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설. 사성제. 중도. 삼법인. 오온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삼법인(三法印) 도봉별곡 2021. 6. 30. 02:47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삼법인(三法印) ― 무상·고·무아 ― The Three Signata O. H. de A. 위제세케라 지음이 지 수 옮김Prof. Dr. O. H. de A. Wijesekera(The Wheel Publication No. 20)Buddhist Publication SocietyKandy, Sri Lanka본문에 들어가기 전에우리는 이미 우리가 친숙해져 있는 삼법인(三法印)이란 말부터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Ti-dhamma lakkha.na의 옮긴 말임직한 이 용어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대외적으로 불교의 요체를 드러내는 삼대 요강(三代要綱)을 지칭한다고 한다. 특히 한문으로는 이 말의 뜻이 강하게 부각되어 문자 그대로 `법의 도장', 정법임을 인정하는 최종 결재의 도장이란 뜻이 선명하다.실제 역사적으로도 삼법인은 안으로 불교 내부를 단속하고 밖으로 시비를 가리는 기준과 잣대로 쓰여져 온 것이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이 용어는 부처님이 직접 쓰신 것이 아니며, 법인(法印)의 뜻도 전 불교계에서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이 용어가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예는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율장(律藏) 에서라고 한다. 그 내용은 제행개무상(諸行皆無常), 제법실무아(諸法悉無我), 적정즉열반(寂靜卽涅槃)으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문구와 거의 비슷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만이 순서가 바뀌어 있다.설일체유부라면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웠던 교파이며, 교세가 드세어 인도에서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이른바 소승불교의 실체이다.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남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도 유달리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삼법인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청되었음직하다. 이렇게 볼 때, 삼법인의 냉용이 왜 부처님께서 거의 정형화시켜 놓다시피 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로 나타나지 않고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지 그 곡절에 대해서도 다소 시사해주는 바가 있을 것 같다.하여튼 이에 비해 남방 상좌부(上座部) 불교에서는 삼법인이라 옮길만한 개념이 그다지 명확히 설정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Ti-lakkha a라는 용어는 논서(論書)들에서 많이 나오지만 그것이 주로 의미하는 바는 `세 가지 보편적 특성'이란 뜻이다. 구성내용도 삼법인의 경우와 달라서 경전에서 쓰여지고 있는 그대로 무상(덧없음), 고(괴로움), 무아(자아가 없음)이며 그리고 사용되는 목적도 주로 올바른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으로서이다.본문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남방불교의 특색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는 경우에 한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빠알리 논장(論藏)의 하나인 분별론(分別論) 에 대한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육신[色]에서 추함을 보는 사람은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거꾸로 아는 잘못을 그만두게 되어 감각적 쾌락의 거센 물살을 건너게 된다.감각[受]에서 괴로움을 보는 사람은 고통을 쾌락이라고 거꾸로 아는 잘못을 그만두게 되어 존재짓기[有]의 거센 물살을 건너게 된다.지각[想]과 형성력[行]에서 자아가 없음을 보는 사람은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있는 것으로 거꾸로 아는 잘못을 그만두게 되어 견해의 거센 물살을 건너게 된다.의식[識]에서 덧없음을 보는 사람은 덧없음을 항상한 것으로 거꾸로 아는 잘못을 그만두게 되어 무지의 거센 물살을 건너게 된다.존재의 세 가지 속성1. 무상(無常, anicca)삼법인(三法印) 주1 의 개념은 불교의 해탈관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삼법인이란 현상계에 속하는 모든 사물의 보편적 속성이다. 즉 이는 아니짜(anicca), 둑카(dhkkha), 아나따(anattaa)이다.아니짜란 무상, 덧없음 또는 변천성이며, 둑카란 불만스러움, 고통스러움, 괴로움 또는 아픔이며, 아나따란 무아, 영구적 자아의 부재, 혹은 비실체성이다. 참다운 통찰(위빠싸나)과 깨달음에로 이르려면 일체의 형성된 사물과 과정(상카라) 내지 모든 현상(dhamma)이 가지고 잇는 이들 세 보편적 특성을 관조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근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불법(Buddha Dhamma)이 제시하는 최고의 영적 완성을 성취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삼법인 중 그 첫째인 무상, 즉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덧없는 변천성은, 경전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교설이다. 불법에 따르면, 그것이 신이건 인간이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유기물이건 무기물이건 간에 영구불변하거나 고정 영속하는 것은 없다.모든 사물은 변천한다는 이 불교의 개념, 다시 말해 불교의 무상의 법칙은 유명한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nkhaaraa anicca)'이라는 어구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사물이나 과정이 변천 무상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연구나 어떤 신비적 직관의 결과가 아니라 관찰과 분석에 의해 도달된 체험적 판단이다.이것은 편견없는 사고에 바탕한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경험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증지부 주2 의 대품(大品)에서 세존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상카라)은 무상하며, 모든 형성된 것은 불안정하며, 모든 형성된 것은 안락과 만족의 원인이 되지 못하니 우리는 이 모든 형성된 것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넌더리를 내고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이니라."여기서 상카라(sankhaaraa, 行, 有爲)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다음의 교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비구들이여, 지금부터 수십만 년 후에 제2의 태양이 출현하면서 그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비가 내리지 않게 되고, 모든 초목이 시들어서 말라죽고 냇물과 작은 강들이 말라붙는 때가 올 것이다. 또 제3의 태양의 출현과 더불어 갠지스나 야무나와 같은 큰 강들도 말라버리고, 모든 호수뿐 아니라 큰 바다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메로 같은 큰산, 아니 이 광활한 대지마저도 거대한 우주적 대참극 속에 김을 뿜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불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듯 모든 형성된 것(상카라)은 무상하며 불안정하며, 안락할거리가 못되니, 그 무상한 본성을 성찰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이 가르침을 미루어보아 `상카라'라는 말이 얼마나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카라'란 말은 자연스럽게 발전 또는 진화한 결과로 존재하게 된 모든 사건, 모든 현상을 다 포괄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조건지워져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조건지워지면서 언젠가는 끝이 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사라져가게 될 운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다.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존재(being)란 없고, 다만 끊임없는 생성(bhava, becoming, 有)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이전의 원인들이 빚어내는 소산이며, 따라서 의존관계에 의해 생겨난(Paticcasamupanna, 緣已生) 산물이다. 이전의 원인들 자체도 영속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독같이 부단하게 생성되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시간적으로 단지 앞서는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적 과정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해야 하며, 창조되거나 형성된 모든 것은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뜻이지 그 자체의 성질 외에 바깥에 있는 제3의 그 어떤 힘에 의해서 창조·형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불교에선 일체 사물을 `함께 형성된 것(sankhaaraa, compounded)'으로 간주한다. 이 문맥에서 `함께 또는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말은 선행적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거나, 혹은 생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이 선행적 조건, 혹은 과정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생성되었으며 또 모든 것은 소멸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상응부(相應部) 주3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성되어진 모든 것은 사라질 성질의 것이다.' 이 법칙은 미물에 대해서나 대범천(大梵天)과 같은 최강의 신에 대해서나 똑같이 적용된다. 장부(長部) 주4 의 열한번째 경에서는 범일천망정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리스 데이비스 교수 주5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사물이건 사람이건 한 개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변과 별개로 불거지게 되었다는 뜻이며, 일단 주변으로부터 퉁겨나면, 불안정하고 일시적이어서, 반드시 사라져가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천신들의 경우에 삼십만 년을 살수도 있으나 어떤 곤충의 경우엔 단지 수시간을, 그리고 어떤 화학물질의 경우엔 단지 수초간밖에 지속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시작이 있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종말은 시작되는 것이다."〈American Lectures〉에서이 무상법의 윤리적 의의는 장부 의 열일곱번째 경인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 Mahaa-Sudassana Suttanta) 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 아난다에게 과거의 유명한 왕인 대선견왕의 영화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가 소유했던 많은 도시와 보물, 궁전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많은 코끼리와 말과 수레, 여인 등을 거느렸으며, 그가 이룩한 제왕으로서의 위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죽는 광경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으신다."보라, 아난다야. 이 모든 것(유의법)들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채 잊혀지지 않았느냐. 이렇듯 아난다야, 모든 상카라, 유위의 현상계는 무상하구나. 아난다야, 상카라는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아난다야, 이것만 봐도 그러한 상카라에 대해 염증을 내고, 넌더리내어,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부처님께서 모든 형성된 사물과 조건지워진 과정들을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했을 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신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 특수한 과정들의 무더기(sankhaarapu~njaa)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일차적으로 해탈의 길을 제시한 대상이 바로 인간이었으며, 그런 점으로 보아 그 분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되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요문제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알아내는 일이었으며 불법의 놀라운 독창성도 바로 이 분야에서 이룬 위대한 발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처님의 결론은 무상에 대한 일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즉, 인간이란 몇 가지 요소들의 복합이며 지속적인 인격체로 보이는 것도 실은 간단없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의 집합으로 사실 하나의 지속적 생성(bhava)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님은 인간을 물질성[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력[行], 의식[識]의 쌓임[五蘊]으로 분석하였다. 세존께서는 거듭거듭 경전에서 이 각각의 쌓임들이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임을 역설하셨다. 장부 가운데 유명한 대염처경(大念處經, Mahaa- satipa.t.thaana Sutta) 에서 세존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범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본성을 가진 것임을 관(觀)하도록 가르치신다."물질성 주6은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비롯되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다른 네 쌓임, 즉 느낌 주7, 지각 주8, 형성력 주9, 의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사실, 영적 삶의 최고 극치는 여서 가지 감각적 접촉영역[六入]의 허망한 성질을 올바로 인식한 결과로 온다고 한다. 중부 의 백두번째 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실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구경평화에 이르는 온전한 길이니 여래는 이에 대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던 것이니라. 그것은 바로 감각적 접촉의 여섯 영역에 대한 여실(如實)한 이해이며, 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그들의 평안함과 고통스러움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집착없이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다."( 중부 ,Ⅱ. 237)윤회를 연속시키는 원인, 달리 표현하면, 생성(bhava)을 지속시키는 것은 이들 여섯 가지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이며, 그래서 이들이 유위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위법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빠알리어 경전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실로 모든 형성된 사물은 생성, 소멸하게 마련이다. 태어난 것은 죽음에 이른다. 생성의 종식이야말로 지복(至福)이니, 그것이 평화이다."2. 불만스러움(苦, dukkha)현상계의 모든 형성된 사물과 과정이 갖는 첫번째 특성인 무상성에 대해선 위에서 다루었다. 삼법인의 두번째는,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이다. 실제로 둑카(dukkha)라는 빠알리어는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이다. 영어로 번역할 경우 흔히 그것을 sorroww(슬픔), 혹은 ill(불행), 심지어 어떤 이는 pain(아픔), suffering(고통) 등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역어들은 너무 특수화되었거나, 너무 제한되었으며, 또 대개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빠알리어의 `둑카'가 뜻하는 바와 같은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게다가 남방경전에서도 이 말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소위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가 있고, 그 다음에 좁은 심리학적 의미가 있으며, 더욱 좁은 신체적 의미가 있다.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이라는 말이 선택된 것은 둑카의 일반적·철학적 의미를 가리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적어도 삼법인이라는 이 특수한 맥락에서는 아마도 가장 적합한 역어라고 생각한다.일부 불교 저술가들이 뭐라고 말했건, `둑카'란 사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본질적 개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신 후 행하신 첫설법에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개념을 정형화시키셨다."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중 고성제이다. 태어남이 고9苦)이고, 늙음이 고이고, 병이 고이고, 죽음이 고이고,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고이다. 싫은 것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그것도 고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그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집착에 근거한 이 `나'라는 오온 덩어리[五取蘊]가 바로 고이다." 상응부 ,Ⅴ, 357쪽(P. T. S.영역본)`불만족성'이라는 보편적 사실에 대한 이와 같은 관찰이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선포하신 영적·도덕적 향상체계의 중심축이라는 것은 편견에 젖지 않은 불교연구가라면 누구나 곧 깨달을 것이다.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경험의 시작과 지속과 종말 ― 이것이 중생의 전 세계(loka)인데 그 경험의 중심은 그 자신의 개체성[名色], 다시 말해 그 개체를 구성하는 오취온(五取蘊) 주10 이다. 이 개체성의 가시적 근거가 신체인데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이 신체는 지, 수, 화, 풍의 네 기본 요소 주11 로부터 도출된 물질적 구성요소들의 산물이다. 그래서 신체를 두고 사대로 구성되었다하며 따라서 사대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이라고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대(지, 수, 화, 풍)의 보편적 특성은 무상성이며,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굳이 많은 학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둑카를 이해하기 위해선 무상의 이해가 전제되는 만큼 사대의 무상에 대해 조금 더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물의 요소가 맹렬하게 기세를 부릴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흙의 요소가 사라질 것이니 그것의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괴, 변천할 것이다. 또한 물의 요소가 말라버려, 단 한 치의 땅을 덮을 물도 바다에 남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때엔 이 물의 요소가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괴, 변천할 것이다. 불의 요소가 맹렬히 일어나서 모든 지표를 삼키고 더이상 집어삼킬 것이 없을 때야 비로소 그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날엔 이 불의 요소가 그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파괴될 것이다. 바람의 요소가 맹렬하게 일어나 촌락과 도시와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마침내 스스로 기운이 빠져 쓰러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날 이 바람의 요소는 그것의 덧없는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무너져 파고. 변천할 것이다."( 중부 ,Ⅰ, 187)그러므로 네 가지 기본요소에 포함되는 모든 것은 보편적인 무상의 법칙에 종속됨을 보여주며, 이 네 기본요소의 파생물인 육신도 그 기본 구성물과 동일한 운명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간단히 추리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선 계속하여 육신과 감각기관에 기반한 우리 개체의 나머지 구성요소들의 무상성, 혹은 변천성을 밝히신다."비구들이여, 육신(물질성)은 무상하다. 그리고 육신을 생성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四大] 역시 무상하다.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성된 것이 육신일진대 어찌 그것이 영구할 수 있겠는가? 감각과 느낌은 무상하며, 이들을 생성하는 토대가 되는 것, 즉 신체에 의존한 감각기관도 역시 무상하다.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감각과 느낌일진대, 어찌 그것이 영구할 수 있겠는가?마찬가지로 지각과 형성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이 무상한 것으로부터 생기(生起)한 것이며 따라서 무상할 수밖에 없다."( 상응부 ,Ⅲ, 23)모든 것에서 생성과 변천과 소멸을 관찰할 수 있다. 개체를 이루는 그 모든 것의 이와 같은 무상한 성질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그들은 덧없고 본질적으로 비지속적이기 때문에 만족스런 경험을 위한 근거가 되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바로 그 무상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다(yad aniccam tam dukkham. 상응부 ,Ⅲ, 22). 그러므로 모든 인격체 또는 개체 (그것이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 세상 또는 저 세상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리고 개체성에 의존할 뿐인 저 모든 경험 세계 등 모든 것은 결국 불만족스러운 것이라는 불교의 진리가 확립된다."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육신은 영원한가, 아니면 무상한 것인가?""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상합니다.""그러면 무상한 것, 그것은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지 못한가?""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 지각, 형성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은 영원한가, 무상한가?""그것들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그러면 무상한 것, 그것은 만족스러운가, 만족스럽지 못한가?""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그래서 이 보편적 불만족성은 모든 경험 세계의 전반적 특성으로 간주되며, 여기서 둑카의 성스러운 진리[古聖諦]가 성립된다. 이지적인 사람에겐 이 모든 이야기가 자명한 것으로 들릴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민족이 불교의 기본원리를 이루는 이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관심조차 가지려들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좀더 깊이 탐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마음의 소관이기 때문이다.중생의 심리는 즐거운 것은 추구하고 즐겁지 못한 것은 피하게 마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을 앞에서 사용하던 어휘로 표현하자면, 중생은 자기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좇아가고 불만족스러운 것으로부터는 뒷걸음쳐 물러난다. 불교 비판가들은 유정물의 모든 심리가 즐거움의 여부에 그처럼 강력하게 지배당한다고 규정할 확실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을지 모른다. 이러한 분들에 대해서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도 부처님과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사실을 잠시 상기시켜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프로이트는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라는 그의 유명한 논문을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정신분석학적 견해로는 우리는 정신병적 사건이 취하는 경로가 쾌락의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통제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사건들의 경로는 반드시 불유쾌한 긴장에 의해 발단되며, 그 최종적 결과는 그 긴장의 완화, 즉 불쾌의 회피 내지 쾌락의 도출과 일치하는 쪽을 취한다고 우리는 믿는다."이렇게 해서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과정 연구에 그가 `경제적' 원리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하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같은 원리를 거의 똑같은 용어를 써서 공식화하였다는 것은 인류 사상사를 통해 주목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그런데 만일 인간이 본성상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한 것을 피하려는 자신의 무의식 과정에 의해 추동(推動)된다면, 자신의 모든 경험을 무상과 괴로움으로 규정하는 철학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직후에 이 보편적 괴로움에 관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극히 소수뿐 일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불만족스러움'에 대한 이 간략한 해설을 매듭짓기 전에 한 가지 점만은 꼭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즉 `만족스럽지 못함'의 실상이 그처럼 보편적인 특성이라면 불교는 별수없이 비관주의를 표방하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하는 의구심에 대해서이다.그런 견해가 전적으로 그릇된 것임은 경전 자체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사물을 보는 데는 낮은 관점과 높은 관점의 두 관점이 있다. 낮은 세속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경험세계, 즉 감각과 느낌의 영역[수, vedanaa]에는 즐겁거나 행복한 느낌[樂受], 불쾌하거나 불행한 느낌[苦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성적 느낌[不苦不樂受]이 있다.모든 개인적 경험에 두루 적용되는 낮은 차원의 상대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있어 개인적 및 환경적 조건에 따라 서로 우열의 도는 다르겠지만, 세상에는 `불행'과 마찬가지로 소위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느낌을 더 깊이 검토해보면, 이 세 가지 유형의 경험들 사이엔 반드시 공통분모가 있다. 즉, 이 세 종류의 경험이 모두 무상 혹은 변천이라는 보편적 속성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리불은 세존께 만일 감수의 본성에 관해 질문받으면 이같이 답해도 괜찮겠는지 묻는다."감수와 느낌에는 정녕 세 가지가 있으니, 벗이여, 즐거움, 괴로움,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것의 세 가지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험은 모두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무엇이나 둑카를 야기시킨다고 알 때 그들 대상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마지막 문장에서의 `둑카(dukkha)'는 본절의 서두에서 언급한 철학적인 넒은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에 대해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사라불의 말을 흔쾌히 수긍하셨다."잘 말했다. 사리불이여, 잘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러한 질문에 요령있게 답하는 정확한 방법이다. 감수된 것은 어떤 것이든(무상한 것이며) 모두 둑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yamki~nci vedayitam tam dukkhasm-im)." ( 상응부 ,Ⅱ, 53)윤회세계의 모든 경험은 이러한 의미에서 `감수된 것(vedayita)'이며 따라서 윤회세계의 모든 생성을 고차의 관점에서 볼 때엔 둑카, 즉 불만스러운 것이라는 의심할 나위없는 대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또한 확고부동한 불교의 낙관론, 즉 윤회세계의 고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고, 절대적 평화와 적정(寂靜)의 안식처가, 다시 말해 열반의 절대 행복이 있다는 대긍정 역시 이 둑카의 명제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열반은 궁극의 행복이다(nibbaanam paramam sukham)."3. 무아(無我, anattaa)무상과 불만족성이라는 두 법인에 대해 이상과 같이 논의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무아' 혹은 `무실체성'이라는 불교의 기본적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개념은 불교의 모든 기본적 사상 가운데서 가장 말썽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는 것이며, 수많은 주석가나 학자, 비판자들에 의해 구구한 해석이 전개되어 왔다. 서양의 불교학도들에겐 이른바 `무아설'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창의력과 번쇄한 변증능력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되어 왔지만,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들 사이에서나 심지어는 동일 저자의 여러 저작 속에서도 첨예한 모순을 노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적 불교권의 여러 학파간에서도 이 개념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필자의 견해로는 이들 해석자들이 가장 애를 먹게 되는 주된 원인은 `자아(attaa)' 라는 낱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결여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한다. 사실 저술가들이, 특히 서양의 저술가들이 `아따(자아)'에 대하여 별다른 개념정의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불교연구에 착수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익숙한 유신론 주12 적 혹은 범신론 주13 적인 철학이나 종교체계로부터 빌어온 `영혼'이니 `에고'니 하는 개념만으로 무장한 채 무아설에 대한 논의로 뛰어든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선 그러한 해석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다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강조하고자 할뿐이다. 즉, 남방경전에 나오는 `자아(atta)'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 성행하던 여러 가지 역사적인 개념들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특수한 맥락을 검토하는 가운데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삼법인 중 세번째로 모든 사물[一切法]의 보편적 특성(sabbe dhammaa anattaa)을 표현하여 `아나따(anatta)'라는 형용사가 사용된 맥락에 한정짓고자 한다.앞의 두 절은 모든 형성된 사물과 과정들의 무상성과 그리고 이들로부터 나온 이른바 오취온의 일반적 불만족성을 다루었으며 특히 후자에서는 쾌, 불쾌, 불쾌도 쾌도 아닌 셋으로 나뉘는 감정이나 느낌을 다루었다. 그리고 일반적 불만족성[苦]이라는 두번째 특성은 무상성이라는 첫번째 특성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것임을 밝히고자 관련된 경문을 인용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모든 경험의 일반적 불만족성의 필연적 결과로서 삼법인의 세번째 진리에 대한 자각, 즉 모든 물질적·정신적 상태와 현상의 보편적 특성이 바로 `무아'임을 깨닫게 되는가를 밝힐 계제가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자."비구들이여, 물질적 형태[色]는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어느 것이나 불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다. 그리고 무아인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똑같이 정밀한 논리가 개체를 이루는 다른 제 가지 부류, 즉 느낌과 감수[受], 인식과 지각[想], 심리적 과정과 반사작용[行], 마지막으로 개인의 의식자체[識]에도 차례로 적용된다. 특히 무아의 보편적 특성을 마지막으로 의식에 적용한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이룬다. `vi~n~naa.na(의식)'라는 빠알리어가 유정물의 가장 내면적인 심적 경험까지 포함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부처님께서 생각하셨던 `무아'의 특성이 어떻게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엄정한 구속력을 지닌 개념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부처님 이전이건 이후이건 철학자들이 생각해낸 가장 세련된 자아 혹은 에고라는 개념은 어떤 식으로건 또 어떤 점에서건 자의식, 즉 `나는 나이다'라는 의식상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부처님의 경우 이 자의식 또는 `나라는 생각(I-ness)'조차도 무상성과 불만족성이라는 불가항력적 특성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특성들에 지배되는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므로, 이 `나' 의식은 환상 혹은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형용사 `무아(anattaa)'의 중요한 의미이다.중부 의 여섯의 여섯 경(六六經, 148경) 에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나온다."만일 혹자가 눈(보는 작용)을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눈이 생하고 멸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의 생멸이 확실한 이상 눈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자아가 생멸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눈을 자아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눈은 무아임이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혹자가 형상(색 또는 보여지는 대상)을 자아라고 한다면 그것 도한 똑같은 이유로 옳지 않다. 그러므로 눈과 그 눈이 인지한 형상 모두가 무아이다. 똑같은 논리가 시각적 의식[眼識]에도 (만일 이것을 자아라고 여긴다면) 적용되며, 다시 시각적 접촉[眼觸]에도 적용된다."그러므로 눈, 그 대상인 형색,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이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이상의 넷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 결과적 느낌, 이 다섯 가지가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마지막으로 이상의 다섯과 연결된(본능적) 욕망(ta~nhaa)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과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로 인한 느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망, 이 여섯 가지 모두가 무아이다. 그리고 눈, 또는 안근(眼根)에 적용된 것이 똑같이 다른 다섯 감관[마지막 것은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mano, 意)이다]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마음이 자아라고 말해도 그 또한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마음(意), 혹은 그 대상(dhamma,法), 의식(意識), 심적 접촉(意觸), 느낌, 이 모든 것과 연결된 욕망이 자아라고 하는 주장도 허용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무아이다. 이 무아인 것들을 놓고 `이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구적 개체성, 혹은 인격체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영구적 인격체라는 견해를 지멸(止滅)시키는 길은 보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몸으로 접촉하기, 생각하기 그리고 그들에 부수되는 현상을 `나의 것'으로 간주함을 멈추는 일이다.이어서 부처님은 자아 혹은 영구적 인격체(sakkaaya, 有身)라는 견해의 윤리적 의미를 논의하신다."눈과 시각 대상을 조건[緣]으로 하여 시각적 의식이 일어나며, 이 셋 모두의 만남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느낌이 일어나며, 그것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다. 사람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을 반기고, 환호하고 움켜잡으며 열정적 경향(집착)을 일으킨다. 또 불유쾌한 느낌을 경험할 때는 괴로워하고, 불행을 느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비통해하며, 혐오감을 일으킨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 느낌의 발생, 소멸, 쾌적, 위험, 가져올 결과 등에 대해 참다운 인과적 이해를 갖지 못하여, 그로 인해 일종의 무지적 경향이 생겨난다. 따라서 먼저 쾌락적 감정의 열정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선, 또 불쾌한 감정의 혐오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선, 중립적 감정의 무지적 경향을 피하지 않고선, 무지를 버리지 않고선, 그래서 고가 일어나는 것을 발생과정에서 중단시키지 않고서는 고(苦)를 지금 여기서 종식시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각에 대하여 타당한 것이 나머지 다섯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이 타당하다."이와 같이 부처님은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개체[名色]의 전 발생과정을 관(觀)함으로써 자아 혹은 영속적인 인격체의 개념을 분석하고 나아가서 이 그릇된 오류를 발생시키는 원천인 경험 전체를 그 구성부분 하나 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분석토록 제자들에게 훈계하신다.이상의 서술에서 무상, 고, 무아의 세 개념, 즉 삼법인이 불교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밑받침하는 세 추춧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삼법인의 타당성을 확신하게 되면 이는 곧 불법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되며, 따라서 이 확신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는 어중간한 타협점이 있을 수 없다. 불교도를 자칭하는 사람이며, 누구나 주관적·객관적 양면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 세계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는 것이 마땅하며, 또 세존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적 원리를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마침내 이 세 가지 인(印)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의 영원한 희열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삼법인(三法印)― 빠알리 경전에서 선집(選集) ―1. 무상(無常, anicca)무엇이건 시작이 있는 것은 다 끝이 있게 마련이다.( 중부 , 56경)비구들이여, 물질성(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력(行), 의식(識)의 그 어느 것도 영구하고 영속하고 영원하고 불변성이어서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것은 없다.그리고서 세존께서는 조그만 쇠똥덩이를 집어들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만큼만이라도 영구적이고 영속하며, 영원하고 불변성이어서 언제까지나 그대로인 개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괴로움의 완전한 근절을 위한 이 청정한 생활[梵行]을 역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응부 , 22경, 96)여기 한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에서 다음과 같이 생성과 소멸을 관하고 있다. 즉 "이러한 것은 물질성이고, 이러한 것은 물질성의 발생원인이고, 이러한 것은 그것의 사라짐이다." (나머지 네 가지 집착의 무더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한다.) 이러한 집중[定]을 닦으면 번뇌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장부 , 33경)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은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들은 견고하지 않다.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안락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일체의 형성된 것들에 대해 몹시 싫증을 내어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증지부 ,Ⅶ, 62)자, 비구들이여, 느낌, 지각 그리고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일어남을 알고, 그것들이 지속되고 있으면 그 지속됨을 알고, 사라지면 그 사라짐을 안다. 이러한 집중[定] 주14 을 닦으면 마음챙김[正念] 주15 과 충분한 알아차림[正知] 주16 에 이르게 된다.(장부 , 33경)자,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마음을 챙기어[正念]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알아차리어[正知] 전심전력하여 자기제어를 하며 머물고 있는데, 만일 즐거운 느낌이 자기 속에 일어나면, 그는 곧 알아차린다. 이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기인한 것이지 제멋대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무엇에 기인하는가? 이는 몸뚱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 몸뚱이는 무상하며, 형성되어진 것이며,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무상하고 형성되어졌으며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 몸뚱이에 기인하여 일어난 이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영구할 수 있겠는가?이와 같이 그는 몸과 즐거운 느낌에서 무상을 관하며 머문다. 그는 몸과 즐거운 느낌에서 붕괴를 관하며,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문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비구의 마음 밑바닥에 숨어있는 몸에 대해 또 즐거운 느낌에 대해 갈망하는 경향을 버리게 된다.마찬가지로 그가 즐겁지 못한 느낌을 관하고 있을 때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겁지 못한 느낌에 대해, 마음 밑바닥에 숨어있는 저항하는 경향을 버리게 된다.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관하고 있을 때에는 몸에 대해 또 그런 느낌에 대해 마음 밑바닥에 숨어있는 무지하려는 경향 주17 을 버리게 된다.( 상응부 , 36경, 7)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무상한 눈(그 외 다른 감각기관)을 무상하다고 볼 때, 그는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이다.( 상응부 , 35경, 155)비구들이여, 의식[識]은 두 가지에 의존하여 존재를 얻게 된다.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눈과 보이는 대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에 의존하여 눈의 의식[眼識]이 일어난다. 눈은 무상하고, 변화하고 있으며,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보이는 대상도 무상하고, 변하고 있으며,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유위법계의 덧없는 방랑자들인 이 둘인 모두 무상하고, 변하고 있으며,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눈의 의식'도 무상하고, 변하고 있고,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눈의 의식'이 생겨나는 원인과 조건 즉, 눈과 보이는 대상이 무상하고 변하고 있고 딴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렇듯 무상한 조건에 의존해서 생겨난 눈의 `의식'이 어떻게 영구할 수 있겠는가?다시 이들 세 무상한 것들이 일치, 협력, 합세하는 것을 접촉[燭]이라 부르는데, 눈의 접촉[眼燭]도 역시 무상하고 변하고 있고,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무상한 조건에 의지하여 생겨난 `눈의 접촉'이 어떻게 영구할 수 있겠는가?비구들이여, 접촉되었기에 느끼고, 접촉되었기에 가리고(선택하고), 접촉되었기에 지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느낌, 가림, 지각) 법들 역시 덧없고 방랑하는 것이어서 무상하고 변하고 있고 딴 것이 되어가고 있다.그리고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개념의 짝들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상응부 , 35경 93)비구들이여, 거듭거듭 무상에 대한 인식[無常想無常觀]을 닦아 이로써 마음이 가득 찬 채 머물고 있는 비구는 이득, 존경, 명성으로부터 물러서고, 거부하고, 돌아서게 되며 결코 그쪽으로 뻗지 않나니, 마치 불 위에 던져진 닭의 날갯짓이나 힘줄조각이 오므라들고 거부하고 돌아서게 되며 결코 뻗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상응부 , 7, 46)`내가 있다'라는 아만(我慢)을 근절시키기 위해선 무상에 대한 인식을 닦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상을 인식하는 사람에겐 무아의 인식[無我想]이야말로 아만을 뿌리뽑아 지금 이 자리에서(here and now) 열반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흥어 , 4, 1)(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도 공덕이 크지만, 확고한 신심으로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五戒)를 지닌 공덕은 더욱 크며… 이것도 공덕이 크지만, 미약한 대로 자비의 향기를 한줄기라도 더 피우려 노력하는 공덕은 더 크다. 이것도 공덕이 크지만, 손가락을 한 번 퉁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무상에 대한 인식을 닦는 공덕은 보다 더 크다.( 증지부 , Ⅳ, 20)백년을 살면서도 생과 멸을 보지 못하느니 단 하루를 살아도 생과 멸을 보는 삶이 낫다.( 법구경 , 113)다음 여섯 가지 이로움을 헤아릴 줄 알면 그 비구는 어떤 형성된 것[諸行]을 대하든지 거기서 무상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닦을 수가 있다. 그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모든 형성된 것들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된다. 나의 마음이 어떤 세계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않게끔 된다. 나의 마음이 모든 세계를 넘어서게 된다. 나의 마음이 열반을 향해 기울게 된다. 나를 (윤회세계에) 묶어놓고 있는 족쇄들이 사라져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내가 최상의 사문의 길을 걷게 된다."( 증지부 , Ⅵ, 102)"생명, 존재, 기쁨, 고통단지 이것들[法]만이 결합하네한 심찰나(心刹那) 주18 동안.그러나 찰나는 휙 지나가네.신들은 장장팔만사천 겁을 산다지만,그들도 단 두 심찰나를 똑같은 상태로는 못 머무네.생자든 사자든 저들의사라져버린 구성더미[五蘊]는모두 한결같이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네.이제 곧 아니면 장차흩어지게 될 저들도벌써 사라진 그것들과다른 점이라곤 전혀 없네.의식[識]이 생겨나지 않으며아무 세계도 나타나지 않고의식이 있는 이상세계는 살아있게 마련.`의식이 사라질 때세계도 사라진다.'개념이 가 닿을 수 있는가장 뜻깊은 이 높은 말씀!사라진 것은 저장되지 않으며미래가 축적되지도 않는다.지금 생겨난 것도 위태롭기송곳 끝에 올려진 겨자씨 같네.해체는 탄생 때 이미운명지어진 것이라.현존하는 것은 쇠잔하여 가네지난 것들하곤 상관없이.저들은 어디서 오는 것도흩어져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네.번쩍 나타났다 사라질 뿐마치 하늘의 번개처럼."( 청정도론 , 20장)깊숙이 한적한 곳에 들어가고요한 마음이 된 비구는,올바른 법(진리)을 관(觀)하며이 세상의 것 아닌 기쁨을 누린다.그가 (다섯) 구성더미의생과 멸을 올바로 관할 때그의 마음은 기쁨과 열락을 누린다.그는 불사(不死0를 보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 , 373-374)모든 형성되어진 것들은 덧없다.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이 그들의 법생겼나하면 벌써 사라진다.생멸을 멈추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장부 , 16경)2. 불만스러움(苦, dukkha)나는 오로지 이것만을 가르친다.괴로움[苦],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을( 중부 , 22경)괴로움은 반드시 어떤 것이 일어날 때에만 일어난다.괴로움은 반드시 어떤 것이 소멸할 때에만 소멸한다.( 상응부 , Ⅶ, 15)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본래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 형성물일 탓의 괴로움.육체적·정신적으로 아픈 느낌들은 본래의 괴로움[苦苦, dukkha-dukkha]이라 부르는데 이는 괴로움이 그들의 개별적 실재이자 공통의 명칭이며, 그리고 그들의 실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다.육체적·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변화의 괴로움[懷苦, viparinaama-dukkha]이라 부르니, 이 느낌이 변할 때에는 아픔을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담담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三界)의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은 형성물임에 기인하는 괴로움[行苦, sankhaara-dukkha]이라 부르는데 그것들은 생멸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6장)즐거운 느낌은 지속할 동안은 달고, 변할 때는 쓰다. 괴로운 느낌은 지속할 동안은 쓰고, 변할 때는 달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지혜가 있을 때는 달고, 지혜가 없을 때는 쓰다.( 중부 , 44경)유쾌함을 가장한 불쾌한 것이사랑스러움을 가장한 혐오스러운 것이행복을 가장한 괴로움이방심하고 있는 사람을 정복해버린다.( 감흥어 , Ⅱ, 8)과거에도 감관적 욕망(kaama)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뜨겁게 타올라 불태웠다. 미래에도 또한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어 뜨겁게 타오르고, 불태울 것이다. 현재도 역시 이것은 괴로운 경험으로서 뜨겁게 타오르고 불태우고 있다.그러나 중생들은 아직도 감관적 욕망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그에 대한 갈망으로 온통 넋빠져 들뜬 열정으로 불타고 있다. 불에 타 망가진 그들의 감관은 지각이 전도되어 괴로움인 감관적 욕망을 접하면서 오히려 기쁨인 줄 착각한다.( 중부 , 75경)물질성을, 느낌을, 지각을, 형성력을, 의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실은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나는 말하고 있다.( 상응부 12경, 29)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그리고 의식의 생성과 지속과 현현은 곧 괴로움의 생성이며, 질병의 지속이며 늙음과 죽음[生死]의 현현이다.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그리고 의식의 소멸과 정지와 종식은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며, 질병의 정지며, 늙음과 죽음의 종식이다.( 상응부 , 12경, 30)비구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헤아릴 수 없다. 무명에 가려진 중생들이 갈애에 속박당하여 윤회의 길을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한 시초는 알 수가 없다.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실로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그대들이 이 긴 여로를 갈팡질팡 헤매면서, 싫은 것을 만나고 좋은 것과 떨어져서 울며불며 흘린 눈물의 양이 많겠는가, 사대양의 바닷물이 더 많겠는가.다겁생을 그대들은 부모와 아들, 딸, 형제자매들의 죽음으로 괴로움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통해 그대들은 진정 이 길고 긴 여로에서 사대양의 바닷물보다 많은 눈물을 진정 흘려온 것이다.그렇듯, 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묘지를 가득 메운 그 고통을 그 불행을 오래오래 겪어온 것이다. 이제 그대들은 겪을 대로 겪었으니 모든 형성된 것들에 염오를 느낄 때가, 탐욕을 버릴 때가, 그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상응부 , 15경, 3)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요. 어찌 웃음이 있으리요.세상은 끝없이 타오르고 있는데암흑(무지)에 싸여있는 그대여어찌 등불을 찾지 않느뇨?보라, 여기 이 꼭두각시를. 겉은 번드레하지만,온갖 상처로 곪은 (오온의) 퇴적더미병들고 망상으로 가득 찼을 뿐,오래가지도 견고하지도 못하네.이 몸은 노쇠해진다.그 속에 병은 둥지를 튼다.썩은 육신은 마침내 산산이 흩어지니산다는 것이 겨우 죽기 위해서더란 말인가?( 법구경 , 146-148)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을 모르고괴로움이 남김없이 완전히 멈추는 곳도 모르며,괴로움을 진정시키는 길도 모르는 이들.그들은 마음의 해탈 주19 지혜를 통한 해탈 주20 도못 이루었기에 끝을 맺지 못한다. 주21그들은 실로 태어남과 늙음을 겪고 있다.그러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을 알고,괴로움이 남김없이 완전히 멈추는 곳을 알며괴로움을 진정시키는 길을 아는 이들.그들은 마음의 해탈과 지혜를 통한 해탈을이루었기에 끝을 맺을 수 있다.그들은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는다.( 숫따니빠따 , 724-727)다음 여섯 가지 이로움을 헤아릴 줄 알면 그 비구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거기서 괴로움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닦을 수가 있다. 그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내 마음속에 모든 형성된 것들을 멀리하려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마치 칼을 빼어든 살인자를 멀리하듯.나의 마음이 모든 세계를 벗어나게 된다.열반에서 평화를 보게 된다.잠재해있는 (나쁜) 경향들이 나에게서 없어지게 된다.해야 할 일을 다하게 된다.그리고 사랑과 친절의 마음으로 스승을 잘 섬긴다.( 증지부 , 6, 103)3. 무아(無我, anattaa)비구들이여,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을 버려라. 그것을 놓는 것이 그대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그러면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그리고 의식, 이것들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이며, 이것들을 그대들은 버려야 한다. 그것들을 놓는 것이 그대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상응부 , 22경 33)여러 방식을 자아를 생각하고 있는 저들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섯 무리를 자아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중에 어느 것을 자아로 생각한다.다섯이란 어떤 것들인가?비구들이여, 여기 무지한 범부들은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또는 의식을 자아라 생각한다. 아니면 자아가 이들 무리 중의 어느 것을 소유한다고 또는 그 무리가 자아 속에 포함된다고, 또는 자아가 그 무리 속에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 상응부 , 22경 47)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어떤 법(法, dhamma)을 자아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부 , 115경)많이 배워 고귀한 법을 아는 성스런 성문 주22 은 선지식의 법에 숙달되어 물질성,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을 자아로 보지 않는다. 또한 자아가 이들 무리의 소유자라고도, 또 이들 무리가 자아 속에 내재한다고도, 또는 자아가 이 무리 속에 내재한다고도 보지 않는다.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많이 배운 성스런 성문은 물질성(그리고 나머지 네 가지)의 결박에 속박당하지 않으며, 안팎의 어떤 결박에도 속박되지 않아 피안을 보고 피안에 이르러, 마침내 괴로움에서 해탈한다고 나는 말하노라.( 상응부 , 22경 117)계행 주23 이 청정한 비구가 다섯 집착더미의 무상함을, 괴로움임을, 아픔임을, 종기임을, 화살임을, 병임을, 고뇌임을, 남[他]임을, 궤멸임을, 공(空)임을, 무아(無我)임을 올바로 사유하면 예류과(豫流果)를, 일래과(一來果)를, 불환과(不還果)를,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수 있다.( 상응부 , 22경 122)누구든 자신을 눈과 동일하다고 상상(아만)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눈 안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되며, 눈 밖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또 `눈은 나에게 속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 귀, 코, 혀, 몸 그리고 생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누구든 자신을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 주24 과 동일하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그것들 안에 내재한다거나, 밖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 `그들이 나에게 속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 누구든 자신을 눈의 의식[眼識] …귀의 의식[耳識] …코의 의식[鼻識] …혀의 의식[舌識] …몸의 의식[身識] …마음의 의식[意識]과 동일하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의식의 안에 내재한다거나 바깥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되며, `의식이 나에게 속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누구든 자신의 모든 것(sabbam)과 동일하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모든 것 안에 존재한다거나 바깥에 존재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되며,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고 상상해서도 안된다.이처럼 더이상 상상을 않는 현명한 제자는 세상의 어떤 일에도 집착을 않게 된다. 어떤 것에도 더이상 집착하지 않기에 그는 불안에 떨지 않는다. 더이상 떨지 않기에 그는 그 몸 그대로인 채 모든 아만이 떨어진 자리에 이르게 된다."다시 태어나는 일은 이젠 없다. 성스런 삶을 살았고 해야 할 일은 다 했다."이와 같이 그는 깨닫는다.( 상응부 , 35경 90)못 배운 범부는 차라리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육신을 자아로 대할지언정 마음을 자아로 대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육신은 한 해, 두 해, … 아니 백 년도 지속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가 `마음'이니 `생각'이니 `의식'이니 하고 부르는 이것은 밤낮없이 다르게 나타나서는 변하여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응부 , 12경, 61)의식(識)은 자아가 없다. 의식 발생의 원인과 조건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다. 하물며 자아가 없는 것을 통해 생겨난 의식이 어떻게 자아일 수 있겠는가?( 상응부 , 35경, 141)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다음의 여섯 가지 이로움을 헤아릴 줄 알면, 모든 사물에서 무아의 법을 남김없이 통찰하기에 충분하다. 무엇이 여섯인가?모든 세계로부터 초연해진다.`나'란 견해[我慢]가 나에게서 부서져 나가게 된다.`내 것'이라는 견해가 나에게서 부서져 나가게 된다.특출한 지혜를 골고루 갖추게 된다.(모든 법의) 원인들을 잘 분별하게 된다.그리고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들을 잘 보게 된다.( 증지부 , 6경 104) 주해1) 법인(法印) : 현상계 및 존재의 속성 또는 특질, 정법을 확인하는 표지.2) 증지부(Anguttara Nikaaya) : 법수를 따라 모은 경집.3) 상응부(Samyutta Nikaaya) : 짧은 경들을 내용별로 모은 경집.4) 장부(Diigha Nikaaya) : 비교적 장편에 속하는 경들을 모은 경집. 빠알리경에는 앞서의 증지부 , 상응부 , 장부 이외에 중부 와 소부 가 있어 5니까야(Nikaaya)로 이루어진다. 중부(Majjhima N.)는 중간 길이의 경들을 모은 경집. 소부(Khuddaka N.) 는 기타 15경집들로 구성되는 데, 법구경, 숫따니빠따, 감흥어, 여시어경, 장로게, 장로니게, 본생경 등 중요한 경들이 이에 속해 있다.5) 리스 데이비스 : 영국의 언어학자이며 불교학자. 법륜·하나 부처님 그 분 주해참조.6) 물질성 : rupa. 色. 영어에서는 corporeality(유형적 성질), materiality(물질성), form(형상), visible object(가시적 대상), body(몸) 등이 경우에 따라서 쓰여지고 있다.7) 느낌 : vedanaa. 受. 영어에선 feeling, sensation.8) 지각 : sa~n~naa. 想.영어에서도 perception으로 거의 통일되었다.9) 형성력 : sankhaaraa. 行. 번역에 가장 고충을 겪고 있는 낱말 중의 하나이다. formation, volitional effort 또 특수한 경우란 뜻에서 function으로도 번역되고 있다. 복수로 쓰일 때는 formations 외 all phenomena란 말을 쓰기도 한다. the world of phenomena, all the things of this world 등의 말을 쓰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앞의 본문에서 formations와 dynamic processes의 두 용어를 경우에 따라 구사하고 있는데 후자는 `업력(kamma formations)'이란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 역문에서는 단수의 경우 `형성력' 복수의 경우는 `모든 형성된 것들'이란 용어를 썻다.10) 오취온 : 오온이 범부와 유학(有學)에게는 집착의 대상이 되므로 오취온이라 부르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일체 집착을 여읜 사람에게는 단지 연기생멸하는 법으로 보일 뿐 집착의 대상이 아니되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른다.11) 사대(四大) : 물질성을 구성하는 고체[地]·액체[水]·열기[火]·기체[風]의 네 성질.12) 유신론(有神論) : 변화 생멸하는 세계를 초월한 인격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입장.13) 범신론(汎神論) : 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입장.14) 집중(samaadhi, 定) : 영어에선 absorption 등이 쓰이다가 concentration으로 통일되고 있다. 삼매, 집중, 선정 등으로 옮기고 있다.15) 마음챙김(sati, 念) : 영어에서는 mindfulness로 통일되어 가고 있다. 우리말에선 아직 자리잡은 낱말이 없다.16) 충분한 알아차림 : sampaja~n~naa, 한문에서도 正知, 正智, 正心 등으로 옮기고 있으며 영어에서는 full awareness, self possesion, attention 등 구구하다.17) 무지하려는 성향(avijjaa-anusaya, 無明使) : 무지한 채로 있거나 더 무지해지려는 무의식적 경향.18) 심찰나 : 인식 과정에 작용하는 미세한 기능이 소요하는 시간. 대단히 짧은 시간으로 번개섬광의 10억분의 1보다도 짧은 시간.19) 마음의 해탈 : 심해탈(ceto-vimutti). 고요한 마음[止]을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20) 지혜를 통한 해탈 : 慧解脫(pa~n~naa-vimutti). 통찰지[觀]를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21) 끝맺다 : 생사윤회를 끝맺다. 즉 해탈하다.22) 성문(聲聞) :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23) 계행 : 계율을 올바로 지키며 생활하고 정진하는 것.24) 법 : 의식에 의해 인식되어지는 개념 내지 상태. 행보다 더 넓은 뜻으로 일체 유위와 무위의 세계를 다 포용하는 말. [출처] 존재의 세 가지 속성, 삼법인(三法印) ― 무상·고·무아 ― The Three Signata|작성자 불교공부방 저작자표시 비영리 변경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