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
이처럼 다양한 신교들이 확산되자, 가톨릭교회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154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열어 프로테스탄트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약 20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열린 이 회의에서는 교회 부패와 성직 매매 금지 등 교회 내부 문제 개선과 기본 교리의 재확인, 신교도에 대한 엄격한 징벌 등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교황청은 1540년에 에스파냐의 군인이었던 로욜라가 엄격한 규율로서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기 위해 만든 ‘예수회’라는 수도회 설립을 승인하였다. 또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단자(교리에 어긋나는 사상이나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해 일종의 마녀사냥(14~17세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회가 이단자를 마녀로 판결하여 화형에 처하던 일)을 시작하였다. 가톨릭교회의 이런 반동적(진보적이거나 발전적인 움직임을 반대하여 강압적으로 가로막는 경향을 띤 것) 개혁은 16~17세기에 일어난 여러 종교 전쟁의 또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가톨릭교회(구교)의 세력이 커지면서 신교도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자, 독일 내의 신교와 구교의 제후들은 각각 동맹을 맺어 대립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의회가 마비 상태가 될 정도로 분쟁이 심했던 곳은 바로 보헤미아각주3) 였다.
가톨릭의 절대 지지국인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을 막기 위해 구교파인 페르디난트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신교도를 탄압했다. 그러자 1618년에 신교파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바로 최후의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의 시발점(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계기)이 되었다. 30년 전쟁은 페르디난트 2세의 황제 군과 맞서 싸운 국가를 기준으로 모두 4기로 나누고 있다.
제1기 보헤미아 · 팔츠 전쟁(1618~1620년)
1617년 슈타이어마르크(오스트리아 남동부와 중부에 있는 지역)의 대공 페르디난트(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의회의 승인을 받아 마티아스 왕(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도 함)의 계승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자, 가톨릭 교리를 강조하면서 신교도를 탄압했다. 그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탄압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에스파냐를 다스리는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과의 비밀 조약 때문이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는 마티아스 황제(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그를 밀어주는 대신, 알자스와 이탈리아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를 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페르디난트의 탄압을 부당하게 여긴 귀족들은 1618년에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화가 난 귀족 대표들은 왕의 신하들을 프라하 성 창문 밖으로 떨어뜨렸다. 역사에서는 이를 ‘프라하의 투척 사건’이라고 한다. 그 뒤 1619년에 반란을 일으켜 칼뱅 파인 팔츠(독일 라인 강 유역의 영지) 선제후(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에 참여할 권리를 지닌 제후) 프리드리히(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다시 세웠다.
페르디난트 2세는 가톨릭 동맹의 주축인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언 1세와 힘을 합쳐 황제 군을 결성하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황제군은 프라하 근처의 빌라호라(체코에 있는 하얀 산의 이름. 그래서 이 전투를 백산 전투라고도 함) 전투에서 귀족·용병 중심인 보헤미아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프라하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페르디난트 2세는 반란을 이끈 지도자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보헤미아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다.
이렇게 첫 번째 종교 전쟁은 가톨릭교회 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패하자, 이번에는 신교 측의 주변 국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기 덴마크 전쟁(1625~1629년)
신교 측 가운데 가장 먼저 나선 나라는 덴마크였다. 전쟁 전부터 독일 영토에 관심이 많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경쟁국인 스웨덴이 독일 북부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그 지역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1625년에 독일을 침공하였다. 이때 덴마크는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페르디난트 2세는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독립적인 황제군을 만들어 주겠다는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연방의 최서단에 있는 칼리닌그란드 주에 있는 도시 프라브딘스크)의 공작인 발렌슈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 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발렌슈타인은 전쟁에 참여하는 장군들에게 병력 소집 비용을 대주면서 새로운 황제 군을 모았다. 그 뒤 가톨릭 동맹군의 틸리 백작과 연합하여 덴마크 군과 맞서 싸웠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세는 바르에른의 장군 틸리 백작을 상대로 싸워 크게 패하였다. 신교 측 사령관인 만스펠트 백작도 발렌슈타인 장군과 데사우(지금의 독일 중동부 할레 주의 북서부에 있는 도시)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패했다.
승리한 황제 군은 계속해서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홀슈타인(독일 가장 북쪽의 연방주)에서 몰아내고, 유틀란트(북해와 발트 해 사이에 있는 유럽 북부의 반도)를 정복했다. 1627년에는 슐레지엔(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역사적인 지방. 종교 개혁 때 대부분 신교로 개종)에서 덴마크 군을 몰아냈다.
황제 군이 유틀란트를 공격할 때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반(反)가톨릭 동맹까지 맺었으나 전투에서 패했다. 크리스티안 1세는 곧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1629년 뤼베크(독일 북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주에 있는 항구 도시)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별도의 강화 조약을 맺고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페르디난트 2세는 1629년에 복원령을 내려, 1552년부터 몰수한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모두 회복시키라고 신교도들에게 강요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야심을 키웠다.
제3기 스웨덴 전쟁(1630~1635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성 로마 제국은 발트 해를 향해 진출하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북방의 사자왕이라 불림)는 신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황제 군의 발트 해 진출을 막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였다.
구스타프 2세는 그동안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던 프랑스로부터 군사비를 지원받아, 전함과 기병·보병을 모두 이끌고 독일의 우제돔(독일 북부의 메클렌부르크에 있는 섬)에 상륙했다. 구스타프는 포메른(유럽 북동부에 있는 지역. 대부분 폴란드에 속하나 일부는 독일 영토) 지역을 요새로 삼아 황제 군과 맞서 싸우려 했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일부 신교파 제후들의 협력을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의 가톨릭교회 측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의 복원령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의 야심이 모두 발렌슈타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을 총사령관에서 쫓아내라고 황제에게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황제는 발렌슈타인 장군을 해임시키고, 그 대신 스웨덴 군대가 남하할 때 틸리의 군대를 내보내 맞서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그데부르크(독일 작센안할트 주의 주도)에서 황제의 지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틸리가 이끄는 황제 군이 반란은 진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 3만 명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두려움에 떨던 독일의 신교파 제후들은 스웨덴의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힘을 얻은 구스타프 2세는 동쪽으로 진격해 틸리 군을 라이프치히(독일 작센 주 서쪽에 위치한 독일에서 10번째로 큰 도시)로 몰아냈다. 그러자 라이프치히를 수도로 두고 있는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는 구스타프와 동맹을 맺었다. 그 뒤 스웨덴 동맹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 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는 틸리를 죽이고 승리하였다. 이것이 바로 30년 전쟁에서 신교파가 처음으로 승리한 ‘브라이텐펠트 전투(1631년)’이다.
한편 틸리의 전사 소식을 들은 페르디난트 2세는 해임시켰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황제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쟁터로 보냈다.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황제 군이 다시 힘을 얻자, 오랜 전투에 지친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에게 전쟁을 중단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이를 거절하고 작센을 향해 진군했다. 그래서 구스타프도 작센의 신교도들을 구하기 위해 진군하게 되었다. 두 군대는 1632년에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크게 싸웠다.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가 탄환을 맞고 죽자, 스웨덴 군은 온 힘을 다해 황제 군을 무찔렀다. 전투에서 패한 발렌슈타인은 프라하로 돌아가 다시는 전쟁에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다시 파면당했고, 얼마 뒤 프라하에서 황제 측 인물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 황제 군의 주력은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리페 4세의 군대로 대체되었다. 이 군대는 1634년 뇌르틀링겐 근처에서 스웨덴 사령관인 구스타프 카를손 호른과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스웨덴 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한 스웨덴은 1635년 프라하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요구대로 휴전 조약을 맺었다. 이때 페르디난트 2세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제후들과 도시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했다. 그 결과 또다시 가톨릭 측과 신교파 제후 모두의 반발을 샀다.
제4기 프랑스 · 스웨덴 전쟁(1635~1648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한 스웨덴이 고립되자, 뒤에서 스웨덴을 지원했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동안 프랑스는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이 커 가는 것에 불만을 가졌지만, 가톨릭 국가라는 이유로 전쟁에 나서지 않았었다. 그러나 1635년에 에스파냐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고 있던 트리어 대주교를 사로잡자,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루이 13세 시대의 추기경이자 재상)는 이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신교파 국가들과 손잡고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1635년 프랑스는 에스파냐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독일로 나가 스웨덴과 연합하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처음에는 팽팽하게 맞섰다. 1643년 에스파냐 군은 네덜란드를 통해 프랑스 국경을 넘어와 라임 북동쪽 88km 지점에 있던 로크루아(프랑스 북동부 아르덴 주에 있는 옛 요새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자 앙갱 공작인 콩데가 프랑스 군을 이끌고 나가 에스파냐 군 2만 6천을 전멸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에스파냐 군은 더 이상 유럽의 군사적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 군도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황제 군을 무찌르고 승리를 하였다.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고 오랜 전쟁에 시달린 제후들이 전쟁을 끝내기를 원하자,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3세(163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름)는 1641년에 마침내 종전 협정을 제의했다.
베스트팔렌 조약과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에서 강화 회의각주4) 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644년이었다. 그렇지만 최초의 국제적 회의라는 점에서 진행이나 결정 방법에 대한 이견이 대립하고, 각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전투의 상황은 그때그때마다 회의 주도권에 영향을 미쳤다.
1648년 봄, 30년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프라하가 스웨덴에게 점령되었고, 프랑스 군은 황제 군과 에스파냐 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런 전세의 변화는 회의의 속도를 빠르게 진행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전쟁에 참여했던 국가들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30년 끌어온 긴 전쟁의 막을 내렸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톨릭, 루터 파와 더불어 칼뱅 파도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개인이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어졌다.
• 둘째,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 국가의 제후들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 등을 인정받았다. 그 결과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와 8선제후와 96제후, 61자유시의 연합체가 되었으며, 이는 1871년까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 셋째, 영토 면에서 프랑스는 승전의 대가로 알자스 지방과 라인강 왼쪽 연안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의 땅을 가졌으며, 브란덴부르크는 동 포메른을 차지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 넷째,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와 독립 전쟁(1568~1581년)을 치른 뒤 1581년에 북부 7주로 구성된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네덜란드는 1596년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정식으로 승인받은 것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서였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유럽은 종교적·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큰 변화가 생겼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과 에스파냐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네덜란드 북부에 대한 주권을 잃고, 독일 제후들에 대한 권한 행사가 제한되었으며, 알자스에 있던 합스부르크 영토를 잃었다. 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재정적으로 엄청난 적자를 보았기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에스파냐는 세계적인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30년 동안 각국의 침입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1,600만이었던 인구는 600만으로 크게 줄었다. 13세기 이후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던 한자동맹이 무너지고, 중산층이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존재는 남아 있었지만, 실체는 없는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베스트팔렌 조약을 가리켜 ‘독일 제국의 사망 신고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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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쟁이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풀어놓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전쟁의 칼끝에서 피어난 인류의 문명! 페르시아 전쟁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펼쳐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