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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심(Sympathie)과 의무 /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해제)

도봉별곡 2022. 8. 23. 19:36

동정심(Sympathie)과 의무 /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해제)

 

마음의 경향성(Neigung)으로부터 말미암은 인간의 행위는 칸트에 따르면 그 자체로는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 이를 칸트는 동정심(Symphathie)과 의무의 관계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가장 선한 마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관대함이나, 자비, 인간애와 같은 동정심도 그것이 '의무로부터'(aus Pflicht) 시작된 행위가 아니라면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단호한 생각이다. 만약 가능한 자선을 베푸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할 때, 동정심에 의해 많은 이에게 자선을 베푸는 이는 이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도덕적인 행위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 의하면 그렇지가 않다. 비록 그가 자신을 과시하려는 허영심도 없이, 또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사적인 동기 없이, 단지 자신의 행위로 인해 다른 이가 만족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도 있다. 즉 동정심으로부터 한 인간은 순전한 박애의 마음으로 자선을 행할 수 있고 또한 이는 의무에 맞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가 '의무로부터'(aus Pflicht) 행한 행위가 아니라면 그것은 결코 도덕적일 수 없다. 이는 마치 많은 이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공익적인 행위가, 비록 의무에 맞는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명예에 대한 경향성, 즉 공명심으로부터 생겨났다면, 칭찬과 격려는 받을 수 있지만 존중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아무리 공익적인 행위라도 의무로부터가 아닌 공명심이라는 경향성으로 말미암았다면 도덕적일 수 없듯이, 동정심으로부터 말미암은 선한 행위도 의무로부터가 아니라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박애주의자가 자신의 불행과 슬픔으로 사람들에 대한 모든 동정심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타인을 위한 자신의 가능한 자선을 행할 마음의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aus Pflicht) 자선을 행한다면, 그때 비로소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고 칸트는 말한다.

할 수 있는 한, 선행을 하는 일은 의무이다. 그 밖에도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사람들도 많아서, 그들은 허영이나 사익[私益]과 같은 어떤 다른 동인 없이도, 자기 주위에 기쁨을 확대시키는 데서 내적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이 자기 작품인 한에서, 타인의 만족을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주장하거니와, 그러한 경우에 그 같은 행위는 매우 의무에 맞고, 매우 사랑 받을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경향성들, 예컨대 명예에 대한 경향성과 같은 종류이다. 명예에 대한 경향성은, 만약 그것이 다행히도 실제로는 공익적이며 의무에 맞고, 그러니까 명예로운 것에 해당한다면, 칭찬과 격려를 받을 만하지만, 존중받을 만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그 준칙에는, 곧 그러한 행위들을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로부터 행하는 윤리적 내용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박애가의 마음이 자신의 깊은 슬픔으로 흐려져, 타인의 운명에 대한 모든 동정심을 없애버렸고, 그는 여전히 고난 받고 있는 타인들을 돌볼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 자신의 고난에 극도로 얽매여 있기 때문에, 남의 고난은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어떤 경향성도 더 이상 그를 그렇게 하도록 자극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 치명적인 무감수성에서 벗어 나와 아무런 경향성 없이, 오로지 의무에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때 그 행위는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B10f.; 한글판 86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