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종교개혁과 30년전쟁

도봉별곡 2017. 5. 15. 03:08


종교개혁과 30년전쟁


요약 현 독일지역에 게르만족이 건설하여 내려오는 국가의 역사.

제국개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분열된 독일사회에서도 초기 자본주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국민의식이 각성되고, 인문주의자들은 제국의 약체와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스페인·영국·프랑스 등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된 나라에서는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의 정치적·종교적 결속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분열된 독일에 대해 로마 교황청의 경제적 압박은 더욱 가중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면죄부 판매를 성서적 진리에 입각하여 공격한 것을 계기로, 쌓여왔던 국민의 분노는 일시에 폭발했다(로마 가톨릭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정통 신학자 요한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과 종교회의의 권위까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사태는 심각한 국면에 이르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독일의 사제이자, 종교개혁의 주동자

새로이 황제가 된 카를 5세(1519∼56 재위)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루터로 하여금 자진 출두하여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했다(보름스 의회). 이때 루터는 "성서와 명백한 이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이러한 주장을 철회할 수 없으며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일이 가장 위험하다"고 갈파(喝破)하여 명백하게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자세를 취했다.

황제는 루터를 제국에서 추방했고,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를 받으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루터의 주장은 독일의 종교적·사상적 토대를 크게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적 불안을 느낀 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농민들의 불만은 농민전쟁으로 폭발했다.

영주에 의한 부역노동의 강화, 영방군주에 의한 조세부담의 압박 등에 시달리는 농민에게 루터의 교리는 자유의 복음으로 작용했다.

농민들은 프랑켄, 슈바벤, 상류 라인지대, 알자스 등지에서 영주관·사원·도시를 차례로 습격했다. 반란은 농민에 한정되지 않고 도시민에게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루터 자신은 농민반란을 크게 비난하여 반농민적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루터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예배양식과 신앙을 추구하는 신교도의 수는 증가하고 프로테스탄트가톨릭교도의 대립은 화해될 수 없이 깊어졌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프랑스와의 대립, 투르크의 침입 등 제국에 대한 위협 때문에 일관된 종교정책이나 효과있는 국정의 운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루터주의는 영방제후에게까지 깊이 침투했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파를 결속하는 슈말칼덴 동맹이 조직된 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교의 반목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회의가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제국의 종교적 통일이념은 포기되고 가톨릭 교회와 루터주의 공존 원칙이 승인되었다(칼뱅주의재세례파는 용인되지 않았음). 이로써 영토를 지배하는 자가 그 지역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한편 종교개혁의 물결이 가라앉은 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종교회의를 계기로 교황의 우위를 재확인하고 교회의 엄격한 위계제를 재확립하여 교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자체 정화에 힘썼다. 또한 예수회의 조직으로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등 실추된 가톨릭교의 위신을 되찾고자 이른바 '반종교개혁'을 단행했다.

트리엔트 종교회의(Council of Trient )

17세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를 묘사한 그림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교리해석을 둘러싸고 칼뱅파와 루터파 사이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분쟁을 틈타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는 귀족들이 지배자의 종교에 크게 저항했다. 그러나 가톨릭측인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도나우 지대를 병합해 가톨릭 교리를 강요하자 프로테스탄트측은 연합(Union)을 결성하여 정치적 결속을 다지려 했으며 이에 맞서 가톨릭측은 연맹(Liga)을 조직하여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었다(프로테스탄트 연합, 가톨릭 동맹). 당시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측은 네덜란드·영국·프랑스와 가톨릭측은 스페인·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톨릭 교리가 강요된 보헤미아 지방에서 반독일운동이 일어나 이 지방의 신교귀족들이 독일총독을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갈등은 독일전체로 확대되어 30년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비단 독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반(反)합스부르크 동맹군으로는 프랑스·영국·네덜란드·덴마크·스웨덴이 가담하고, 이에 맞서 가톨릭 진영이 결속했다.

그러나 전쟁은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 간의 대립전으로 압축되었다. 일시 휴전도 성립되었으나 30년 간 계속된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으로 종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① 프랑스와 스웨덴이 각각 독일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고 프로테스탄트 통치자는 그들이 몰수한 교회재산을 차지한다.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30년 전쟁을 종결하게 한 평화협정, 베스트팔렌 조약의 비준을 표현한 그림.

② 칼뱅파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스위스가 독일제국으로부터 각각 완전 분리독립한다(종교적 관용). ③ 모든 지배자의 종교가 허용되고 각 영방제후는 완전한 국가주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각 영방의 주권과 독립이 인정됨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하게 되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황폐화는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이 처참했다.

독일인구는 1,800만에서 700만으로 감소했고 전시 군인의 약탈과 폭행, 농촌과 도시의 황폐, 경제적 타격 등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경제활동과 상업활동은 극도로 마비되었고 독일이 이 재난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여러 세기가 필요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