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메모

2016 경향신문 시 당선작 :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변희수

도봉별곡 2022. 9. 1. 10:18

2016 경향신문 당선작 / 변희수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 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 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아침의 노래

커튼콜처럼,
다시 무대가 열리고 있네, 검은 휘장 속에서 네가 걸어 나오고 있네

온갖으로 오고 있네, 온갖이라는 말이 폭죽처럼 쏟아져 내리네

많고 많은 온갖, 온갖은 사방팔방에서 오네, 온갖은

붉게붉게 물들면서 오네
온갖이 지문처럼 스미네, 번지네, 눈동자마다

온갖이 또록또록 새겨지고 있네

온갖이 나를 불러내고 있네
밤의 강보에 싸인 나를, 재촉하네, 손짓하네
어둠의 탯줄이 화들짝 떨어지네, 배냇짓 같은 꿈들이 울음을 터트리네
신생아처럼 눈을 떠 보네, 두근두근 온갖이 내게로 오고 있네, 내가 온갖의 품에
안겨 있네, 가슴이 뛰네

시렁 위에 얹힌 아침을 꺼내 신어 보네, 태양이 붉은 머리칼을 땋아내리네, 금방 구운 빵처럼 내가 부풀어 오르네, 나뭇잎이 살랑거리네 어항 속 물고기들처럼 바쁘네, 시계가 뻐꾸기처럼 우네, 냄비가 정열적으로 끓어오르네, 자작자작 내가 졸아드네, 다시 나를 연주하고 싶어지네, 온갖의 리듬, 온갖의 박자에 맞춰 나무처럼 춤추고 싶네, 풀처럼 웃고 싶네, 새처럼 떠들고 싶네. 동쪽에서 서쪽으로 주욱, 밑줄을 그어 보네, 그러나

동이 틀 때는 문득

쓸쓸한 그림자,

홀로 잠입한 짐승처럼 내가 있네, 네가 있네

온갖의 밀림 속을 혼자 걸어가네

오래된 조명처럼 햇빛이 머리 위를 비추네

앙코르처럼 내가 불려나가네, 네가 있네

우리가 있네

 

 

동침

감정의 적은 감정이다 감정이 감정을 밟고 감정이 감정을 쓰러뜨린다 퉁퉁 부은 얼굴로 눈 코 입이 뭉그러질 때까지 다시 눈 코 입을 그려넣을 때까지 얼마나 감정적이면 감정이 감정을 만나 다시 감정의 적이 될까 사람은 사람을 낳고 감정은 감정을 낳는데 사람은 사람을 낳고 왜 감정이 되는가 감정을 낳고도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면 감정적인 감정들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데 그런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먹고 감정을 배설하는 감정의 동물 감정의 악순환 감정의 폭식, 폭식은 요요를 부르고 요요라고 하면 언제든 쪼르르 감정이 달려 나올 것 같다 사실 그동안 감정만이 계속 감정에게 꼬리를 쳐왔을 뿐 감정의 꼬리는 길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런 감정들은 싹둑, 그래도 감정적이 되지 않는다면 감동 감동은 감동을 낳고 감동을 낳은 감정들을 한참 생각하다가 그만 적과 적의 동침 감동적으로 감정적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어떤 머리든 머리는 둥글고 머리통 속에

동그랗게 가두어 놓은 것이 있다

누가 저렇게 동그란 새장을 목 위에 올려 두었나

새장을 이고 다니며 새를 부르는 사람처럼

새장 속의 새를 멀리까지 날려 보내려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구름 속에서 새를 잃어버린 적이 있거나

솟대처럼 목의 위치를 한쪽 방향으로 고정시키고

새를 기다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새장과 새장 사이

열쇠구멍처럼 동그란 당신의 눈동자

깜빡 열쇠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막 목의 위치를 바꾸려다 실패한 사람처럼

수상한 팔과 다리의 움직임

새장 속에는

끊임없이 새를 기다리는 새가 있고

끊임없이 새를 날려 보내는 새가 있어서

새장 주변에는

늘 머리카락처럼 가벼운 그 무엇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유리창이 있는 벽



유리는 투명하다

무엇이든 다 허락할 것 같다

거리낌 없이 다 보여 줘도 결국 벽이라고

속지처럼 끼워져 있는 유리창

호호 입김을 불어 닦은 데 또 닦아도

자꾸 흐려지는 일들

얼룩이 남는 그런 일들은

아마도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들

버선목처럼 속을 뒤집어 보이거나

입을 아, 하고 벌려도

코 박고 이마를 찧을 수밖에 없는

유리는 투명하고
유리는 무엇이든 다 허락할 것 같은데

누구나

벽이 있고

 

벽마다 창은 하나씩 있고

창마다 자주 흐려지는 유리가 끼워져 있어

한 번씩 소리나게 드르륵 열어 보고 싶어진다

 

 

杞憂

새 한마리 하늘을 난다

훨훨 한마리는 자유롭다

훨훨 한 마리는 고독하다

새 두 마리 하늘을 난다

끼룩끼룩 살림이 늘어날 것 같다

끼룩끼룩 우려라는 말이 고개를 내민다

새 여러 마리 한꺼번에 하늘을 날아간다

무리지어 날아간다

질서가 이념이 철학이 문학이 새

를어디론가 데려 간다

새가 새 속에 갇힌다

새는 새 밖으로 날아가지 못한다

새는 영원히 새밖에 되지 못한다

밥풀처럼 뭉쳤다 풀어지는 새 떼들의 소란이

하늘을 덮을 것 같다

하늘이 아주 까맣다

 

한쪽 하늘이 비어 있어

침과 식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당선 소감 | 변희수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 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 마디 안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참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 주는 날들이 올까. 그때까지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13'나의 시 동지들과 행운을 나누고 싶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경향신문 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 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 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이시영 · 황인숙(시인)

*직유의 수단어 '처럼'의 남용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