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비판
한국 선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비판
두 학자의 깨달음 비판
최근 한국불교의 오래된 숙제인 ‘깨달음 논쟁’을 다시 끌어낸 두 학자가 있다. 신라대 사학과 조명제 교수와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다. 조명제 교수는 계간 「불교평론」이 지난 2월 26일 주최한 ‘열린논단’에서 「수행, 정말 잘하고 있는가?」란 글을 발표해 선禪에서 역사적 현실 참여의 방법을 찾아내기 어렵다며 선의 사회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조성택 교수는 지난 2월 28일 화쟁문화아카데미가 주최한 포럼에서 「오만과 편견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란 글을 발표해, 한국불교의 깨달음 체험, 특권화, 깨달음 지상주의 등을 비판했다.
이 두 학자의 글이 눈길을 끄는 것은 깨달음 논쟁이 부재한 교계에서 쟁론을 일으킬 글쓰기였다는 것과 깨달음을 삶, 역사, 현실, 윤리 등의 단어와 함께 사용하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한국불교의 최대 논쟁이었던 돈점頓漸 논쟁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는 수행방법론의 문제라면, 지금 두 학자가 주목한 것은 깨달음이 우리 삶, 윤리, 현실 등에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묻고 있다. 나아가 관계성이 부재하다면, 깨달음을 이해하는 한국불교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까지 이어간 것이다. 이는 깨달음 문제가 출가자와 학자에서 지금은 일반 불자와 대중(심지어 타종교인까지!)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오리엔탈리즘에 빠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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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깨달음 지상주의’를 한국불교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문제라고 지목했다.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다는 것은 경전의 전통과 교리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깨달음이 출가중심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현대 종교환경 시대(재가자의 역할이 더 커지고 중요해지는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일부 특출한 수행자들만 도달 가능한 목표는 꿈 아니면 신화에 불과하기에 현실적으로 종교적 유용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이번 글에서는 ‘깨달음 지상주의’가 작동하는 또 다른 이면을 파고들어 갔다.
그가 본 것은 오리엔탈리즘이다. 요컨대 서구 근대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수입한 일본불교가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선불교 전통을 초역사적, 초문화적 어떤 ‘체험’으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의 대표적 승려인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D.T Suzuki, 1870~1966)의 선불교 해석이 일제시대 이후 한국 선불교 담론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본다. 이런 인식은 지금 우리가 깨달음의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는 해석까지 가능해진다.
때문에 조 교수는 “만약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니, 조 교수가 보기에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되어 있다. 이 문제의 폐해는 고스란히 재가자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조 교수 생각이다. 예컨대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낮은 자존감으로 재가자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닌, 수행의 걸림돌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출가자 수행을 관전하는 관중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조 교수는 깨달음을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문제가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불교의 깨달음을 전적으로 어떤 특수한 심적 체험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일제시대 근대, 서구적 관점으로부터 온 영향으로 본다. 불교 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깨달음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깨달음은 스스로 또는 사회가 통상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신념을 해체하는 일이다. 주어진 의미를 확고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해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다.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 한국불교에 윤리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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