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소설, 때때로 맑음 2 / 이재룡 비평에세이

도봉별곡 2023. 1. 28. 22:11

소설, 때때로 맑음 2 / 이재룡 비평에세이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서 국내에 프랑스 문학을 심도 깊고 활발하게 소개해온 대표적 불문학자 이재룡 교수가 <소설, 때때로 맑음 2>를 선보인다. 2013년부터 「현대문학」에 연재 중인 동명의 비평에세이 가운데 2014년 9월~2016년 11월까지의 수록작 스무 편을 묶은 것으로, 이전 연재분은 <소설, 때때로 맑음 1>로 출간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되는 <소설, 때때로 맑음 2>는 1권을 낸 지 3년, 연재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나오는 후속권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최신작 프랑스 소설들은 모두 동시대 프랑스 문학의 흐름을 주도하는 문제작들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다. 프랑스 현지에서의 화제성만큼 대중성까지 겸비해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생애 첫 소설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신예부터 이름만으로도 문단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까지, 이 책이 테마로 삼은 작품의 수만 해도 40여 편(국내 미번역 신작 포함), 상호 텍스트성으로 추려져 언급되는 작품만 해도 80여 편에 달한다. 저자는 예리한 변별성으로 작품을 선별하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 뱀, 코끼리, 그리고 나귀

․ 사랑의 적정가適正價

․ 두 죽음을 둘러싼 재수사

․ 어머니의 청춘

․ 이상한 사건

․ 화양연화

․ 노인의 연적들

․ 객관적 우연

․ 죽은 자의 이름

․ 언어의 일곱 번째 기능

․ 어렵고 위험한 일

․ 노숙자와 유기견

․ 대동강과 한강

․ 콩고 이야기

․ 소설가, 대체로 흐림

․ 항상 행복한 가족

․ 소설, 심리적 표절

․ 궁핍한 시대의 희망

․ 카불의 로쟈

․ 국가이성과 개인윤리

 

․ 에필로그

․ 참고 문헌

 

 

    • P. 44
    • 사랑의 종말은 타자의 존재 그 자체가 불편해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해체 과정은 떨어뜨린 유리잔처럼 한순간의 방심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하찮은 일상에 마모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사랑이 조그만 먼지가 모여 단단한 보석으로 결정되는 수정화 과정, 혹은 구축 과정이라면 그것의 해체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설거지가 사랑을 죽이는 것 같다. 당신은 한 번도 그것을 믿은 적이 없고 그런 진부한 이미지에 갇히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담배 연기가 짜증 난다. 그것이 징후이다. 당신은 그 징후의 해석을 거부한다.”
    • ― 「사랑의 적정가」 접기
    • P. 208
    •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언어에 귀결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프랑스 철학자가 이제 미국 대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라캉은 정 작 프랑스보다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미국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그들은 “포스트잇”으로 통했다. 몰락 위기에 몰린 인문학자, 특히 영문학 비평계는 아무 데나 라캉의 한 구절, 들뢰즈의 한마디를 끼워 넣어 글의 품위를 높이는 데 몰두하여 프랑스 철학자가 미국 비평계에서 편리하게 여기에서 떼었다가 저기에 다시 붙이는 포스트잇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이론은 일종의 지식계의 명품으로 통용되었고 위신재의 지위를 톡톡히 누리는 프랑스 이론가들은 미국 학술회의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은 대서양을 건너면 “문학화”되어 전문 철학자보다도 비평가들이 애용하는 방언이 되었고 대학평가제도로 서열화에 시달리는 미국 대학은 프랑스의 명품을 수입해서 전시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 ―「언어의 일곱 번째 기능」 접기
    • P. 317~318
    • 작가들 중 45퍼센트가 정부가 정한 최저 생계비 수준도 벌지 못하는 반면 4.2퍼센트의 작가가 월평균 10678유로(대략 1500만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 4.2퍼센트의 작곡가, 안무가, 사진가 중에서 소설가는 극소수, 즉 스무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스무 명은 매년 절반 이상씩 바뀌고 있다. 매년 꾸준히 베스트셀러를 내는 작가는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서울에서 바라본 프랑스 소설가의 날씨는 ‘대체로 흐림’, 혹은 항구적 빙하기이다. 남의 나라 날씨가 우리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감히 경제학자 흉내를 내본다면, 책 한 권을 사면 작가가 살고, 번역가가 살고, 출판사의 교정·교열 전문직이 살고, 인쇄소가 살고, 제지업자가 살고, 서점 주인, 도서관 사서가 살고, 내 집 문 앞까지 책을 가져다주는 택배 아저씨가 살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가 살아야 평론가가 그 곁에서 기생하며 겨우 살 수 있다.
    • ―「소설가, 대체로 흐림」 접기
    • P. 321~322
    • 우리의 모든 불행은 가족에 뿌리를 두고 거기에서 뻗어나간 비극의 가지와 결실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인간의 추한 모습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TV 드라마는 한결같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고, 신문과 뉴스는 현실이 이보다 더욱 잔인하고 처절하다는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증언한다. 동화가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만 소설은 그 이후의 환멸을 그려낸다. 그래서 적어도 유년기부터 가족을 이뤄 살아야 하는 포유류에 속한 인간은 불행하다. 그 진실을 증명하는 데는 세 명의 정족수만 채워지면 충분하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 그 꼭짓점에 한 사람씩 앉히는 것이 비극의 필요조건이다.
    • ― 「항상 행복한 가족」 접기
    • P. 341
    • 환갑을 넘긴 부부 앞에 요정이 나타났다. 요정은 금슬 좋게 살아온 부부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먼저 말문을 연 부인은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요정은 남편과 함께 떠나라며 호화 유람선 표 두 장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남편이 소원을 말할 차례이다. 남자는 “이런 기회가 두 번 다시 올 수 없을 텐데……”라며 망설이다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고 자기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동반하는 여자가 자기보다 서른 살쯤 연하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를 향해 마술봉을 겨누었다.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히자 남편은 아내보다 서른 살 많은 아흔 살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 ― 「소설, 심리적 표절」 접기
    • P. 436~437
    • 알제리 전쟁은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하게 지식인, 혹은 작가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제기했다. 개인의 윤리를 앞세워 집단의 불의, 특히 국가의 비윤리를 가차 없이 단죄하는 쪽에 설 수도 있고 집단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개인적 신념을 뒤로 미룰 수도 있다. 훗날의 역사는 주로 국가이성에 맞선 개인의 결단, 그 과감한 용기와 대쪽 같은 지성의 손을 들어주었다.
    • ― 「국가이성과 개인윤리」 접기

 

이재룡의 말

남들에게 마음 놓고 권할 수 있는 책은 시간의 검증을 거친 고전에 속한다. 고전은 불멸의 생명을 얻었지만 저자의 육신은 대부분 지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마차, 고작해야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고전의 세계는 지금의 시대감각에는 어긋나기 일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소설, 때때로 맑음 2』에 소개된 작가는 우리와 같은 시대를 호흡하고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는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대 문학을 골라 읽고 나아가 평가까지 곁들이기에는 다소 불확실성이 따를 수밖에 없다. 현지 문단의 반응이나 수상 경력 등 객관적 요소를 고려하여 작품을 골랐지만 어쩔 수 없이 필자의 개인적 취향도 개입했다. 또한 엄밀히 따지면 전기 (「화양연화」 「노인의 연적들」), 사회학적 보고서(「소설가, 대체로 흐림」)로 분류되는 글도 다뤘지만 나머지는 넓은 의미에서 소설이라 불릴 수 있는 터라 책 제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가급적 중복을 피하려 했으나 중요 작가가 발표한 신작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의 첫 문장을 대할 때마다 먼 훗날 고전으로 대접받을지도 모를 보석을 미리 읽는다는 작은 흥분이 동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