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밀한 확신 / 유혹의 산. 소설, 때때로 맑음 이재룡 비평에세이
농밀한 확신 / 유혹의 산. 소설, 때때로 맑음 이재룡 비평에세이
그리스 조각을 보고 나면 그 이후의 모든 예술은 코흘리개가 주물러 만든 조악한 키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세월이 흘러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사는 것이 편해져도 종교와 예술을 비롯한 인간의 정신은 그리스 시대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정신문명은 축의 시대[BC 9C ~BC 2C]를 넘어선 적이 없다는 야스퍼스의 주장).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가 거의 무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웅변적증거가 고대 그리스 조각이라 생각된다. 조각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국가가 실현하고자 표방한 민주주의는 여전히 그들이 이룩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는 그 찬란했던 문명이 무너지고 철학이 파괴되고 남의 속국이 되었다가 내전과 군사혁명을 거친 후 요새는 유럽 경제의 발목을 잡는 지진아 취급을 받는다.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는 아마도 아토스 산을 화두로 잡아 그 몰락의 시원을 짚어보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아토스 산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척박한 바위산을 걸어 수도원을 돌아다니고 『우천염천雨天炎天』이란 아토스 산과 터키를 관광한 기행문을 썼다. 제목에서 '우천'이 바로 아토스 산에 해당된다. 작가는 음식에 호불호가 분명하긴 하지만 바깥세상을 두루 주유한터라 개방적 미각을 지녔을 법하다. 그런데 아토스 산의 독거 수도승이 내놓은 음식만은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녁 식사 또한 끔찍했다. 우선 빵, 정말 형편없는 물건이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처럼 딱딱한 데다가 한쪽에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그것을 세면대에 넣고 수돗물로 불린다. 그다음에 그것을 체에 받쳐 물기를 빼고 주는 것이다. 물에 불려 주는 것만으로도 친절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차갑게 식은 콩 수프, 거기에 식초를 듬뿍 쳐서 내놓았다. 식초를 넣으면 힘이 난다고 그는 말한다.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맛은 엉망진창이다." 하루키는 독거 수도승의 움막과 식사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하루키가 머문 숙소, 그가 먹은 빵은 1000년 동안 아토스의 수도승이 잤던 곳이고 먹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그 빵마저도 끊고 며칠씩 금식하는 것 역시1000년간 지켜온 그들의 계율이다.
도망치듯 그곳을 떠난 하루키는 며칠이 지나자 "이상할 정도로 아토스가 그리워졌다"고 고백한다. 그런 감정은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음식은 "생생하고 실감있는 맛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 지저분한 원숭이 같은 수도승이 정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금도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수도사의 말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 그것은 종교를 운운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확신이란 점에서는 전 세계를 찾아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 찬 땅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신에 가득 찬 리얼 월드인 것이다." 하루키가 묘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농밀한 확신'이란 표현을 바실리스 알렉사키스의 용어로 번역하면 '철학의 여지가 없는 신학'이 된다. (계속)
이재룡 1956년 강원도 화천 출생.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브장송대학 박사학위저서 『꿀벌의 언어』. 역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욕조 사진기」 「장엄 호텔」 「일년』 『정체성』『포옹』『장의사 강그리옹』 『해를 본 사람들 이별 연습] 가을 기다림」 「거대한 고독』 『로즈의 편지』 『사랑하기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고야의 유령」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도망치기』『다른 사람으로 오해받는 남자」 등 현재 숭실대 불문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