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해탈.열반

한국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비판

도봉별곡 2021. 11. 30. 08:43

한국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비판

두 학자의 깨달음 비판

최근 한국불교의 오래된 숙제인 ‘깨달음 논쟁’을 다시 끌어낸 두 학자가 있다. 신라대 사학과 조명제 교수와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다. 조명제 교수는 계간 「불교평론」이 지난 2월 26일 주최한 ‘열린논단’에서 「수행, 정말 잘하고 있는가?」란 글을 발표해 선禪에서 역사적 현실 참여의 방법을 찾아내기 어렵다며 선의 사회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성택 교수는 지난 2월 28일 화쟁문화아카데미가 주최한 포럼에서 「오만과 편견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란 글을 발표해, 한국불교의 깨달음 체험, 특권화, 깨달음 지상주의 등을 비판했다.

이 두 학자의 글이 눈길을 끄는 것은 깨달음 논쟁이 부재한 교계에서 쟁론을 일으킬 글쓰기였다는 것과 깨달음을 삶, 역사, 현실, 윤리 등의 단어와 함께 사용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한국불교의 최대 논쟁이었던 돈점頓漸 논쟁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수행방법론의 문제라면, 지금 두 학자가 주목한 것은 깨달음이 우리 삶, 윤리, 현실 등에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묻고 있다. 나아가 관계성이 부재하다면, 깨달음을 이해하는 한국불교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까지 이어간 것이다. 이는 깨달음 문제가 출가자와 학자에서 지금은 일반 불자와 대중(심지어 타종교인까지!)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깨달음

조성택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깨달음 지상주의’를 한국불교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라고 지목했다.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다는 것은 경전의 전통과 교리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깨달음이 출가중심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현대 종교환경 시대(재가자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지는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일부 특출한 수행자들만 도달 가능한 목표는 꿈 아니면 신화에 불과하기에 현실적으로 종교적 유용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이번 글에서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작동하는 또 다른 이면을 파고들어 갔다.

그가 본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다. 요컨대 서구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수입한 일본불교가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선불교 전통을 초역사적, 초문화적 어떤 ‘체험’으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의 대표적 승려인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D.T Suzuki, 1870~1966)의 선불교 해석이 일제시대 이후 한국 선불교 담론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본다. 이런 인식은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진다.

때문에 조 교수는 “만약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니, 조 교수가 보기에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되어 있다. 이 문제의 폐해는 고스란히 재가자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조 교수 생각이다. 예컨대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낮은 자존감으로 재가자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닌, 수행의 걸림돌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출가자 수행을 관전하는 관중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조 교수는 깨달음을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문제가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불교의 깨달음을 전적으로 어떤 특수한 심적 체험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일제시대 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온 영향으로 본다.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깨달음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깨달음은 스스로 또는 사회가 통상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해체하는 일이다. 주어진 의미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다.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 한국불교에 윤리가 있는가?

조명제 교수는 조성택 교수의 문제제기보다 더 급진적이며, 어떻게 보면 비관론에 가깝게 한국불교와 선禪의 깨달음을 바라본다.

조 교수가 보는 선禪은 개별 사물의 특수한 양식, 의미, 내실을 사회적, 역사적 무게로 구명究明하지 않고, 오로지 본근本根의 획득만을 중시하고 있다. 아무리 깨달음을 추구하고, 설사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복잡하고 다층적인 현실의 사태에 적절히 응하지 못하고 있다. 즉,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나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타당성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위와 같은 튼튼함, 때리면 울리는 명쾌성은 인정되어도, 그것으로부터 직접 역사적 현실에 참여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면 선의 깨달음에서는 역사적 형성 작용을 영위할 수 있는 문화적 소재와 사회적 이법의 검토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은 현실계에 있는 인간 실상의 궁극을 살피지 못하며, 윤리적 규범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런 선의 사회성, 역사성 부재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를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불교학에 둔다. 우리들이 지금 이해하는 불교는 유럽에서 생성된 문헌학 중심의 근대불교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불교학이 불교학과 불교계를 분리시켜 연구대상을 텍스트에만 두고, 역사적 현실에 대해 관심 갖지 않았기에 현실적으로 불교계가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대 이후 일본불교가 국가와 타협하고 권력과 결탁하면서 국가불교의 길로 걸어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조 교수는 더 나아가 “불교에 과연 윤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불교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계율인데, 그 자체가 출가교단의 규범이고 생활지침이므로 일반적인 윤리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출가 대중이든, 재가 대중이든 한국불교에서 윤리라고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적 규범이라는 것이다. 즉, 불교는 초월 지향적(출세간주의)이라 일상 규범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불교 윤리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 교수는 이러한 선불교의 비역사성, 불교의 윤리 부재 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불교 전통의 수행론을 새롭게 혁신하고 쇄신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라는 전통이 새로운 경전을 생성하고, 새로운 사상가와 운동을 낳아 새로운 전통이 쇄신되어 힘을 회복하고 진행되어온 역사이기에, 고전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인문학, 나아가 사회과학, 자연과학까지를 포함해 전반의 새로운 지식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불교적 담론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한국불교에서 이 가능성에 깊은 회의를 갖는다.

 

조성택 교수와 조명제 교수의 글이 깨달음과 수행전통의 전복顚覆을 제기하고 있지만, 아직 이에 대한 뚜렷한 비판이 나오진 않는다. 한국불교 내 논쟁 부재의 흐름이 오랫동안 흘러온 것도 두 교수 비판과 겹쳐보면 당연한 귀결로 이해된다. 특히 깨달음과 삶의 현실 영역은 이제 본격적인 논쟁의 큰 축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현응 스님은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불교평론」 44호)라는 글에서 무아, 연기의 세계관은 삶과 세계를 해석하는 영역이지, 세상을 변화하고 만들어가는 영역이 아니며, 실천적 삶의 전형은 대승불교가 내세웠던 보디사트바(보살)에서 찾는다. 불교를 대승의 의미로 이해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두 학자의 문제인식의 뿌리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불교인식과 수행관 등이 자리잡고 있어, 근대 이후 한국불교가 걸어온 수행과 실천을 근본부터 전면 재검토하고, 새롭게 써야할 문제다. 짊어져야 할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

[출처] 깨달음|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