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간에서도 중도란 말을 많이 쓴다. 특히 정계에서 걸핏하면 중도란 말을 쓴다. 그런데 세간에서 말하는 중도는 나와 남, 아군과 적군, 이익과 손해, 진보와 보수, 부와 빈, 남과 여 등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중도에 대해 적당한 타협의 자세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는 ‘중도보수’, ‘중도진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유행한다.
첨예하게 둘로 나뉜 세간에서 어정쩡한 태도로 양쪽 모두의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회색분자들의 욕심이 가당치 않게도 중도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 바 ‘고견(高見)’을 쏟아내는 이들은 이쪽도 잘못했고, 저쪽도 잘못했다는 양비론(兩非論)이 최상의 선택인 양 호도하고 있는데 어이없게도 그것이 먹혀들어간다. 갈등을 일으킨 원인들은 그대로 덮어둔 채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왜곡하고 사회는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간에서 이해하고 있는 중도이다.
다음은 <초전볍륜경>에도 전하는 이야기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과거 함께 했던 다섯 비구(五比丘)를 찾아가 초전법륜을 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첫 번째 가르침에 중도(中道, 빠알리어 majjhima patipada)가 들어있다.
“출가자가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이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중도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다. 쾌락에 탐닉하지도 않고 고행으로 자기 학대를 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쾌락과 고행의 중간 정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이후 여러 가지 수행을 하셨다. 선정 수행도 하셨고, 특히 6년 동안 고행에 몰두한 것인데, 그러한 수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룰 수 없음을 자각하셨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수행을 던지고 택한 수행으로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바로 연기(緣起)를 깨달으셨다. 진리의 길은 오직 연기만 강조하셨을 뿐이다.
그리고 수행의 길로 중도를 말씀하셨다. 그러니 중도는 가운데 길이 아니다.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말한다. 중도를 중로(中路)라고도 하는데, 분별지(分別智)에 의한 인간의 극단적인 사고와 그에 의해서 이루어진 판단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중도(中道)’에서 ‘중(中)’은 가운데란 말이 아니라 바른, 올바른, 그런 의미이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제일성으로 오비구에게 말씀하신 중도란 깨달은 눈으로 본 구경의 진리인 만법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만법의 참모습의 내용이 중도이다.
그리고 중도에 있어서 중(中)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바른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에 있어서 ‘중(中)’이라는 것은 중생들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고 바른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무명으로 인해 나[我相]라는 관점에서 만법을 보기 때문에 유 무, 상 하, 장 단, 생 사, 선 악, 주 객, 고 락 등으로 일체를 상대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으로 본 만법의 구경의 바른 참모습은 상대적이지 않고 일체법은 이사무애(理事無礙) 하고 사사무애(事事無礙) 해서 원융무애(圓融無礙) 하다. 이렇게 원융무애한 만법의 참모습을 중도라고 한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한 수행이 아니라 바른 수행인 것이다.
그리고 위없는 지혜와 깨달음, 열반으로 인도하는 수행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팔정도마다 머리에 ‘정(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정(中正)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팔정도를 수식하는 ‘정(正)’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올바른’이라고 해석되지만 정(正)에는 ‘완전한’, ‘완성된’ 또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과 같은 의미도 내포돼 있다. 여기에 중도의 본질이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중도(中道)를 두 가지 뜻으로 말씀하셨다. 진리의 측면에서는 연기(緣起)가 중도라고 말씀하셨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팔정도(八正道)가 불교수행의 결정판인 중도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팔정도, 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계(생활),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새김, 바른 삼매이다(S56:11).”
이상에서 보다시피 부처님은 팔정도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중도라 하셨다. 말하자면, 중도는 바른 안목을 만들고, 바른 지혜를 만들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그 길이 팔정도를 닦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오근(五根)의 균형을 이루는 바른 정진과 팔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소나경(Sona-sutta-A6:55)>에서,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조여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으며, 너무 느슨하게 해도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것처럼 수행도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마음이 동요되고, 너무 느슨해지면 나태하게 되므로 다섯 가지 기능들(五根)의 균등함을 꿰뚫어 중도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이 경의 말씀에서도 적당히 중간을 택하라고 해석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여기서 오근이란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을 가리킨다. 확고한 믿음과 정진, 마음챙김, 선정, 지혜 닦는 수행을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믿음(saddha)은 지혜(paññā)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집중(samādhi)은 노력(vīriya)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억념(憶念, sati)은 지속적이어야 하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이 억념은 다른 네 기능이 제각기 목적지에 이르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 들이 모두 균형을 이룸으로써 근본 집중을 얻는다. 이와 같이 오근은 각기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중도야말로 수행자에게 있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길을 알려 준다. 중도란 단순히 어정쩡하게 중간의 길을 걸어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중도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중도는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설하신 후, 구체적으로 중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하고 계신다.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생각(念: sati), 바른 삼매(三昧: samadhi)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 초전법륜경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팔정도(八正道)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셨다. 팔정도가 바로 중도인 것이며, 이것이 열반으로 이끄는 최상의 수행인 것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그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수행의 길이다. 이것이 중도이다. 이 때문에 중도는 깨달음을 이루는 가장 바른 길(팔정도)이며,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최상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개념을 더 확장해서 해석한 것이 AD 3세기 초반 용수(龍樹, Nagarjuna)에 의해서이다. 용수는 부처님의 중도설을 좀 더 부연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와 대승불교의 용수가 말한 중도는 다소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부처님께서 고락(苦樂)을 모두 체험한 결과 극단적인 수행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체득하고, 마음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적 중도였다. 부처님은 출가 전의 쾌락도 출가 후의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고 하며, 이것을 버리고 고 ‧ 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은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에 의해서 자각하셨다. 따라서 부처님은 고 ․ 락 두 가지 극단의 길을 가서는 아니 되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중도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그리고 중도의 길은 여덟 가지 바른길이라 해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대승불교 용수의 중관사상에서 주장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이다. 그리고 중생의 견해가 상대적인 관점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주장이다. 또한 ‘중(中)’은 「무자성(無自性) - 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중도와 용수의 중도가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용수의 중도론 뿌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에 닿아 있다.
즉, 용수의 저서 <중론(中論)>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부파불교 당시 일부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에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연기설(緣起說)을 왜곡해 부처님 사상에 배치되는 주장이 더러 있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 파사현정(破邪顯正)한 것이 용수의 중도론이다.
우리는 ‘공(空)’ 혹은 ‘중도(中道)’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지금 <중도(中道)>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중도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중도를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中道)사상이다. 중도란 양끝의 중간이거나 어중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란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 때, 여러 조건들에 의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연기적 행위가 이루어져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상생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될 때 이를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한다. 즉, 쌍차쌍조(雙遮雙照) 하는 것을 말한다.
어리석은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는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즉,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공간은 무한하다 또는 유한하다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보통 한쪽에 치우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 연기적 지혜나 자비행이 아니라 비연기적 무지와 남을 해치는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비불교적인 일이다.
중도(中道)란 두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공명한 길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초월한)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한다. 즉, 불교의 중도사상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초기불교부터 근본진리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이어 대승ㆍ소승 각 교파에서도 중도야말로 불교적 진리관의 요체라는 의미에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중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번뇌 망상을 다스리게 돼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 교리는 우주의 진리이다. 그래서 세월이 변해도 진리가 변하지 않듯이 불교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점점 집착이 강해지다가보니 중도라는 것 자체에 또다시 집착을 하는 경향을 보이게 돼 여러 가지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