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메모
동사의 힘
도봉별곡
2022. 7. 22. 18:34
동사의 힘[정희모의 창의적 글쓰기]
케네스 코치의 시(詩)에 문장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어느 날 길에 모인 명사들 / 형용사 하나가 지나간다. / 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 명사는 충격과 감동으로 변화를 겪는다. /이튿날, 동사가 이를 몰아 문장을 창조한다." 문장 형성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을 담고 있는 시다. 명사는 주로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무, 돌, 사랑, 우정, 철수, 교사 모두 대상을 규정하고 이름 짓는 말이다. 먼 옛날 호모사피엔스가 사물에 처음 이름 붙일 때 아마 명사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물에 이름이 붙으면 세상은 활기를 띠고 의미를 얻게 된다.
명사가 재료라면, 형용사는 재료를 꾸미는 장식품이다. 시(詩)에서 보듯 그것은 '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이다. 명사의 모양, 색깔을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꾸며주기 때문이다. 영어와 달리 한국어는 형용사만으로 서술어 기능을 한다. 그렇지만 능동·피동, 진행형과 같은 움직임의 기능이 없어 쇼윈도의 여인처럼 우리는 그 상태를 먼발치에서 볼 수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형용사는 우리 마음과 관계한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연인도 다투거나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밉고, 추악한' 사람이 된다.
'짙은 아름다운 여인'이 생명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동사가 필요하다. 스탠리 피시는 고립된 단어에 연을 맺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 것은 동사라고 말한다. 명사는 세상을 명명하지만 고립되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한다. 형용사는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하지만 멀리서 상태를 설명할 뿐 홀로 움직이지 못한다. 동사는 이런 명사와 형용사를 엮어 새로운 세계를 꾸미고 창조한다. "짙고 아름다운 여인이 울고 있다”거나 "그런 그 여인을 사랑한다" 혹은 "그 여인과 이별했다"라는 문장이 동사로 인해 구성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야기가 기쁠지 슬플지는 동사가 엮어내는 자신의 모습과 요구되는 논항들에 달려있다.
동사에 관한 책을 쓴 어떤 이는 동사를 음식으로 치면 육수나 양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나는 양념보다는 육수에 가깝다고 본다. 싱싱한 재료가 있어도 육수가 없다면 음식 맛을 낼 수가 없다. 잔치국수만 보더라도 아무리 좋은 면을 쓰고 적당한 고명을얹어도 육수가 제 역할을 못하면 맛을 내지 못한다. 육수는 음식을 음식으로 존재하게 하는 본바탕이다. 마지막으로 음식에 불을 때고 간을 맞추는 일은 필자의 몫이다.
정희모 연세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