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해탈.열반

부처님 가르침에 맞닿은 ‘돈오’

도봉별곡 2021. 11. 18. 03:14

부처님 가르침에 맞닿은 ‘돈오’ /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와 선

 
3.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와 선
禪에 대한 정법 비판 반박
꼰단냐 깨달음, 돈오 사례
‘선’으로 가르침 전승 의미
​​​​​​​전법인가 전통서도 엿보여

 

부처님의 초전법륜 자리에 선 다메크대탑.

지금 인터넷에는 남방 위빠사나 수행자와 대승과 간화선 수행자들 사이에 불꽃 티는 논쟁과 격렬한 비난이 있다.

‘禪’이 과거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부처님 말씀인 경전에 근거가 없다” 라거나 “언어도단과 불립문자를 표방하니 불교의 근본 교리를 무시하고 부정한다”는 비판이다.

 

남방에서 전승된 팔리어 초기경전 <니까야>를 ‘초기불교’라 믿고 부처님 원음으로까지 신수봉행하는 입장에서는 대승과 간화선은 부처님 말씀을 모아놓은 경전에 나오지 않으니 부정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방대한 말씀을 후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수행하여 깨치고 새롭게 해석하고 결집하여 대승으로 발전시켜 오면서 남방 상좌부 전통을 소승이라 비판해온 것도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오랫동안 남방에만 전승되어 오던 팔리어로 된 〈니까야〉(한문역 아함경)가 한글로 보급되면서 이 문제는 이제 근거를 가지고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금 한국불교계에 이러한 혼란과 시비를 제대로 판별하고 결집하여 바른 수행 지침을 제시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각자의 논리와 주장만 있다. 이제 한국불교는 이것을 극복하고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 그리고 선어록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 분석하여 바른 수행 지침을 제공할 때가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팔리어 <니까야> 초기경전의 〈초전법륜경〉은 대단히 중요하다. ‘초기불교’를 주장하는 분이나 위빠사나 수행자, 나아가 대승 교학과 선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근본 경전이기 때문이다.

 

〈초전법륜경〉 ‘중도대선언’ 가치와 의미

 

부처님은 깨친 뒤 첫 설법에서 “나는 중도를 깨달았노라!” 하셨으니 이것이 중도대선언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치니 생과 사의 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와 행복을 성취하였다.

 

부처님의 깨달음 이전의 인류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짐승을 만나면 두려움에 떨었고,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나 지병에 걸리면 병고에 시달리고 죽거나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아무리 부자라도, 권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근본 문제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생로병사와 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해탈하는 중도의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생사 고해를 해탈하는 길이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었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친 중도를 알려주기 위해 다섯 수행자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녹야원에서 만나 이 중도대선언을 하셨다. 이 초전법륜은 일방적인 선언이다. 불교 경전에는 부처님이 설법을 듣는 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문답하는 대기 설법이 원칙인데, 이 초전법륜은 그러지 않고 부처님이 당신은 중도를 깨달아 생사 문제를 해결했노라 선언한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중도를 누구든지 깨치면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대자유를 누린다고 알려주신 것이다. 이것이 첫 설법이다. 그러니 부처님은 우리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중도 깨치고 금수저서 무수저 삶 살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으니 금수저 중의 금수저이시다. 그러나 아무리 금수저라도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도 그렇다. 부자도, 권력이 많은 사람도 생사 문제는 피할 수가 없다. 부처님도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생사 문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출가하여 수도하다가 중도를 깨달아 생사 고해에서 벗어났다. 생사 문제를 해결한 부처님은 왕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평생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이것은 금수저가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의 삶을 선택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어째서 금수저의 길을 버리고 무수저의 삶을 사셨을까?

 

부처님은 중도를 깨치면, 중도의 길을 가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낮은 사람처럼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당시의 인도는 극단적인 카스트계급사회로 태어날 때의 신분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 부처님은 이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대안으로 평등하고 행복한 삶의 길을 몸소 개척하신 것이다. 즉,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진 것 없이 걸식을 해도 영원한 평안과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부처님 깨달음, 중도는 인간완성의 길

 

 

 

지금까지 인류의 종교 역사에서 불교와 같은 종교는 없다. 다른 종교는 영원한 행복이나 구원을 인간이 아닌 하늘이나 신 등 절대자에게 구한다. 인간은 절대자의 피조물이나 분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종교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이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영원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 부처님은 인간이 중도를 깨치면 스스로 생사를 해탈한 절대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부처님이 깨치고 설한 중도는 인간 완성의 길이고, 인간이 곧 신과 하늘같은 절대자가 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참 위대한 분이었고, 대단한 분이었다. 그런 위대한 분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걸식과 무소유의 삶을 사셨으니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가져다 준다.

 

꼰단냐의 돈오와 선

 

부처님이 중도대선언을 하자, 첫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수행자는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중도가 곧 팔정도이며, 인간의 괴로움과 괴로움을 만드는 집착과 사라지게 하는 길인 사성제로 자세하게 반복해서 설한다.

 

이 첫 설법을 듣자마자 꼰단냐(한역, 교진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은 무엇이든 사라지는 법이다”(集法卽滅法)하며 그 자리에서 깨쳤다. 그때 부처님은 “오,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하며 깨달음을 인정하고 “안냐시(완전한 앎을 얻은) 꼰단냐”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자 안냐시 꼰단냐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제자가 되게 해달라 청한다. 이렇게 하여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가 모두 깨치고 부처님 제자가 되자, 부처님은 이렇게 설한다.

 

“여기 여섯 아라한이 있구나!”

 

이것이 부처님이 깨친 뒤 첫 설법이고 불교 역사의 시작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깨치고 생사 고해에서 해탈한 뒤 세속의 계급사회로 돌아가지 않고 대안의 평등한 수행 공동체(승가)를 만들고 중도법이 영원히 전승되게 하셨다.

 

부처님 이후 가장 먼저 깨친 이가 꼰단냐 등 오비구이다. 이 <초전법륜경>의 기록으로 보건데 꼰단냐는 부처님 법문을 듣는 중에 깨달음을 성취한다. 이것이 禪에서 말하는 말끝에 바로 깨치는 ‘언하대오(言下大悟)’이고, 단박 깨치는 돈오(頓悟)다. 가장 먼저 깨친 부처님이 두 번째로 깨친 꼰단냐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법명을 지어주는 선의 전법 인가의 전통이 부처님 당시에서 기원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남방 팔리어 <니까야>의 <초전법륜경>에서 선의 근거와 특색이 그대로 확인된다.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 중도를 깨달아 생사를 단박에 해탈하는 확철대오, 부처님의 중도 법문을 듣고 돈오한 꼰단냐, 꼰단냐의 깨달음을 전법 인가하는 부처님, 부처님과 오비구가 함께 여섯 아라한으로 세속사회의 대안으로 평등한 수행공동체를 시작하고 있다.

 

禪, 초기경전 부처님 가르침 전승하다

 

21세기 들어 남방 팔리어 초기경전이 소개됨으로 오히려 禪의 기원과 전통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첫 설법에 근거함이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지금 남방의 상좌부 승가에서 가르치는 “중생이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깨달음은 헤아릴 수 없는 생사 윤회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삼아승기겁 동안 닦아야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부처님의 초기경전에서 너무나 멀어진 견해다.

 

근래 남방 상좌부 승가의 수행을 체험하고 온 어느 전문의가 책에 다섯 번의 전생과 후생을 관찰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을 보았다. <초전법륜경>과 같은 초기경전에는 부처님 법문을 듣자마자 깨친 수많은 기록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남방 상좌부 승가의 세세생생 닦아서 생사를 해탈한다는 가르침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얼마 전 입적하신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은 “선이 불교의 정통인 세 가지 이유”를 말하면서 ‘꼰단냐의 돈오’를 그 근거 중 하나로 제시하였다.

 

성철 스님도 〈백일법문〉에서 일관되게 선의 중도와 돈오 사상이야말로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것으로 평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방의 팔리어 초기경전을 역경하여 소개한 불사는 매우 환영할 일이다. 일찍이 성철 스님이 “남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팔리어와 산스크리트 경전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늦게나마 개인의 원력으로 이러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이 참으로 고맙다.

 

다음에는 초기경전 중 〈가전연경〉에 나오는 정견과 선에 대하여 살펴보자.

 

한줄 요약

단박에 깨달음, 부처님 당시부터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