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메모

이성선 / 영혼의 울림-선시(禪詩)의 현장

도봉별곡 2022. 11. 7. 08:01

이성선

 

영혼의 울림

-선시(禪詩)의 현장

 

가을 아침

푸른 하늘처럼이나 맑은

땅바닥에 떨어진

나무 잎사귀를 주워 들고 바라보다가

 

불꽃같이 아름다운

잎사귀 속에 숨어 있는

엽맥들이 모두

나무의 형상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네

 

엽맥들이 가늘게 떨며 벋/뻗어 간

잎사귀 둘레로

아직 선명하게 맺혀 있는 이슬

 

물방울 꽃나무 한그루를 들고

한 자루 촛불인 듯 하늘 기슭을 밝히고

내가 떨고 섰네

 

무엇이든 세상의 것은 다 상징이라는

이 놀라움

나무도 씨앗 속에 숨어 있네

 

이 큰 진리 앞에

나는 무엇의 상징으로 지금 여기 있나

나를 닮은 더 큰 나무는 누구인가

 

인제 어렴풋이는 알 것 같네

손바닥에 나의 형상이 다 들어 있듯이

나는 하느님 나무의 한 잎사귀

 

실핏줄에 넘쳐흐르는 그분 눈빛으로

새롭게 피어 자라나고

때로는 스스로 떨어져 땅에 뒹굴며

누군가 그리워 헤매는 보헤미안이기도 한

(「잎사귀」)

 

이성선의 시를 흔히들 선시(禪詩)라고 한다. 불교의 경전에는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계(戒), 정(定), 혜(慧)가 있다. 계는 일상생활의 규범을, 혜는 지혜를, 정은 선(禪)을 의미한다. 선에는 4선이 있다. 제1선에 있어서는 마음의 분별 작용이 아직 남아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되어 있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에 의하여 몸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 제2선에 있어서는 마음의 분별 작용이 소멸되고 다만 기쁨과 즐거움만이 남아 있다. 제3선에 있어서는 기쁨은 소멸되고 즐거움만이 남는다. 제4선에 있어서는 즐거움마저도 소멸되고 청정심(淸淨心)만이 남는다. 이와 같이 선정에 들면 마음은 안정되어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 수가 있다. 이때 전 세계는 오로지 하나의 상(相)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선시의 주인공은 이 4단계를 순서적으로 극복하지 않고 동시적으로 수용하고 즐긴다. 엄격히 말하면 참선(參禪)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 전의 상태에서 미적 긴장을 즐긴다. 이것이 시인의 선이다. 이 불완전, 미완의 상태에서 완전 (하나의 상')으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동微動)의 긴장, 이것은 시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혼의 호흡이다. 이성선의 시는 바로 이러한 호흡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무의 잎사귀 속에 숨어 있는 나무, 아니면 씨앗 속에 숨어있는 나무, "나를 닮은 더 큰 나무는 하느님, "나는 하느님 나무의 한 잎사귀" 등은 모두 본질적 관념이다. 시적 긴장은 여기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물방울 꽃나무 한그루를 들고 한 자루 촛불인 듯 하늘 기슭을 밝히고 내가 떨고 서 있기 때문에, 나무 잎사귀 “실핏줄에 넘쳐흐르는 그분눈빛으로 새롭게 피어 자라나고 때로는 스스로 떨어져 땅에 뒹굴며/ 누군가 그리워 헤매는 보헤미안'이기 때문에 생명에 와 닿는 시적 긴장이 발생한다. 그래서 선시를 비롯한 모든 종교시의 매력은 완전의 상태인 고인 물이 아니고 완전을 향해 흘러가는 냇물이나 여울물의 물살 속에서 발견할 때가 많지 않던가. 그는 또 이렇게 노래하기도 한다.

 

가지에 잎 떨어지고 나서

빈 산이 보인다!

새가 날아가고 혼자 남은 가지가/

오랜 여운에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 닿은 내 몸에서도

잎이 떨어진다/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리고

빈곳이 더 크게 나를 껴안는다.

흔들림과 흔들리지 않음 사이/

고요한 산과 나 사이가

갑자기 깊이 빛난다!

내가 우주 안에 있다

(「흔들림에 닿아)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보고 한 포기의 야생화에서 하늘을 본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의 상호관계를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자신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상당한 의미와 서정의 심층을 개척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타자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낭만주의 시인이 지니는 일반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이성선의 시에서는 나와 자연(혹은 우주)의 관계는 일체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본래적인 자기 존재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본래적인 자기로서 존재할 것을 결의한다. 이러한 본래적인 존재 방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실존이다. 선시도 결국 이러한 존재 방식의 태도로 씌어진 시다. 그리고 작자의 이러한 경험적 인식의 세계(의식 세계)를 추적해서 작품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현상학적 비평 방식이다. 바슐라르는 자연이나 우주의 근원을 드러내거나 세계와의 구체적인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여러 가지자연의 본원적인 현상(흙·공기·불·물)이 인간의 상상력 속에 들어올 때 그러한 현상들의 내포적 가치를 정신분석적으로 연구했다.

 

이성선 시에 자주 나오는 소재 중의 하나가 물이다. 그래서 시집의 이름도 『물방울 우주』다. 물속으로 우주가 쏟아져 들어가기도 하고 물방울 속에 산이 있고 사람이 있다. 물속으로 천 년을 죽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도 있다. 더욱이 물방울에서의 울림을 느끼기도 한다. 이 물방울과 동위적(同位的)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나무와 꽃과 벌레와 풀잎과 산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다 같이 확대된 내면 공간을 가지고 있다. 우주적 공간으로 그 속에 삶의 전부를 포용한다. 모든 것이 그 속에서 일체화의 화음(和音)으로 노래된다. 이것을 그는 “하늘 운율”이라고 했다. 위의 예시는 유무(有無)와 동정動靜)과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계에다 자신을 심은 득(得)의 환희를 노래한 시다. 나무에 잎이 떨어지고 나서 산이 보인다는 것은 가을 산이나 겨울 산이 나목을 통해 그 모습을 선명히 드러내는 사실성과 해탈의 경지에서 맛보는 법열의 상징성이 조화 일치를 이루는 탁월한 묘사다. 내 몸에 잎이 떨어지고 무한 쪽으로 내가 열린다는 것도 앞의 자연현상과 대칭을 이루면서 뒤의 득의(得意)의 광명에 이르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비움의 노래요, 만남의 노래며 영혼의 절정을 노래한 것이다. 「절정의 노래」에서는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 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라 했다. 또 산을 절정의 상징으로 보고 "거대한 힘으로 하늘을 향해 일어서는 목숨의 불화엄 황혼" (황혼 화엄 노래」)이라고도 했다. 그의 선(禪) 명상은 이 절정을 평점(點)으로 끌어내려 모든 세속적 개념을 무화시켜버린다. 그래서 절정은 고요의 극치 즉 고절(絶)의 의미로만 남는다. "숨 막히게 나를 압도하는 고요여 말하는 자는 사라지고 바라보는 자만 여기 남아 있다./ 바라보는 자조차 떠나면 누가 남아 뼈보다 투명한 마음으로 어둠 속에 노래하리" (황혼 화엄 노래」)라고 한 것은 여기서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고 한 것과 정황이 일치한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란 말이 있고 해탈도 있지만 장자의 나비가 이 시인에겐 더 적격이다. “한 방울 향기보다 더 붉게 핀 적요의 꽃” (「황혼 화엄 노래」)이 이성선에겐 장자의 나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