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 거시물리학
위대한 설계(grand design) / 스티븐 호킹 2
도봉별곡
2022. 6. 5. 01:39
위대한 설계(grand design) / 스티븐 호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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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주의 온갖 조건들이 인간이 살기에 딱 적합하도록 “극도로 정밀하게" 맞춰져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전통적인 과학(고전물리학)이 추구해온 유형의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과거의 모든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과학자들도 최첨단에서 캄캄한 어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어둠이 유서 깊은 자연신학의 최신판인 "지적 설계론"의 토양이다. 호킹의 말대로 특히 미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이러한 “미세조정"(우주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서 지적인 설계자, 곧 신의 존재를 주장한다. 과학의 최신 성과를 종교적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셈이니, 무척 세련되고 그야말로 최신식이다. 그러나 과학과 종교가 이런 식으로 어울리는 것은 왠지 부적절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미지의 영역이 끝내 남더라도 합리적인 삶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넓히고자 애쓰는 활동이 과학이다. 반면에 종교의 목적은 합리적인 앎을 훌쩍 뛰어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다. 과연 현대물리학이 20세기에 발견한 우주의 미세조정은 창조자로서의 신을 옹호할 근거일 수 있을까?
이 책에서 호킹이 내놓는 대답은 단연코 “그렇지 않다”이다. 그는 현대물리학이 도달한 세계관과 지식으로 우주의 미세조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신을 끌어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호킹의 단호한 입장이 근본적인 세계관의 전환과 맞물린다는 점이다. 그가 현대물리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촉구하는 그 전환의 열쇳말은 “모형"의존적 실재론", "역사들의 합”, “다중우주" 등이다. 이 개념들은 모두 양자물리학에 뿌리를 둔다. 양자물리학은 일상경험과 상식에 어긋나기로 악명이 높으므로, 이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한 호킹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이다. 상식과 고전적인 과학에 어긋나는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받아들이지 못한 - 그 세계관이 높은 울타리처럼 우리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호킹의 입장을 일반인의 수준에서 이해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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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위의 열쇳말들 가운데 “다중우주, 곧 수많은 우주들의 집합은 비교적 수긍할 만한 개념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난해하고 복잡하지만, 여러 나라가 있고 여러 별이 있는 것처럼 여러 우주가 있다는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다. 호킹은 “수많은 우주들의 존재를 근거로 삼아서 우리 우주의 미세조정이 대수롭지 않은 사태라고 판단한다. 대수롭지 않은 사태란 얼마든지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일, 특별히 신이 일으켰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일을 뜻한다.
만약에 오직 우리 우주만 존재한다면, 이 유일한 우주가 인간에게 우호적이라는 현재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 사실은 정말 특별하고 경이롭기까지 할 것이다. 이것이 미세조정을 주목하면서 지적 설계론을 펼치는 사람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제각각 다른 조건을 갖춘 무수한 우주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주들이 말 그대로 무수히 많다면, 모든 가능한 조건들 각각이 어느 우주엔가는 갖춰져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적합한 조건을 갖춘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터이다. 요컨대 우리 우주가 인간에게 적합하다는 사실은 신의 배려 따위를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된다. 따라서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이것이 아래의 인용문들에서 호킹이 말하려는 바이다.
"우리 태양계의 환경적 요소들과 관련한 행운이 수십억 개의 태양계들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에 의해서 대수롭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들의 미세조정도 수많은 우주들의 존재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다중우주의 개념은 우리를 위해서 우주를 만든 자비로운 창조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물리법칙의 미세조정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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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것은 호킹의 이런 주장이 현재나 미래의 과학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내는 수준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아인슈타인 같은 고전적인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호킹은 비관론자에 가깝다. 그는 우리 우주의 미세조정을 "어떤 유일한 이론이 설명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가장 유망한 물리학 이론으로 M이론을 꼽는데,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M이론은 단일한 이론이 아니라 "이론들의 그물망”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그의 예상이다.
호킹 자신이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원래 물리학자들의 희망은 우리 우주의 가시적인 법칙들이 몇 개 안 되는 단순한 전제들에서 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귀결이라고 설명하는 단일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감하게도 그는 “이제 우리는 그 희망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어떤 커다란 전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귀결”이란 다른 말로 필연적인 귀결이다. 실제로 고전물리학은 필연적인 귀결, 필연적인 설명을 추구했다. 어떤 사건을 관찰하면, 그 사건이 어떤 이유 때문에 반드시(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했다고 믿으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판단은 사건의 원인을 아직 모른다는 고백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양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우연이 존재의 본성으로 격상되었다. 우연이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성에서 - 재미있게 표현하면 “신의 주사위 놀이에서" - 비롯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우연을 근본적으로 수용하는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세계관의 연장선에서 호킹은 "과학사의 전환점”을 거론한다.
"우리는 과학사의 전환점에 도달한 듯하다. 물리이론의 목표와 조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된 성싶다는 말이다. 가시적인 자연법칙들에 등장하는 근본적인 수들의, 그리고 심지어 자연법칙들의 형태는 물리학의 원리나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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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원리와 논리는 어떤 자연법칙들이 가능한지 결정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서 이 특정한 법칙들이 성립하도록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호킹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바꿔 말해서 이 우주의 현실이 확정되는 데에 우연이 근본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호킹이 말하는 “전환”은 우연을 근본적으로 수용하는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의 채택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을 채택하면 신을 동원하지 않고도 우주와 우리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일반적으로 창조론자들)이 내세우는 “미세조정”과 “창조”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호킹은 “그렇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미세조정에 대한 설명은 이미 보았으므로, “창조"에 대한 설명만 추가로 살펴보자.
창조란 유(有), 곧 우리가 아는 만물이 무(無)로부터 생겨나는 기적적인 사건이다. 원래 과학은 창조의 개념을 배척하고 우주가 영원한 과거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존속한다는 입장을 선호했다. 그러나 역시 20세기에 빅뱅 이론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과거의 특정한 시점 - 137억 년 전에 - 만물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과학자들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원래부터 창조를 믿어온 기독교계는 당연히 반색했다. 드디어 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빅뱅은 신이 일으킨 기적, 곧 창조였다.
만약에 물리학이 빅뱅의 원인을 밝혀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빅뱅은 기적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현상으로 이해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미세조정과 마찬가지로 빅뱅도 고전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유서 깊은 자연신학의 전통이 고개를 들 여지가 생기고, 호킹은 이번에도 사고방식의 전환, 곧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의 채택을 통해서 대응한다. 전략은 미세조정을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이다. 호킹은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사건이 특별하지 않다고 해석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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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통합하는 양자중력이론에 관한 부분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호킹이 시간의 시초를 고전물리학적인 특이점으로 보는 대신에 무엇인가 새로운 방식으로 파악하여 특이점 문제를 우회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상대성이론에 양자이론의 효과들을 추가하면, 시공이 아주 심하게 휘어져서 시간이 또 하나의 공간 차원처럼 행동하게 되는 극단적인 경우들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우주 역사의 초기를 그런 경우로 꼽는다. 그의 구상대로 시간의 시초를 비(非)특이점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 시간의 시초를 선분의 끝점으로 여기는 대신에 이를테면 구면상의 한 점인 남극점처럼 다룰 수 있다면 - 빅뱅이 기적이라는 생각은 설득력을 대부분 잃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호킹은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사건이 물리학의 근본법칙인 에너지 보존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허공에서 별이나 블랙홀이 생겨나는 것은 에너지 보존법칙의 위반이지만 절대적인 무(無)에서 우주 전체가 생겨나는 것은 위반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빅뱅은 지금 이 순간 만물이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라 존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사건일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호킹은 빅뱅을 "자발적 창조”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그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이 용어가 대표한다. 이 책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아래의 문장을 보라.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한편으로 유서 깊은 자연신학의 최신판인 지적 설계론과 대결하고, 다른 한편으로 현대물리학의 근본적인 성취들과 거기에 함축된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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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명하다보니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방대할 수밖에 없다. 철학에서 존재론이 다루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존재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으로 제기하면서 책 전체의 윤곽을 보여주는 제1장, 비과학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을 대비하는 제2장, 양자물리학적 세계관을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제3장은 이를테면 예비과정이다. 현대물리학의 두 축인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이론에 대한 고찰은 제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아마도 양자물리학을 다루는 제4장, 물리학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다루는 제5장, 최신 우주론을 다루는 제6장일 것이다. 지적 설계론에 맞서서 미세조정과 빅뱅을 설명하는 제7장과 제8장은 비교적 쉽게 느껴질 성싶다.
책의 서두에서 호킹은 다음과 같은 "존재의 수수께끼", "생명, 우주, 만물에 관한 궁극의 질문"을 제시한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이미 언급했듯이, 이 질문들의 답은 "자발적 창조”라는 결론으로 요약되며, 이 결론의 바탕에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 "역사들의 합”, “다중우주와 같은 의미심장한 개념들이 있다. 질문들의 크기와 깊이를 생각할 때, 이 간결한 책은 독자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 못지않게 궁금증과 탐구욕을 일으키리라고 예상한다. "자발적 창조"를 말하는 책이 독자들의 자발적 탐구를 유발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설계자를 내세우는 종교에 맞서서 이 우주의 위대한 설계를 어떤 설계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해해가는 활동이 과학이요, 이 책 「위대한 설계」의 목표는 그런 과학을 옹호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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