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설. 사성제. 중도. 삼법인. 오온
근본불교의 교설 - 연기, 윤회, 중도사상 - 12연기설을 중심으로 -
도봉별곡
2021. 5. 15. 00:18
근본불교의 교설 - 연기, 윤회, 중도사상 - 12연기설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말
불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들인 연기사상과 윤회, 중도, 유식, 선사상 등을 짧은 보고서 하나로 접근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백과사전식 기술은 차라리 쉬울 듯 하지만 짧은 글 하나를 작성하기 위해서 찾아 본 자료와 고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음을 밝힌고 싶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점은 불교가 너무나 방대한 범위에 걸쳐져 있다는 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초보적인 여행자가 밀림이나 바다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능숙한 길잡이의 도움이 필수적인데 그러한 전제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과제를 수행하는 난감함이다. 셋째는 선택적으로 열거된 과제들이 별개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연기사상과 윤회, 중도, 유식, 선사상등은 서로가 그물처럼 얽혀져 있고 관계되어졌다.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복잡해지고 모르게 되는 묘한 지경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처럼 당황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라 여기고 부족하나마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그믈망을 주로 활용하여 과제를 수행했음을 미리 밝히며, 독자적인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적었기에 또는 그로 인한 필연적 왜곡이 확연하기에 참고문헌 혹은 사이트의 글을 위주로 요약하고 흐름만을 최대한 간략히 기술하기로 한다.
본론 부분에서는 먼저 백과사전식인 해설을 통해 각 과제들을 조망해 본다. 다음으로는 방대한 불교를 근본교설의 내용인 연기법과 윤회, 그리고 중도사상의 묶음으로 또는 흐름으로 따라가 보고자 한다. 이들에 비중을 둔 것은 이 근본교설들은 불교를 이해하는 최소의 필수적 사상이며 어느 하나를 잡아 끌어도 종국엔 함께 딸려나오는 그물코와 같은 관계망이요 하나의 마당이라는 생각에서이다.
2. 백과사전식 기술로서의 불교사상의 편린
緣起(patityasamutpa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설이다.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같이 중생이 생사·유전(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사제설(四諦說 : 사성제. 네 가지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苦)·집(集)의 2제는 유전연기, 멸(滅)·도(道)의 2제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 ·유(有)·생(生)·노사(老死)의 12종이 순차적으로 발생·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십이연기이다. 《아함경(阿含經)》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 말이나, 연기를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설(說)한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따라서 연기에 관하여 원시불교 이래 대승·소승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업감(業感)연기·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진여(眞如)연기·여래장(如來藏)연기· 법계(法界)연기 등이 그것이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업설(業說)이 부가되어 십이연기의 12지(支)를,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설명하였다. 이는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타파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인데, 특히 그 최초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에 의해 연기와 밀접히 관련지어져 ‘연기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해석이 확립되었다. 즉 일체는 다른 것에 인연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인상대(相因相待)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은 자성을 갖고 있는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사상이다. 중기 대승불교의 하나에 일체의 현상을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유식설(唯識說)이 있는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는 외계의 일체 현상은 말나식(末那識)의 활동과 이 말나식을 내포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또 하나가 모든 중생 속에는 깨달음의 가능성, 즉 여래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기에서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을 둘러싼 외계의 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생사에 유전하는 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화엄경》 법계연기는, 모든 연기를 이상세계로서의 법계의 전개라고 보고 일체의 사물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를 연기무애문(緣起無門)이라고도 한다.
輪廻
생명이 있는 것, 즉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교사상. 산스크리트의삼사라(samsara)를번역한말로,전생(轉生)·재생(再生)·유전(流轉) 이라고도 한다. BC 600년경 《우파니샤드[優波尼沙土]》의 문헌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전파되었다. 불교에서는윤회하는세계에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인간·천상(天上)의 6도(六道:六趣)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모기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파리·모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하며, 또한 이 업은 이승에 있는 우리들의 상식을 초월하여 판정되어, 선업(善業)에 의하여 선의 세계에, 악업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한편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말한 이가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中道(madhyama-pratipad)
단멸(斷滅)·상주(常住), 유(有)·무(無), 고(苦)·낙(樂) 등 두 가지 대립·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즉 불교의 근본적 입장으로서 대승·소승을 통하여 중시되어온 사상. 석가의 깨달음도 최초의 설법도 이 중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원시·부파(部派)불교에서는 고·낙의 이변(二邊)을 떠난 실천인 팔정도(八正道)를, 또한 단·상, 유·무 등의 편견을 떠난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이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를 피하고 낙을 구한다. 안락은 고와 대립하면서 인생의 이상으로서 지고의 선이다. 여기에 고의 멸과 낙의 초월의 ‘이중부정(二重否定)’이 있다. 이 이중부정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절대가 현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관파에서는 성멸(成滅)·단상(斷常)·일이(一異)·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대립적인 견해에서 떠날 것을 말하는 팔불(八不) 중도를 가리킨다. 결국 공(空)을 말한다. 법상(法相)·유식(唯識)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천태종에서는 실상(實相)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해석한다.
龍樹(Nagarjuna, 150?~250?)
인도의 불교학자. 원이름 나가르주나(나가 : 용, 아가르주나 : 나무 이름). 남인도 출생. 북인도로 가서 당시 인도의 사상(思想)을 공부하고, 불교 특히 신흥 대승불교(大乘佛敎)사상을 연구, 그 기초를 확립하였다. 때문에 제21의 서가(書家), 8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중론(中論)》에서 전개한 공(空)의 사상은 그 이후의 모든 불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즉, 실체(實體:自性)를 세우고, 실체적인 원리를 상정(想定)하기 위한 바람직한 자세를, 철두철미한 비판을 가하면서, 일체의 것이 다른 것[他]과의 의존·상대·상관·상의(相依)의 관계[緣起]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관관계는 긍정적·부정적·모순적 상태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느 것에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공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반면, 구극(究極)의 절대적 입장[眞諦·第一義諦]은 우리의 일상적 진리[俗諦 즉, 世俗諦]로만 성립할 수 있으며, 이를 초월해서는 논의의 대상이나 표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학파를 가리켜 중관파(中觀派)라고 불렀다. 주요 저서에 《중론》(4권) 외에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등이 있으며,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은 그의 저작설에 의문점이 있다.
中觀派(Madhyamika)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중요한 학파.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중관론의 약칭)을 근저로 하여 반야 공관(般若空觀)을 선양한 학파로서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되었다. 《중론》의 설은 모든 존재가 연기성(緣起性)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공은 유·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라는 것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데에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는 《백론(百論)》 등을 저술하여 외도(外道)와 소승의 교의를 논파하고, 제바의 제자 나후라발타라(羅羅跋陀羅)는 《중론》의 팔불(八不)의 의의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중관파가 학파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불호(佛護) 시대부터인데, 고학의 근본은 무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 공의 입장이다. 불호 이후 공의 인식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2파로 나뉘었는데, 불호의 계통인 필과성공파(必過性空派) 또는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와 청변(淸辨)으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이다. 전자로부터는 월칭(月稱)이 나와 중론의 주석서 《Prasannapada》를 쓰고, 《중관에의 입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티베트에 널리 유포되었다. 후자에는 같은 시기에 관서(觀誓)가 나오고, 또한 이어서 적천(寂天)도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등의 중요한 논서를 저술하였다. 8세기에는 적호(寂護), 연화계(蓮華戒)가 중관파와 유가행파를 종합한 입장에서 중관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그 계통은 티베트로 전파되어 번영하였는데, 그 대표자가 아티샤(982∼1055)이고,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을 소의(所依)로 하는 삼론종(三論宗)이 발전하였다.
般若思想(prajna)
반야경전을 근본으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대승불교 사상. 초기 《도행(道行)반야경》의 성립에서 시작된 반야바라밀의 강조는 초기 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반야 개념의 정립과 함께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의 6가지 덕목 중 하나로 시작되었으나, 반야의 인식론적 중요성이 공(空)사상의 대두와 함께 부각되어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 공관(空觀)의 체득을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의 수행이 필수적이라 하였다.
사물에 대한 분별심 없는 직관을 통해 보다 그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반야사상은 그 후 발전되어 염불 내지 신주(神呪)·진언(眞言)에도 응용되어 대표적인 밀교경전인 《이취경(理趣經)》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의 근본사상이 되었으며, 《반야경》이 중국에 전래되어서는 반야의 오묘한 이치가 중국 도교의 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 중국에 반야사상이 유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중국적으로 반야사상을 이해하는 격의(格義)불교를 일시동안 낳기도 한다. 《반야경》을 주석한 형태인 중관불교는 공사상으로 표현되는데, 유식사상과 함께 인도 대승교학의 2대 흐름을 하나로 중국 선불교의 6조 혜능의 깨우침도 반야사상에 입각한 《금강경》을 독송을 듣고 이루어졌음을 볼 때 중국 불교의 경우는 교학뿐만 아니라 실천수행에도 반야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空(sunya)
공·영(零)·무(無) 등을 뜻하는 범어 ‘수냐’의 한역어(漢譯語). 순야(舜若)·순야다(舜若多) 등으로 음역(音譯)되는데, 3가지 의미로 쓰인다. 인도 수학에서 수냐는(sunya)는 영(零)을 의미하는 말로, 없는 것, 비어 있는 것, 결핍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 불교, 특히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반야사상(般若思想) 계통의 중심사상이 된 말이다. 즉,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實體)는 없으며, 연기(緣起)에 의하여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부정사(否定詞)로서 없다[無]는 의미로 사용될 때 이것은 존재 자체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자체(自體)·실체·아체(我體)·본체(本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즉, 아(我)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영구적 항존성을 인정하는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부정한다. 말하자면 고정적 실체의 부정이다. 이러한 공(空)의 사상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있었으나 대승불교, 특히 용수(龍樹:Nagarjuna)의 반야사상에서 핵심이 되었다.
禪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a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a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a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戒·定·慧),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身·愛·心·法의 네 염처), 그리고사제(四諦:苦·集·滅·道의네진리), 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 ·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선정을설명하는형식으로원시불교는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空등지·無相등지·無願등지),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오정심관(五停心觀:不淨觀·慈悲觀·因緣觀·界分別觀·數息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등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唯識學派(vijuaptimatravadin)
인도 대승불교의 한 학파. 6파철학의 일파이기도 하다. 수행방법으로서 유가행(瑜伽行), 즉 유가(요가)를 중요시하므로 유가행파(派) 또는 유가파라고도 한다. 파조는 파탄잘리. 대승불교의 다른 한 파인 중관파(中觀派)와 대립하면서 300∼700년간에 발전·변천하였다. 이 학파의 초기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磨經)》이고 그 성립연대는 3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후 미륵(彌勒)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그 학설을 발전시켰다. 미륵의 가르침을 받은 무착(無著)은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을 저술하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본으로 하는 인간의 의식구조 및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관의 실천에 대한 조직적인 학설을 정립하였다. 무착의 동생이며 제자가 된 세친(世親)은 미륵·무착의 논서들을 주석하여 많은 저작을 하였으며, 또한 종래의 여러 사상을 집성하여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지어 유식사상을 대성하였다. 세친 이후는 《유식삼십종》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파가 발전하였다. 덕혜(德惠)의 뒤에 안혜(安慧)가 나와 많은 주석서를 썼는데, 그 계통에서 조복천(調伏天)이 나왔다. 또한 안혜와 거의 같은 계통의 진제(眞諦)는 중국에 들어가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섭대승론》과 석(釋)을 번역·강의하여 그 문하에서 섭론종(攝論宗)이 성립·발전하였다. 한편 진나(陳那)는 논리학[因明]을 대성하였는데, 그 계통에서 무성(無性)·호법(護法)이 나왔으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을 지어 유식설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계현(戒賢)에 의해 계승되었다. 구법(求法)차 인도에 갔던 현장(玄)은 계현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성유식론》 및 그 외의 많은 유식학파의 경·론을 번역하였다. 그의 문인(門人) 규기(竅基)는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하였으며, 또한 유식학파에는 난타(難陀)·승군(勝軍)의계통도있으며,논리학계통으로는상갈라주(商羅主)·법칭(法稱) 등이 있다.
3. 근본불교 교설로서의 연기, 윤회, 중도사상
근본교설은 붓다가 직접 가르친 것으로, 또한 붓다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이다. 아직 교단이 분열되기 전이었으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주장없이 그대로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근본교설에서는 형이상학설을 배제하고 세계와 인생의 현상적 존재에 대해서만 매우 합리적인 고찰을 하였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여러 교리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연기설(緣起說)이며, 연기설의 응용 내지 실천 이론들인 12연기, 사성제(四聖諦), 중도(中道), 삼법인(三法印), 오온(五蘊), 삼독(탐진치 : 貪嗔痴), 윤회, 육식(六識)과 업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 12처설
불교는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에서부터 설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인 현실세계란 과연 어떤 구조와 성질을 가진 것인가. 한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석존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잡아함 卷 13>
당시의 인도에서 일체(一切, 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세계(世界)나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과도 등치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런 일체에 대해서 각 종교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이제 석존은 그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석존은 생문 바라문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바라문이여, 일체는 십이처(十二處)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시설코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잡아함 卷13>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열 두 가지에 거뜬히 포섭(包攝)된다는 것이오, 그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십이처설에서 우리는 둘째로,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이처설에서 인식 주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은 그대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인식객체가 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상 즉 육경(六境)은 그러한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체(主體)적 인간의 특질을 의지(意志,manas)'로 파악하고, 객체적 대상의 특질을 '법(法,dharma)'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주목해야 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능동적인 힘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법(法)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결과를 나타내는 '필연성을 지닌 것'을 가리킨다.
2) 18계설
십팔계설 이란 위의 십이처설이 주로 물질적인 색법(色法)의 분류인데 비하여 십팔계설은 여기에 심법(心)을 추가하여 색(色)·심(心) 양면을 다 포함하는 일체 만유의 분류법이다. 界라는 말은 종족의 뜻도 있다고 하고 본생의 뜻도 있다고 하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십팔계의 제법(諸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는 뜻이다. 다음 本生의 뜻은 이들이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십팔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 말한 십이처에 인식작용의 주체인 육식을 포함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렇다면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육식(六識)이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 기관인 육근(六根)과 그의 대상인 육경(六境)과 인식 주체인 육식(六識)과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난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육근과 육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육식은 과연 어떤가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육식(六識)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육근(六根)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육경(六境)을 대하여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각기 식(識)의 이름을 얻어 육식(六識)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과의 문제를 놓고 보면 앞의 십이처설 에서는 육근이 주관이요 육경이 객관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육경도 또한 물질적인 것이라 주관이 될 수 없는 점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십팔계에서는 육식이 더해지므로 육식이 참다운 주관이 되고 육경과 육근은 함께 객관이 된다고 하겠다. 이제 이 식(識)·근(根)·경(境)의 관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十 八 界]
六識 …> 眼識 - 耳識 - 鼻識 - 舌識 - 身識 - 意識
↓ ↓ ↓ ↓ ↓ ↓ ↓
六根 …> 眼根 - 耳根 - 鼻根 - 舌根 - 身根 - 意根
↓ ↓ ↓ ↓ ↓ ↓ ↓
六境 …> 色境 - 聲境 - 香境 - 味境 - 觸境 - 法境
이상과 같이 볼 때 앞에 나온 오온설(五蘊說)이 마음(心)에 치우치고 십이처설이 물질(色)에 치우친데 비해 이 십팔계설은 색(色)·심(心) 양면을 고르게 統攝하여 분류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분류 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은 오온설, 십이처설, 십팔계설의 셋은 다 같이 우리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일체 만유의 분류법으로 흔히 삼과설이라 하여 한데 묶어져 설하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다 같이 인생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이 이상과 같이 각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비바사론)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교화될 바 유정(有情)에는 둔근기(鈍根機), 중근기(中根機), 이근기(利根機)가 있으니 둔근자(鈍根者)를 위해서는 십팔계를, 중근자(中根者)를 위해서는 십이처를, 이근자(利根者)를 위해서는 오온(五蘊)을 설한다.
㉡ 교화될 바 유정에는 광(廣)을 좋아하는 자, 중(中)을 좋아하는 자, 약(略)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광을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십팔계를, 중을 좋아하는 자를 위해서는 십이처를, 약을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오온을 설한다.
㉢ 교화될 바 유정에는 색심(色心)에 우매한 자, 색(色)에 우매한 자, 심(心)에 우매한 자가 있으니, 색심(色心)에 우매한 자를 위해선 십팔계를, 색(色)에 우매한 자를 위해선 십이처를, 심(心)에 우매한 자를 위해 서는 오온을 설한다.
그리고 이 삼과설(三科說)에는 극소한 부분 무위법(無爲法)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유위법(有爲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현상계 만유는 인연의 화합으로 모였다가 인연의 이산(離散)으로 흩어진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도리를 밝히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연 기 설
석존의 깨달음을 설한 경전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결국 연기(緣起)의 자각이 그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석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연기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불타(佛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 교설들은 모두 연기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연기의 의미를 아는 것이 근본불교의 사상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기사상은 근본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초기대승, 중기대승에 있어서도 항상 불교의 중심문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후기대승은 물론 중국, 한국, 일본에서 발전한 불교에서도 각각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고찰되고 있다.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로 일체의 사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성립한다고 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나 그것을 둘러싼 세계는 모두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근본불교에 있어서 연기의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하나의 글귀를 들 수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어떤 것을 緣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서로 관계하여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상주불변(常住不變)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을 형성시키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그리고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연기설이란 존재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원인이 되고 다른 것이 어떤 것의 결과가 된다고 하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연기의 관계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얼어난다’고 하는 무시간적, 논리적 관계와 함께 시간적, 생기적(生起的) 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다. 연기설은 세계 인생의 일반적인 생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기가 말하여진 본래의 목적은 단순한 일반적 현상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고뇌가 어떠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어떠한 인연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가 하는 인생의 고락운명에 관한 것을 밝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설이 문제되는 현상은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선악업과 그 과보로서의 고락과 같은 윤리 종교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연기의 인과관계에는 과거세로부터 현재, 미래세에 이르는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업보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근본불교에서는 연기에 의한 현상간의 관계방식에 대해 상세한 고찰은 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불교에서는 그에 대한 여러 각도에서의 고찰이 행해져 왔다. 불교의 근본주장은 크게 연기설로 일관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고찰의 각도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설을 협의로만 이해하여 연기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 선후가 있는 인과 관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간에 관계없는 논리적인 연기관계에 대해서는 그것을 연기라고 부르지 않고 실상(實相)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따라서 후세의 불교에서는 연기론과 실상론이 대립하여 양자는 별개의 교학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졌다.
4)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
연기란 일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지만, 석존에 의해 자각된 이러한 연기설이 당시 인도 사상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불전(佛傳)에 의하면 석존은 출가한 후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근교에 있던 알라라 카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 밑에서 선정을 하였지만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석존은 다시 우루벨라의 세나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들어가 모든 고행을 다하였지만 이것에 의해서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란자라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을 처녀 수자타가 바친 우유죽을 먹고 몸과 마음을 회복한 후, 이윽고 보리수 밑에서 스스로 선정에 들어 정각을 얻어 불타가 되었던 것이다. 그때 석존이 정각을 얻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버렸던 당시 철학이나 종교는 크게 바라문계와 육사외도 등으로 대표되는 사문계의 사상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한 인도 정통파의 입장에 속하는 것으로 유일의 원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전 세계가 생겨났다고 하는 점이 사상적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보통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한다. 바라문계 사상에서 있어서는 전 세계가 어떻게 성립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할 때 먼저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근본원리를 세우고 이러한 근본원리인 브라흐만이 자기자신을 전개시켜 전 세계를 성립시킨다고 주장한다. 일체는 브라흐만이다’라는 주장은 우파니샤드에서 자주 설해지는데 이러한 근본원리로서의 브라흐만은 개인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아트만과 동일시되고 점차 정신적 원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그러므로 전변설은 절대 유일의 정신적 원리가 전개하여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가 성립된다고 설하는 주장이다.
이 시대에는 종래의 바라문계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자유사상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육사외도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자유사상가들이 주장한 사상의 특징은 유일의 원리로부터 복잡한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독립된 원리와 요소가 어떠한 형태로서 결합하여 이 세계가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외도라 불려지는 사문들 가운데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원소를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들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체가 소멸함과 동시에 모든 원소도 각각 분해한다고 설하였다. 파쿠다 캇차야나는 7요설을 인정하였고, 막칼리 고살라는 살아있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 12가지 원리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여 인간 및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주장을 초기경전에서는 적집설(積集說) 또는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한다. 이 적취설은 바라문계의 전변설에 비해 유물론적 색채가 강하며, 업이나 인과응보의 이치를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의 연기는 보편적인 법칙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철학설로서 논의되기 의한 것은 아니며 지금 여기서 인생의 괴로움에 번민하고 있는 인간의 문제로 설해진 것이다. 연기는 ‘무엇을 緣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뜻이지만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고 하는 존재의 성립을 설할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괴로움에 얽매인 인간 존재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현실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연하여 일어났다. 다시 말해 연기된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것을 바로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문계의 전변설이나 사문들의 적취설에 비해 연기의 입장은 세계관적인 면에서 양자를 초월한 보다 높은 입장, 종교적 면에서 볼 때 깊은 실천적인 입장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 있어서 연기는 항상 인간의 미혹과 깨달음을 문제로 설해지는데 보통 십이연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십이연기는 12가지 지분(支分)을 갖춘 형태로서 십이인연(十二因緣),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라고도 한다.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12연기로써 때로는 생멸 변화하는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교리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12연기를 관찰하는 방법에는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이 있다.
순관이란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이 있다. 계속해서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이 있고,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가 있고,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가 있고,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고,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고,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이 있고, 생을 조건으로 해서 노사가 있다 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순관은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유전(流轉) 연기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 등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세계에서 생사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역관이란 고(苦)가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노사의 소멸까지를 설명한다. 이렇게 보는 연기를 역시 환멸(還滅) 연기라고도 한다. 그것은 존재가 무명과 욕망을 없앰으로써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세계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는 훗날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十二支 각각의 의미를 주로 경전 자체의 설명에 근거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무명(無明, avida)이란 글자 그대로 명(明, 지혜)이 없다는 말이다. 올바른 법, 즉 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연기의 이치에 대한 무지이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이다.
고(苦)는 진리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기므로 무명은 모든 고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다. 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 samskara)이 있다. 행이란 행위, 즉 업(業, karman)을 가리킨다. 행에는 몸으로 짓는 신행(身行)과 언어로 짓는 구행(口行)과 마음으로 짓는 의행(意行)이 있다. 행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 때문에 짓게 되고 그것을 지운 존재의 내부에 반드시 잠재적인 힘의 형태로 남게 된다.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識, vijnana)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6식이다.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따라서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식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namarupa)이 있다. 명(名, nama)이란 정신적인 것을 그리고 색(色, rupa)이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식이 주관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명색은 그 대상인 객관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六入 또는 六處, sadayatana)이 있다. 육입이란 6가지 감각기관, 즉 육근(六根)이다. 이는 대상과 감각기관과의 대응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육입을 조건으로 해서 촉(觸, sparsa)이 있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촉(觸)에도 6가지의 감각기관에 의한 육촉(六觸)이 있다. 촉은 육입에 의해서 생긴다고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육입만에 의해서가 아니고 식(識), 명색(境), 육입(根) 등 3요소가 함께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촉을 조건으로 해서 수(受, vedana)가 있다. 수란 즐거운 감정, 괴로운 감정,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감정과 그 감수(感受)작용을 말한다. 감각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인식작용 등의 3요소가 만날 때 거기에서 지각을 일으키는 심적인 힘이 생기게 되고 그 다음 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는 촉을 조건으로 해서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를 조건으로 해서 애(愛, trsna)가 있다. 애란 갈애(渴愛)라고 하는데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取, upadana)가 있다. 취는 집착의 의미로서 인간의 미혹한 생존은 집착에 근거한 것이다. 맹목적인 애증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이 생기면 뒤따라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애를 조건으로 해서 취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취를 조건으로 해서 유(有, bhava)가 있다. 유(有)란 존재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취를 조건으로 해서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되는가를 설명해 놓은 곳을 찾기 어렵다. 업설에 의하면 집착 때문에 업이 만들어지고 업은 생(生)을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유(有)를 업이라고 본다면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유가 있다라는 말은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업이 있다라는 것이 된다.
두번째 항목인 행을 무명으로 인해 생기는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유는 애와 취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를 조건으로 해서 생(生, jati)이 있다. 업은 생을 있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유에 의해서 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생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jara-marana) 등 여러 가지 고가 있다. 생이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고(苦) 즉 근심, 비애, 고통, 번뇌, 번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석존은 오랜 각고의 구도求道) 끝에 마침내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발견한 것이다. 세계의 어떤 종교가 석존의 이러한 깨달음보다도 더 밝은 전망을 인류에게 비춰주고 있을까. 연기(緣起)의 깨달음이야말로 인류의 종교적 사색이 도달한 최고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석존이 이룬 깨달음(bodhi)의 내용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연기(緣起)의 법(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오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안 나오건 간에
이 법(法)은
무상(常住)이요
법주(法住)요
법계(法界)이니라.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들에게 설하나니,
이것이 있으므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써 저것이 생한다.
즉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
이것이 없으므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써 저것이 멸한다.
즉 무명(無明)이 멸하므로 행(行)이 멸하고,
내지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게 된다."<잡아함 卷12>
석존뿐만 아니라 비바시불(Vipasi-buddha)을 비롯하여 과거에 출현했던 여러 부처님들도 모두가 보제수 아래서 십이연기 순(順)·역(逆)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설해져 있다.<잡 아함 卷15> 순관(順觀)은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역관(逆觀)은 노사(老死)에서 무명(無明)의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역(順逆) 두 관찰에서 부처님들이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먼저 역관(逆觀)에 의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전에도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잡아함 卷12> 불교의 종교적 사색은 현실(生死문제)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심화되고 있어 신이나 우주의 원리로부터 설해 내려오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다. 역관(逆觀)은 불교의 이러한 추리적 사색의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순관(順觀)은 깨달음에 입각해서 生死의 발생과정을 밝혀 주는 설명적 교설이라고 보아도 좋다. 십이연기설은 중층적으로 심화되는 불교의 교리 조직 중에서,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이, "제가 보기에 연기는 그렇게 심심한 뜻이 없는 듯합니다." 라고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심심한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증일아함 卷46>
십이연기설은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 설해진 여러 가지 법문을 하나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형태임을 또한 보여 준다. 우선 그 지분의 조직만 보더 라도, 오논(五蘊)· 십이처(十二處)· 생사(生死) 등의 여러 가지 법이 그 속에 하나로 짜여져 있으며, 연기라는 발생법에는 인과(因果)· 인연(因緣)· 상의상관(相依相關) 등의 모든 불교적 개념이 포섭되어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십이연기설은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 설해진 가장 심오한 법문이며, 깨달음의 내용이며 여러 교리를 하나로 종합·체계화한 것이며, 독특한 불교적 입장에 대한 최승의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선 그 가치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감이 있다. 부파불교시대(B.C. 3세기 ∼ 1세기경)에는 십이연기설이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었다. 즉 인간이 과거(無明·行)·현재(識·名色·六處·觸·受·愛·取·有)·미래(生·老死)의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에 대 해 현대 불교학자들은 그 잘못을 지적하고, 그런 해석은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비판 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불교학의 큰 성과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십이연기설을 단순히 논리적 또는 존재론적 연기관(緣起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학자는 십이연기설은 교리가 차츰 정비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소위 후대 성립설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위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십이연기설을 고찰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십이연기설을 도저히 그렇게 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5)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
근본 불교사상은 당시 인도사상과 비교할 때 거기에는 불교사상이 인도 일반의 사상과 공통되는 점도 있고, 인도의 다른 사상에서 보이지 않는 불교 특유의 사상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시대 환경이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고, 후자는 시대 환경을 초월하여 불교라고 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사상을 성립시킨 것이다. 그 가운데 인도 일반사상과 공통된 것으로는 업보윤회(業報輪廻)의 사상과, 수행해탈(修行解脫)의 사상이 있다. 선을 행하면 행복한 결과가 오고 악을 행하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보사상이 인도에서는 불교 이전에 이미 초기 우파니샤드 시대에서부터 확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설은 인도뿐 아니라 동서고금에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선이나 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끌기까지의 사이에 그것은 어떠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인가, 또 원인과 결과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하는 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업보사상에서는 원인과 결과와의 연쇄가 반드시 동일 인격내에 즉 자신에거 한정되는 것으로 스스로 행하여 스스로 그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자업자득의 원칙이 있다. 이 경우 원인으로서의 선악의 행위가 그 결과를 이끄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과의 연쇄는 전세(前世), 금세(今世), 내세(來世)라고 하는 삼세(三世)에 걸쳐서 행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선인은 사후에 천국락토(天國樂土)에 태어나고, 악인은 악계지옥(惡界地獄)에 떨어진다는 사고는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 발생 수백년 전 아타르바베다 시대부터 브라흐마나 시대에 걸쳐서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윤회설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었다. 윤회설은 삼세에 걸쳐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음으로 해서 여러 세계를 거쳐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와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등 육도(六道)에 걸쳐 윤회한다고 한다. 이 윤회설이 성립한 것은 불교 발생 2, 3백년 전인 우파니샤드 시대라고 여겨진다. 석존은 당시의 사문고 바라문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의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올바른 업보설을 채용하지 않고 그릇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고, 그 주장을 다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하였다.
첫번째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된다.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악업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악의 행위를 하고 노력을 기율여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규정하는 원인을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다.
세번째 결합인설(結合因說)은 이 세계 인생의 모든 것은 지수화풍 등의 몇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발생하고 그 결합 상태의 좋고 나쁨에 의해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결합상태는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확정되어 그것이 한평생 일정불변하게 존속하기 때문에 금세의 우리의 노력에 의해 운명을 변화시킬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합인설도 일종의 숙명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 계급인설(階級因說)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흑(黑), 청(靑), 적(赤), 황(黃), 백(白), 순백(純白)의 여섯 가지 계급으로 구별되어 있어,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성격, 지혜, 환경, 가계 등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숙명론으로 후천적인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번째 우연인설(偶然因說)은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사상계가 혼란한 당시의 인도에서는 위와 같은 여러 학설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인과업보의 설도 일반적으로 유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업보윤회설에는 많은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숙명론적으로 이해하고 체념할 수 있는 소지도 많다.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행위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현재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업보윤회설에 있어 불교의 특징은 윤회의 주체로서 영혼을 인정하지 않고, 업 자체가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6) 중도설
불교는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적 입장을 갖고 있다. 인도 정통파 사상의 아트만(atman)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이라든가, 형이상학적 희론(prapanca)을 부정하는 무기설(無記說) 등 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초기경전에 설해진 최상법문(最上法門)으로서의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불교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서도 가장 체계적이고 심오한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먼저 무아설에서부터 살펴보자. 일체가 무아(無我)라는 판단은 앞서 삼법인설(三法印說)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일체는 무상(無常)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무아(無我)"라는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따라서 무상(無常)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은 완전하고 철저한 무아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하면 앞서 삼법인의 무아설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무아라면 이 중에 어떤 나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잡아함 卷10> 무아라고 하지만 현재 나는 분명히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의혹을 일으켰던 천타 비구에게 다음과 같은 해답이 베풀어지고 있다. "세간의 집(集: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멸(滅)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가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中道)에서 설한다."<잡아 함 卷10>고 한 다음, 곧 십이연기설이 설해지고 있다.
세간(世間,loka)이라는 말은 세계나 일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 무아설(無我說)의 '아(我)'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러한 세간은 무명(無明)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연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왜 그러냐면 실재성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한 망념에서 연기한 것에는 실체가 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무명에서 연기한 것은 무명의 멸(滅)과 함께 없어지는 성질의 것이다. "세간의 멸을 여실히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이 뜻을 가리키고 있다. 불교 무아설의 최승한 뜻(parama-artha)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나에게는 실재성이 없으므로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무아는 망념에 입각한 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타비구가 제기했던 '알고, 보고, 말하 는 그 나'는 바로 이러한 나(妄我)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설은 유(有)와 무(無)의 두 끝을 떠난 중도(中道)적인 교설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곧 십이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석존은 형이상학적인 희론(戱論)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셨는데, 이것 또한 십이연기설에 최상의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불교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희론의 조직적인 제시는 십사무기설(十四無記說)이다. 이것은 앞서 제1절에서 만동자의 질문을 통해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열 네 가지 문제에 관한 것이다.
① 세계는 상(常)인가, 무상(無常)인가, 상(常)이며 무상(無常)인가 상(常)도 아니고 무상(無常)도 아닌가.
② 세계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유한이며 무한인가, 유한도 아니고 무한 아닌가.
③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인가.
④ 여래는 사후에 유(有)인가, 무(無)인가, 유이며 무인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석존은 의례 답변을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무기(無記,a-vyakarana)'는 해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열 네 가지 문제를 십사무기라고 하는데, 석존께서 이렇게 답변을 삼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본래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기본적인 입장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만동자에게는 "열반과 깨달음에 이르는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수행상의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오논에 대해 무지하므로"<잡아함 卷34> 그런 희론과 집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한 이유는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발견된다. 앞서 무아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연기한 것은 유와 무의 두 끝을 떠난 중도(中道)적인 입장이다. 그와 같이 단(斷)과 상(常)<잡아함 卷12>, 일(一)과 이(異)<잡아함 卷12>, 자작(自作)과 타작(他作)<잡아함 卷13> 등의 두 극단도 초월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열 네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인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석존이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에 올바른 답변을 한다면, 두 끝을 떠난 중도적인 십이연기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불교의 핵심사상을 먼저 백과사전식의 편린을 통해서 주어진 과제인 인과사상과 윤회설 중도 사상과 선 및 유식사상 등을 살펴 보았다. 다음으로 근본불교의 교설로서 인과사상과 윤회설 그리고 중도사상을 중심으로 삼아 그 흐름과 연계성을 살펴 보았다. 물론 ( 연기법으로서의 5온설을 생략했고 ) 다음으로 이어지는 10업설 3법인 4성제 8정도 중관사상등에 대한 연결이 남았지만 이쯤에서 맺음한다. 그 주된 이유는 글이 길어지는 것이고, 글이 길어지는 것은 흐름은 대강 잡았지만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저 유용한 정보를 찾아 그대로 기술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참고자료의 분량과 여기저기 동냥을 한 여정 및 시간은 3주간에 걸쳐 있었고, 나름대로는 힘겨운 일이었음을 다시금 밝힌다. 성철스님께서는 불교의 8만대장경이 모두 마음 심 한자에 올려져 있다는 말씀을 하셨으니 사뭇 한가지 위안을 가짐과 동시에 그 한자를 위해 8만 대장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참으로 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한다.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불교에 대한 귀동냥을 많이 한 듯한데도, 이번 과제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유익한 사이트를 통해 체계적인 접근을 할 여지를 두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는 큰 위안이다. 아함경 금강경 화엄경 반야심경 연화경에서 밀종 선종 유식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들을 확인했다. 또한 한국불교의 간화선 논쟁까지 접해보았고 응용불교학이라는 분야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라 여긴다.
번뇌를 안겨준 교수님께 고마움을 표하고 싶고 일체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시고 빛을 밝혀 오신 불, 법, 승 삼보의 한량 없는 자비와 공덕에 합장배례 들인다. 끝으로 좋은 정보를 보시해주신 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하며 양해없이 무단전제한 점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나마 예를 올린다. 특히 네이버 ‘무혁이의 블로그’ 의 주인장님께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