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다시 읽어볼 만한 책. 유시민의 공감필법 - 격려: 『맹자』와『유한계급론』
도봉별곡
2022. 10. 29. 17:30
유시민의 공감필법 - 격려: 『맹자』와『유한계급론』
책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도 공부라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합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 포도', 어릴 때 다들 읽어보셨죠? 살다보면 간절히 원하지만 얻을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훌륭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겠죠. 끝내 이루고야 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먹을 수 없는 그 포도가 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덜 쓰립니다. 어쩐지 비굴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끼시나요? 그렇다면 이솝우화보다는 맹자(孟子)의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맹자』 「등문공] 하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천하의 넓은 집(仁)을 거처로 삼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대도(義)를 실천하여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나를 흔들 수 없고, 빈천도 나를 바꿀 수 없으며, 위세와 무력도 나를 꺾을 수 없어야 비로소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대장부는 그저 대범하고 힘과 용기가 넘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장부는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입니다. 제가 꽂혔던 대목은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는 문장이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태도예요? '백성을 탓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나 혼자 간다. 이 오연함이야말로 맹자의 힘이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래, 뜻을 얻었을 때는 시민과 함께 정치의 길을 갔다. 이젠 그렇지 않으니 나 홀로 내 길을 가자.' 그렇게 저 자신을 격려했지요.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는 어쩌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나,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글쓰기의 출발은 소위 '불법 유인물' 제작이었어요. 학생운동을 하던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국회의원 장관으로서 정치 행정에 종사할 때도 그랬고,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만, 제 글쓰기의 동력이 된 감정 가운데 제일 센 것이 분노였습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거나 갖가지반칙을 저지르면서 강자의 지위를 얻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자존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모욕하고 경멸하고 짓밟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지요. 앞에서 소설 『제인 에어』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렸던 바로 그 감정입니다.
저는 그런 불의를 없애려고 학생운동도 하고 정치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해보고 또 평소 국민여론조사결과도 살펴보니까, 뜻밖에도 제가 마음에 두고 활동했던 시민들이 저한테 표를 안 주더라고요. 보건복지부에서 일할 때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기초연금을 도입해서 노인복지정책을 확충하는 데 힘을 많이 썼어요. 건강보험도 저소득층이나 중증질환을 앓는 분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는 쪽으로 많이 손을 봤고요. 그랬는데 이상하게 그런정책의 혜택을 보는 시민들이 저와 제가 속한 정당을 지지해주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제가 특별히 해드린 게 없고 자기 힘으로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시민들이 저를 좋아했지요. 섭섭하기도 했고, 또 답답하기도 했고, 좌절감도 적지 않게 느꼈습니다. 그때 마치 그런 저를 위해 써준 것처럼 다가오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의 『유한계급론』 8장에서 가져왔습니다.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이 관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자가 대변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 그 혁신자는 교제하기에는 불쾌한 인물이며 무릇 그와 접촉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베블런이라는 괴짜 경제학자가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주의에 사로잡히는 이유를 설명한 글입니다. 저는 바람직한 혁신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네 가지 없다'는 비난만 들었어요. 왜 그럴까? 그게 이해가 안 됐는데 이 글을 다시 읽고 깨달은 것이죠.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이십대에 이미 읽었던 책인데, 그때는 이 대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부자들이 짚고 다니는 보석 박힌 비싼 단장이 사실은 구석기시대에 들고 다녔던 돌도끼의 흔적이라는 식으로 부자들을 비꼰 대목들이 좋아 보였는데, 나이 오십이 지나 다시 읽었더니 비로소 이 대목이 보였어요. '원망할 필요 없구나. 이게 지금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데서도 항상 그랬던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다는 생각도 덜게 됐고, 원래 그런 거니까 굳이 내가 책임을 다 감당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죠.
되풀이해 말하지만, 공부는 인간으로서 최대한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학위를 따려고, 시험에 합격하려고, 취직을 하려고 공부를 할 때도 있지만 공부의 근본은 인생의 의미를 만들고 찾는 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할 때는 내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책이 기독교 성경이라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