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 - '자아와 무아, 진실과 오해'
도봉별곡
2021. 5. 7. 10:47
세미나 중계-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
* 이 논문은 2018년 11월 10일 '자아와 무아, 진실과 오해' 주제로 동국대 고순청세미나실에서 개최된 불교학연구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다.
1. 시작하는 말
무아(無我, anattan)란 자아(我, attan)의 부정을 의미한다. 붓다가 이 교설을 내세운 이유는 윤회(輪廻, saṁsāra)가 종식된 해탈(解脫, vimutti)로 이끄는 데 있었다. “아라한에게는 내세울(施設) 윤회가 없다.”라는 경문은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의 경지가 과연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자아 혹은 ‘나’를 중심으로 인과적 관계로 엮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나’ 혹은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자신과 타자, 안과 밖, 과거와 미래 등에 대해 초연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아 혹은 ‘나’에 대한 집착이 강화될수록 갈등과 불만족의 괴로움은 그 깊이를 더해간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순환구조 즉 윤회의 작동 원리일 것이다. 무아란 그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두 편의 논문을 통해 무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한 적이 있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는 한국불교학계에서 통용되는 무아 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무아와 윤회의 교설을 모순적 관계로 파악하거나 혹은 상호 공존적 관계로 이해하려 했던 그간의 여러 시도가 두 교설 모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편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에서는 무아에 대한 이해방식이 ‘형이상학적 무아’와 ‘실천적 무아’로 대별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붓다가 가르친 무아는 실천적이었던 반면에 후대에 등장한 각종의 무아 해석은 형이상학적 색채를 띤다는 것이다.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대표적 사례 3가지를 들고서 거기에 내포된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선행 연구는 니까야(Nikāya)에 일관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실천적 무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실천적 무아’는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무아(無我)라고 선언하고서 그것은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러한 ‘나(aham)’는 있지 않으며, ‘나의 자아(me attā)’ 또한 그렇다고 언급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논리는 무아의 적용 대상이 오온이며, 오온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시킨다. 또한 해당하는 경전들의 후미에는 ‘이와 같이 보고 듣는 제자(evaṃ passaṃ sutavā ariyasāvako)’는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이와 같은 경문들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자아의 허구성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 해탈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필자는 바로 이것을 ‘실천적 무아’의 전형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들에는 형이상학적 견해(diṭṭhi)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을 위배하지 않고서 ‘나’ 혹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이 나타날 뿐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실천적 무아’는 무아 자체를 내세우는 주장이나 견해마저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실제로 니까야에는 무아를 주장하는 것마저도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자아에 대한 주장이든 무아에 대한 주장이든 관념적 독단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필자는 새롭게 주목한 경문들을 통해 ‘실천적 무아’의 정당성을 내세우고자 하며,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소개된 다른 유사 경문들에 대해서도 ‘실천적 무아’라는 관점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무아란 견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괴로움의 제거와 해탈의 성취라는 실천적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선행 논문들로부터 이어지는 필자의 일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에 빠지지 말고 본래적인 ‘실천적 무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2. 무아(anattan)라는 견해(diṭṭhi)
《아비야까따상윳따(Avyākata-saṃyutta)》에는 ‘자아가 있다’고 말하면 상주론(常住論)에 빠지게 되고 ‘자아가 없다’고 말하면 단멸론((斷滅論)에 빠지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또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는 ‘나는 있다(asmīti)’라는 것도, ‘나는 이것이다(ayam aham asmīti)’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bhavissanti)’라는 것도, ‘있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nti).’라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papañcitam)’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sutta)》에도 사후의 자아가 지각을 지니고서 존속한다는 16가지 주장을 비롯하여, 사후의 자아가 소멸한다는 7가지 주장들이 견해(diṭṭhi)와 갈애(taṅhā)의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 경전에 따르면 자아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련된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는 것마저도 붓다의 의도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일체번뇌경(Sabbāsava-sutta)》에 나타나는 아래의 인용문은 사변적 관심에서 추구되는 무아의 위험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고한다고 할 수 있다. 자아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그들 모두에 대해 비판한다.
그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내는 그러한 자에게는 6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1]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2]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3]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4]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5]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혹은 그에게 이런 견해가 생긴다. [6]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에 갇힘,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이라고 한다.
인용문에 언급된 [1]의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 [3]의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6]의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는 등’의 견해는 자아를 주장하는 일반적 논리로 간주할 수 있다. 반면에 [2]의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 [4]의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5]의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는 자아의 부재 혹은 무아를 내세우는 부류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무아를 언급하는 후자의 셋은 자아를 주장하는 전자의 셋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6가지 모두가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용문에 거론된 6가지 견해의 족쇄는 앞서 언급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 나타난 자아의 유무에 관한 망상의 구체적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시비사왁가》의 후미에서는 망상에 처한 상황에 대해 ‘질병을 지닌 것’ ‘종기를 앓는 것’ ‘화살에 맞은 것’ 등으로 비유하면서, 망상이 없는 마음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망상이나 견해에 매몰된 상태에 대해 치료가 요구되는 비정상의 상황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마두삥디까숫따(Madhupiṇḍika-sutta)》에서도 망상의 발생 과정을 분석한 연후에 그것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다. 망상에 대해 환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탐냄 · 견해 · 의혹 · 자만 · 무명 등의 잠재적 성향이 사라지고, 싸움 · 논쟁 · 언쟁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도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망상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형이상학적 난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했던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