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메모
나희덕 / 로고스적 에스프리-진실과 사랑의 화성법(和聲)
도봉별곡
2022. 11. 10. 10:33
나희덕
로고스적 에스프리(이성적·진실한 영혼)
-진실과 사랑의 화성법(和聲)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곱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누에」)
나희덕의 시는 서정시의 본질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 한국시가 씌어진 한계를 반성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려고 하는 조용한 몸부림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말하자면 충동적 정감보다는 로고스적 에스프리로 시의 중심을 잡아나가려고 하는 응집력 같은 것 말이다. 그녀의 시가 세상 이치를 자연물이나 인간사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나 그 이치가 때로는 생명의 본질일 수도 있고 삶의 자세일 수도 있다는 것만으로 결코 개성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인생이라고 하는 아주 오래되어 고색이 창연한 그릇의 변죽에 신기한 손길이 와 닿는다. 이상한소리가 난다. 징소리 같은 큰 울림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꽹과리 같은 쟁그라운 소리도 아니면서 어쩌면 어느 밤 깊은 연안의 파도소리 같은 해맑은 울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녀의 시에서 사랑이라 하기에는 너무 뜨겁지가 않고 연민이라 하기에는 표정이 숨어버린 그런 조용한 읊조림을 읽을 수 있다.
이 시 「누에」가 주는 감동은 기형적 과장으로 이루어진 은은한 아날로지(類推)의 광채에서 발생한다. 모성애와 효심의 형상화가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는 도덕경의 수신적 엄숙성을 마치 상대성 원리 같은 생명성의 자력으로 따뜻하게 재생시킨 것 같은 신비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소재(누에)가 화자(나)에게 육화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로부터 발견하고 건져내는 그 무수한 "길 속의 길"에 회귀하는 현상으로 느껴진다.
그때 나는 사과를 줍고 있었는데/
재활원 비탈길에 어떤 아이가 먹다 떨어뜨린/
사과를 허리 굽혀 줍고 있었는데
내가 주워 올린 것은
흙 묻은 나의 심장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목발을 짚은 그 아이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내 손에 들린 것은
내 생의 무거운 가방이었다
그때 나는 성한 몸이라는 것조차 괴로웠는데
그 아이는 비뚤어진 입과 눈으로
자꾸만 웃었다 나도 따라 웃곤 했는데
그때마다 비탈의 나무들은 휘어지고 흔들렸는데
그휘어짐에 놀라 새들은 날개를 멈칫거리고
새들 대신 날개 없는 나뭇잎만 날아올랐다
그때 나는 괴로웠을까 행복했을까/
오늘 아침 땅 위에 떨어진 사과 한 알/
천국과 지옥의 경계처럼/
베어먹은 살에만 흙이 묻어 있다.
그때처럼 주워들었지만
나는 그게 내 마음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서 심장에 흙이 묻을 수 있다니
그랬다면 이 버려진 사과처럼 행복했을까 괴로웠을까
(「그때 나는」)
누가 먹다 버린 사과에 흙이 묻어 있다는 사실에서 인생의 의미가 마치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는‘ 격으로 확대되어 있다. 먹다버린 사과는 재활원 비탈길에서 목발을 짚고 비뚤어진 입과 눈으로 웃고 있는 아이(뇌성마비인 듯한)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 사실성에서 뻗어나가는 연상과 추리는 결국 휴머니즘의 본원에 닿아 있다. 먹다 버린 사과에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발견했다면 흙이 묻은 베어 먹은 쪽이 지옥이란 말인지, 이 흙 묻은 사과가 바로 자신의 심장으로 깨달았다 해도 그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다고 한 뜻은 무엇인지 이 시는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시속의 인물과 화자가 인간적 고뇌를 같이 앓는 현장으로 새들과 나뭇잎을 공감대로 동원하면서도 화자는 어떻게 보면 미숙한 것 같은 표현으로 서정적 회의를 거듭한 것은 주제 처리에 있어 모호성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나희덕은 언제나 낮은 시선으로 깊은 침투력의 날을 세우고 인간이나 세상의 숨은 의미를 끌어낸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녀 시의 진실은 바로 이 따뜻한 애정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그녀가 개척한 길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면서 항상 새롭고 다양하다. 그가 개척한 길은 서둘러 낸 ‘지름길'이 아니고 여유 있는 '에움길(우회로)'이다. 그 길에서 "밑 모를 우물 속에 던져진 돌이 바닥에 가 닿는 소리까지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세심한 깊이의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벌거벗은 육체가 아름다운 건 주머니가 없어서일 것이다"라고 할 만큼 날카로운 비판적 예지도 돋보인다. 시인으로서 갖추기 힘든 이러한 종합적 기능을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 나간다.
이건 금이 간 항아리면서
금이 갔다고 말할 수 없는 항아리 //
손가락으로 퉁겨 보면
그런 대로 맑은 소리를 내고
물을 담아 보아도 괜찮다
그런데 간장을 담으면 어디선가 샌다
간장만 통과시키는 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너무나 짜서 맑아진 /
너무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
고통의 즙액만을 알아차리는 그의 감식안//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간장만은 담을 수 없는
뜨거운 간장을 들이붓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고 말 운명의 //
시라는 항아리
(「어떤 항아리」)
시인에게는 사실과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은 사실로서 있으면서 철학적 진실같이 중량감이 있는 것과는 달리 가벼운 부력으로 진실을 사실 위에 띄운다. 사실 속의 무수한 층절 사이사이로 난 길(이 시인은 이것을 "길 속의 길"이라고 했다) 위에 그 진실은 풀꽃처럼 피어 있기도 한다. 이 「어떤 항아리」는 이처럼 사실 속의 새로운 사실(진실)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여기서 항아리와 시와 인간은 같은 의미선상에서 그려져 있다. 하마터면 스쳐버릴 뻔했던 일상 속의 진실을 끌어내는 것이 시인의 눈길이고 마음의 촉각이고 보면 시인은 "짜서 맑아진, 오래 달여서 서늘해진“ 시와 인생의 의미를 항아리라는 매체로 발견한다. 무슨 경전의 진리 같은 위엄은 들어내버리고 ‘먹다 버린 땅 위의 사과 한 알'에 비치는 햇빛 같은 진리가 그녀의 시 속에 살아 있다. 시인에게는 그 발견의 내용이 때로는 '미완성교향곡'인 줄 알면서도 영원한 완성의 과제로 생각하는 착각의 진지성(genuineness)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에게 이 이상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적 비전 1: 본연적 순수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로고스-이성
파토스-감성
에토스-관습
로고스/이성적 세계관
미토스/신화적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