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에 의하면, 외적 사물에 대한 인식은 우리 자신의 내적 자발성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결국 깨달음이라는 인식의 태도가 일종의 자기 인식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자각과 불교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성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선천적인 자발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지성은 판단하는 능력이며, 이러한 지성에 의해 의식의 통일이 있어야만 모든 인식들이 우리에게 성립할 수 있다. 바로 이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불변적인 의식을 칸트는 초월적 자각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지성에 관하여 모든 직관을 가능케 하는 최상원칙이란 직관의 모든 다양이 자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이라는 조건에 따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외적 대상 혹은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오성이 그 근원이 되는 자각 작용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초월적 자각이 없고서는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표상들이 내가 생각한다 라는 자각의 작용을 통유(通有)하지 않으면 하나의 자기의식 속에 총괄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최상 목표는 보리 또는 각(覺,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깨달음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자 최고의 이상적 단계이다. 그렇다면 과연 칸트가 말한 초월적 자각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불교에서 사문들이 수많은 고통과 번잡함을 인내하며, 외적인 간섭과 제재를 감수하고서도 끝내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적 목표는 각자(覺者), 깨닫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에는 보통 점오성불론(점차적으로 각 단계를 거쳐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돈오성불론(어느 순간, 갑자기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성불이란 멀리 떨어져있는 두 바위 사이를 발딱 뛰어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후자의 주장이다. 칸트에 의하면, 직관에 의하여 주어진 다양이 결합되어서 하나의 대상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이 선험적 통각 밑에로 넣어져서 통일되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초월적 자각은 모든 가능한 직관의 다양에 종합적 통일의 원리를 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최종적이고 근원적인 인식이란 결국 우리 자신의 내적 자발성에서 유래하는 바, 이것은 결국 깨달음이라는 인식의 태도가 일종의 자기 인식에 대한 스스로의 확인이라는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깨달음에는 또한 가치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게 마련이다. 즉, 불교에 있어서 깨달음의 의미는 그 내용이 진리 또는 진실이라고 포괄적으로 표현될 때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깨우쳤음을 스스로 의식하는 일``이 되겠다. 결국 칸트에서의 초월적 자각이 모든 인식의 근원이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불교의 최고 정점, 부처(깨달은 자, 覺者)가 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