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메모

김윤성 / 존재의 의미- 동양적인 프시케(영혼)의 소요(逍遙)

도봉별곡 2022. 11. 8. 06:41

김윤성

존재의 의미

- 동양적인 프시케(영혼)의 소요(逍遙)

 

1

멀다 하고

가깝다 한다

누구로부터 가깝다는 것인가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하는 말 아닌가

내가 없으면

사랑도 神도 없다

나 없는 사랑이

나 없는 이

무슨 소용인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가 있어

내가 여기에 있어

별은 아득히 멀고

손에 잡히는

것들은 모두 가깝다

내가 있어

내가 여기에 있어

너에게로 향하는 사랑이

너에게로 향하는 믿음이

샘물처럼 솟구친다

 

2

하늘을 쳐다보고

그 끝없는 푸르름 속에 초점 없는 시선만 한참 굴리고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제 자신을 돌아보고는

내 아직도 여기 있음에 안도한다

 

별을 쳐다보고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에 한참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고는

내 아직도 여기 있음에 놀란다

 

(「내 아직 여기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시적 언어는 제비처럼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것이면서 모든 재보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 라고 했을 때 이 위험은 단순한 유희가 아닌 '존재의 건설'이라고 하는 최고의 필연성에 주어질 때 극복된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기의 현존재의 근거 위에 서게 된다. 김윤성은 이 시를 통하여 자기 존재의 확인을 새삼스럽게 다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써온 자기 시에 대한 실존적 근거를 황혼녘에 와서 재확인한 셈이 된다. 그러기에 이 시는 그의 모든 시의 시작과 끝에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 정신적 배경의 토양, 즉 실존적 각성을 이야기한 시다. 그에게 있어 존재는 무(無)와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 “무는 존재에 따라붙는 그림자 나의 그림자는 내가 없으면 생겨나지도 않는다" (「물소리). 무와 존재의 관계를 관념적 위상만 바꿔놓은 죽음과 생명의 관계도 "죽음을 지닌 생명의 빛" (실바람」)이라고 할 만큼 죽음과 생명은 일체(一)에 공존한다. 단 그 관계를 명징한 이미지성으로 실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신이 인간에 대하여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적어도 시에 있어서) 서양식 형이상학적 정형이라면 동양 시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동양의 경우 신의 존재는 비대상적이다. 신이니 천사니 하는 인격적 실체로 형상화되는 일은 거의 없다. 시를 생명과 정신의 원천으로 보고, 하늘과 땅을 새로운 생명 속에 조화, 통일시키는 것을 시나 시인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그런 당위성을 굳이 강조하지도 않는다. 시업(業)은 자기 본질에의 무한한 충실이며 그 행위는 철학적 사유의 시작이며 끝이 되는 최고의 인식 행위라는 사실에도 초연하다. 말하자면 사유적 인식이 아닌 직관적 인식 (정관(靜觀)이 동양적 내지 한국적인 시적 인식이다. 비극적 현실을 다루는 시인의 성정은 비극적이 아니고 관조적이다. 여기에는 소요(逍遙)의 개념이 차라리 적합할지 모른다. 소요 속에서 불현듯 스쳐가는 깨달음의 빛, 이것이 시적 인식이자 삶의 인식이다.

 

김윤성의 「산책 길에서」는 이러한 동양적인 관조의 경지를 소요의 눈짓으로 이야기한다. 전부 4장으로 구성된 이 시는 인생의 역정을 사이클화 하여 회귀하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제1장은 길을 따라갔다가 그 길이 다하는 곳에 이르는 과정이고 제2장에서 제4장까지는 돌아오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전후반부의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대칭 구도 속에서 전반부는 삶의 희망과 동경과 정열이 한데 어우러져 환희의 절정을 장식한다. 그것은 길이 다한 곳의 외딴 농가의 뜰에 피어 있는 빨간 칸나꽃으로 상징된다.

 

아무 기척도 없는 빈 뜰에

빨간 칸나꽃이 피어 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 속/

그 빨간 빛깔 너무나 선명하여

오히려 서늘해 뵈는

 

그러나 후반부는 돌아오는 길인 만큼 전반부의 들뜬 흥분은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훨씬 많고 자세하다. 맑고 투명한 정관(觀)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하나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듯' 시인은 냇물에 떠가는 나뭇잎에서 철리(哲理)를 감지한다.

 

나뭇잎을 건져 올리다가

순간 자연의 운행이 멈춰 버린 듯

마른 하늘에 요란한 천둥 소리/

울려 퍼지고

나뭇잎은 내 손에서 천근같은/

무게로

느껴져 왔다.

 

나뭇잎을 물 위에 내려놓았을 때 하늘은 다시 잠잠해지고 나뭇잎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 위를 떠내려간다는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자연이나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畏敬)의 자세에서 나온다. 이밖에도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섬돌 위에 앉은 나비의 가냘픈 날갯짓, 이는 모두가 인간의 비극적 실존을 상징한다. 그러나 비극은 비극으로 마감할 수 없는 것, 다시 관조의 눈길은 자연 쪽으로 열린다.

 

한 소나기 쏟아지려나

서늘한 바람 불어온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길(자연)은 끝까지 시인 앞에 대향적(對向的)으로 남아 있지만 여기서의 길은 소요 가운데 떠 있는 '나뭇잎'과 '이슬'과 '나비'의 전체다. 신이 떠나고 없는 가난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은 신의 눈짓을 언어로 감지하고 어둔 밤을 거룩한 밤으로 전회(轉回)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윤성의 눈에 들어오는 길은 횔덜린의 '신의 눈짓'으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프시케 (psyche, 영혼) 같은 것일까.

 

바라보면 볼수록 가찹고도 먼 얼굴/

꽃이여 /

그대로 두면 한없이 고이 잠들어버릴

너는 바람에 흔들리어 피었나니

일찍이 어둠 속에 반짝이던 너의 思念은

샛별처럼 하나 둘 스러져 가라!

너의 어깨 위로 새벽노을이 퍼져 옴은

萬象으로 네 존재의

餘日을 채우려 함이러니

너는 永遠히 깨인 꿈/

태양처럼 또렷한 意識!

(「꽃」)

 

시인이 소재에 접근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흔하게 쓰이는 것이 유와 무의 의미와 음(陰)과 양(陽), 동(動)과 정(靜)의 이미지 활용법이다. 이 시는 동적인 이미지가 중심을 이룬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꽃 시는 꽃의 내면성이 정태성(靜態性)의 영역 안에서 전개된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시는 정태성이 동태성(動態性)으로 이동하면서 내면성의 영역을 바꿔놓고 있다. 그것은 꽃이 태어나는 동기에서부터 밝혀진다. "그대로 두면 잠들어 버릴 너" (「꽃」)는 바람에 흔들리어 피어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성적인 이미지가 남성적인 것으로 바뀐 것도 그와 유사한 성격이다. 말하자면 "어둠 속에 반짝이던 너[꽃]의 思念"이 샛별처럼 스러져 가기를 바란다. 대신 "태양처럼 또렷한 意識“을 꽃에서 읽는다. 뿐만 아니라 종래의 한국 전통 시에서 꽃은 단순(미)과 순수(미)가 그 정체성의 전부였다면 이 시는 그 벽을 허물고 만상(萬象, 복합미)을 그 뜰에 옮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 꽃 시에서 즉일(卽日)의 하루만을 전부로 하는 꽃의 집중된 시간 속에 '여일'(餘日)의 여유를 만들어 넣게 된다. 이러한 현상으로 보아 이 시인의 꽃은 한국 전통 시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면에서는 서구식 모더니즘의 꽃과는 다르다. 그러면서 한국 전통시의 꽃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전통의 의미가 과거의 계승과 현재와 미래의 변화를 동시에 안고 있는 점을 감안해서 후기전통주의적인 성격을 띤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2.초월적 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