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해탈.열반
해탈과 열반
도봉별곡
2022. 2. 15. 12:49
해탈과 열반
불교의 궁극적 이상은 해탈(vimokkha, vimutti)과 열반(nibbāna, parinibbāna)이다. 이를 쉽게 얘기한다면 해탈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이고, 열반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의 완전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탈은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말하고, 열반은 번뇌가 깨달음을 통해 소멸되고 모든 고뇌도 사라진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1. 두 가지 해탈
불교는 ‘해탈(解脫)’을 위한 종교로 빠알리 문헌상에서 불교 수행의 목적은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성취이다. 이 해탈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선정(jhāna)의 단계와 같이 해탈의 성취 과정을 나타내는 위목카(vimokkha)로 중국에서 해탈(解脫)로 정착시켰다. 다른 하나는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어 똑같이 해탈로 옮기는 위뭇띠(vimutti)로 집중과 지혜의 작용을 나타내는 심해탈・혜해탈・양면해탈이다.
(1) 위목카(vimokkha)
아비담마에서 공한[空] 해탈, 표상이 없는[無相] 해탈, 원함이 없는[無願] 해탈의 세 가지 해탈로 나타나고, 경(經)에서는 여덟 가지 해탈(합송경 D33 §3.1 ⑾ 등)로 나타난다.
- 세 가지 해탈(vimokkha)
위빳사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행자는 수행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결심이 서고 무상(無常, anicca)이나 괴로움[苦, dukkha] 또는 무아(無我, anattā) 중 하나에 확고하게 된다. 믿음이 강한 자는 무상에 확고하게 되어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집중력이 강한 자는 괴로움에 확고하게 되어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지혜가 강한 자는 무아에 확고하게 되어 공한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한다.
『청정도론』 ⅩⅪ. 70 “확신[信解, 결심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편안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청정도론』 ⅩⅪ. 71 “여기서 ‘표상 없는 해탈’이란 표상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이다. 표상이 없는 경지[요소, 界, dhātu]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성스러운 도는 표상이 없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해탈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함이 없는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원함이 없는 해탈이고, 공한 형태로 열반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성스러운 도가 공한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ⅩⅫ. 117 “‘표상 없음의 관찰’은 바로 무상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영원하다는 표상(nicca-nimitta)을 버린다. ‘원한 없음의 관찰’은 바로 괴로움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행복을 원함(sukha-paṇidhi)과 행복을 갈망함(sukha-patthanā)을 버린다. ‘공함의 관찰’은 바로 무아의 관찰이다. 이것으로 ‘자아가 있다.’라는 천착(abhinivesa)을 버린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바로 출세간도의 해탈을 체험하는 경지로 접근하게 된다. 그것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바로 이 ‘공함, 표상 없음, 원함 없음’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해탈의 관문’이라고 한다.
-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 vimokkha]
합송경(Saṅgīti Sutta, D33) §3.1, ⑾을 보면,
① 물질[色]을 가져 물질들을 봅니다. : 어떤 대상을 일념으로 사유[想念]하여 색욕을 제거한 경계
② 안으로 물질이 없다고 인식하면서 밖으로 물질을 봅니다. :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심일경성(心一境性, ekaggatā)에 도달하는 경계
③ 청정하다고 확신합니다. : 탐심(貪心)이 일어나지 못하게 제어하여 외경(外境)으로부터 부동한 심신이 청정한 경계
④ 물질[色]에 대한 인식[(想, saññā)]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 한 허공을 생각하여 외계의 차별상을 멸한 심신(心身)이 청정한 경계
⑤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 무한한 허공과 같이 모든 차별상을 제거하여 마음 작용과 신체도 무한한 경계
⑥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 마음 작용이 무변한 경지에 도달하여 공간이나 마음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달하는 경계
⑦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 시공의 경계를 초월한 근원에 도달하여 근원처가 항상 현실로 나타나는 경계
⑧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이 그침)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 그 근원이 항상 현전하는 경지에 도달한 다함이 없는 완전한 경계
대인연 경(Mahānidāna Sutta, D15), §35, 주160을 보면,
“해탈(vimokkha)은 무슨 뜻에서 해탈이라 하는가? 벗어남(adhimuccana)의 뜻에서 해탈이라 한다. 그러면 이 ‘벗어남의 뜻’이란 무엇인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잘 벗어났다는 뜻이며 대상을 즐기는 것을 잘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잠든 어린아이처럼 거머쥐고 있지 않은 상태(aniggahitabhāva)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nirāsaṅkatā)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뜻은 맨 마지막의 [여덟 번째] 해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의 7가지에만 있다.”(DA.ii.512~13)
“‘벗어남의 뜻’은 상수멸이라는 이 마지막 [여덟 번째] 해탈에는 없다. 이 [여덟 번째 해탈에는] 다만 해탈했음의 뜻(vimuttaṭṭha)만이 적용된다.”(DAṬ.ii.153)
즉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 모두가 소멸된 경지이므로 반대되는 법들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남이라는 해탈의 뜻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해탈했음이라는 근본적인 뜻만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2) 위뭇띠(vimutti)
바른 삼매, 즉 4가지 선(禪)을 두루 닦아 그 힘으로 여러 신통지를 얻는 것을 ①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라 하고,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을 통해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②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라 부르고 있다. 이 둘을 모두 닦아 무색계선을 증득하여 해탈한 경우를 ③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i)이라 부른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1
그런데 심해탈이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청정도론』이나 주석서에서 주로 4가지 무량함에 관한 심해탈의 문맥에서 나타나고 그 대신 양면해탈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마음을 집중하는 선정(禪定) 수행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으며 선(禪)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번뇌를 멸하기 위한 위빳사나를 닦아야 해탈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닦는 자는 신통을 구족할 수 있지만 위빳사나[마른 위빳사나, sukkha-vipassana]만 닦아서 해탈한 자는 해탈하였다고 해서 신통이 구족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번뇌를 멸진하여 해탈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행법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장 §1. Ⅱ.
마할리 경(Mahāli Sutta, D6), §13, 주420을 보면,
‘마음의 해탈[心解脫]’은 ceto(마음의) -vimutti(해탈)의 역어이고,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은 pañña(통찰지의) -vimutti(해탈)의 역어이다. 본 경의 주석서에서는 간단하게 “마음의 해탈이란 마음의 청정이며 모든 오염원의 족쇄(kilesa-badhana)로부터 해탈한 아라한과의 마음과 동의어이다. 통찰지의 해탈이란 모든 오염원의 족쇄로부터 해탈한 아라한과의 통찰지가 통찰지의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고만 나타난다.(DA.i.313)
그러나 『중부 주석서』에서는 같은 문장에 대해서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로 아라한과와 함께하는 삼매가 통찰지라는 단어로 아라한과와 함께하는 통찰지가 설해졌다. 여기서 삼매(samādhi)는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해탈하였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이고 통찰지는 무명으로부터 해탈하였기 때문에 통찰지의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 ⋯ 감각적 욕망이 빛바랬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이라 하고 무명이 빛바랬기 때문에 통찰지의 해탈이라 한다. 그리고 사마타[止]의 결실(samatha-phala)이 마음의 해탈이며 위빳사나의 결실이 통찰지의 해탈이라고 알아야 한다.”(MA.ii.175)라고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편 『상응부 주석서』에서는 “마음의 해탈은 아라한과의 삼매이고 통찰지의 해탈은 아라한과의 통찰지이다.”(SA.ii.175)라고 나타난다. 여기서 보듯이 마음은 삼매의 동의어로 마음의 해탈은 삼매 혹은 사마디를 통한 해탈이고 통찰지의 해탈은 통찰지(般若)를 통한 해탈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해탈은 4선-4처의 삼매를 통한 해탈을 뜻하고, 통찰지의 해탈은 오온, 12처 등의 무상‧고‧무아를 수관하여 염오-이욕-소멸을 통한 해탈을 말한다. 주석서에서 통찰지의 해탈에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는 자(sukkha-vipassaka)와 네 선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자들로 모두 다섯 가지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DA.iii.879) 그리고 마음의 해탈이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이렇게 통찰지의 해탈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통찰지의 해탈은 단독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다.
대인연 경(Mahānidāna Sutta, D15), §36, 주167을 보면,
“양면해탈(ubhatobhāga-vimutti)이란 두 부분으로 해탈한 것이니 무색의 증득으로 물질의 무리(rūpakāya, 色身)로부터 해탈하였고, 도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nama-kāya, 名身)로부터 해탈하였다는 [뜻이다]. 이 양면 해탈은 공무변처 등의 어떤 경지로부터 출정하여(出定, uṭṭhāya) 아라한과(arahatta)를 얻는 것과 불환자가 된 뒤 멸진정(滅盡定, nirodha)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것으로 모두 다섯 가지가 있다.(DA.ii.514)
이것이 양면해탈에 대한 주석서의 정리된 설명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양면해탈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공무변처로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무색 정 가운데 하나에 들었다가 출정해서 아라한 도를 증득해야 한다. 아라한도 등의 [네 가지] 도는 반드시 위빳사나를 통해야 가능하다. 이렇게 사마타를 통해서 4무색계 선정 가운데 하나를 증득하고 위빠사나를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양면 해탈이라 한다. 그래서 “사마타를 닦음에 잘 확립된 뒤에 위빳사나로 인도함과 도로 인도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간다.”(DAṬ.ii.148)라고도 설명하는 것이다.
한편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은 「마할리 경, D6」 §13 주해에서 보았듯이 색계 4선 이하를 증득한 뒤 출정하거나 아예 선정의 증득없이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서를 통해서 보면 마음의 해탈[心解脫]은 크게 두 가지 문맥으로 설명이 된다. 첫째는 “모든 오염원과 족쇄로부터 해탈한 아라한과의 마음과 동의어이다.”(DA.i.313) 라거나 “여기서 마음이란 아라한과와 함께한 삼매이다. ⋯ 사마타의 과거 마음의 해탈이다.”(MA.i.164~65)라는 주석서들의 설명을 종합해 볼 때 마음의 해탈은 양면해탈과 동의어로 간주해야 한다.
둘째. “마음의 해탈이란 색계와 무색계에 속하는 마음의 해탈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여덟 가지 증득들 가운데 어떤 하나의 증득(AA.iii.153)이라고 하였다.”(AAṬ.ii.321)라는 설명을 통해서 보면 마음의 해탈은 단지 색계 4선과 무색계 4선 가운데 하나의 경지를 얻은 것 즉 사마타의 경지를 말하기도 한다.
2. 닙바나(nibbāna, 涅槃)과 빠리닙바나(parinibbāna, 般涅槃)
열반은 ‘불어서 없어진’, ‘불어서 꺼진’이란 뜻인데, 여러 경에서 부처님은 ‘갈애가 소멸한 것(taṇhākhaya)’이라고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한편, 『쌍윳다니가야』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도반들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바로 열반이다.”(S38:1)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열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열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와 존재(깊은 선정체험의 경지)에 대한 갈애[有愛]와 존재하지 않으려는 갈애[無有愛]로 설명되는 모든 종류의 갈애가 다 사라진 경지이며, 탐욕[貪]과 성냄[嗔]과 어리석음[癡]으로 표현되는 모든 해로운 심리현상[不善法]들이 모두 다 불어서 꺼진 상태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이러한 해로운 심리현상들을 불어서 끌까요? 바로 팔정도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열반은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게 되는 궁극의 경지이다.
열반은 죽고 나서나 실현되는 경지가 결코 아니다. 열반과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열반은 팔정도를 통해서 지금 여기[現今]에서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열반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현으로 옮긴 삿치끼리야(sacchikiriyā)는 문자적으로는 ‘눈앞에 만듦’ 즉 ‘눈앞에 드러냄’이라는 뜻이다. 열반은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에 드러내고 현전하게 하고 실현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열반을 ‘꺼진 상태’라는 수동적인 의미로만 설명을 하면 자칫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병폐가 생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탐진치가 해소된 열반은 허무적멸한 경지가 아니라 죽지 않음(不死. amata. 감로)이요, 평화(santi)요, 병 없음(aroga)이요, 지복(至福. parama-sukha. 최상의 행복)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대승불교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열반이 허무의 경지가 아니라고 해명하는데, 열반은 영원하고[常] 행복이고[樂] 궁극적 실재이고[我] 깨끗한 것[淨]이라고 〈열반경〉은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열반을 죽음과 연결지어 사용하게 된 것은 일찍부터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깨달은 분들의 죽음을 빠리닙바나(parinibbāna)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것을 중국에서 반열반(槃涅槃)으로 음역하였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스님들이나 큰스님들의 입적을 반열반이라 표현하게 되었고,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반열반이라는 말 대신에 연로하신 스님들의 임종을 아무 생각 없이 열반에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열반은 절대로 죽음과 연결시키면 안 된다. 노스님들의 임종을 세속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입적’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입적(入寂)이라는 표현도 적멸의 경지 즉 열반에 들었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반이라는 불교 최고 목표가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다고 본다. /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3. 신통지
선(禪)의 경지는 삼매(samādhi)를 닦음으로서 얻어지는 높은 경지를 뜻하며, 금생에서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a)을 닦는 범부들과 유학들이 경험한다. 이런 수행은 삼매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心一境性, cittassa ekaggatā] 모든 정신적 혼란이 제거되는 것이다. 장애들이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된다.
선의 마음의 대상은 대부분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영상이다. 이런 표상은 개념(paññatti)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물질, 구체적으로는 형색(눈에 보이는 형상)을 토대로 해서 일어나며 그러므로 이들 선은 색계에 속하는 것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장 §1. Ⅱ.
아비담마에서의 신통지를 살펴보면,
신통의 토대가 되는 제5선(경에서 분류하는 제4선)으로부터 출정하여, 결심 등으로 전향한 뒤에 준비하면, 그는 그렇게 준비한 대로 형색 등을 대상으로 하여 신통지로써 일어난 색계 5선에 든다. 신통지는 신통 변화의 지혜[神足通], 신성한 귀의 지혜[天耳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 과거 삶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 신성한 눈의 지혜[天眼通]의 다섯 가지이다. 이런 5가지 종류의 신통지는 모두 세간적이고 제5선의 자유자재에 의존한다. 여섯 번째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는 사마타, 즉 선정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위빳사나를 통한 통찰의 힘으로 얻어진다.
색계의 마음부수들(선정의 구성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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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에서의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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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의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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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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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kka(尋), vicāra(伺), pīti(喜), 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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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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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akka(尋), vicāra(伺), pīti(喜), 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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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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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āra(伺), pīti(喜), 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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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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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īti(喜), 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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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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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īti(喜), 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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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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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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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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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ha(樂),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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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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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ekkhā(捨),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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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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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ekkhā(捨), ekaggatā(一境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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