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 교실의 철학 강의 노트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역사 3

도봉별곡 2023. 3. 6. 19:49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역사 3

column 2


'진공'은 실재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대논쟁

약 2400년 이상 전의 고대 그리스에서는 텅 빈 무(無)의 공간인 '진공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무(비존재)'에 대해 깊이 고찰한 사람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기원전 445?)라고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비존재, 무)'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원자론'의 제창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기원전 370?)와 그의 스승 레우키포스(Leukipos, 기원전 470?~?)는 진공(공허의 존재)을 알아차렸다. 데모크리토스 등은 모든 물질이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알갱이인 '원자(아톰)'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 원자가 돌아다니기 위한 무대가 되는 '공허(kenon)', 즉 텅 빈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 등은, 원자는 이 공허 속에서 밀집했다가 흩어졌다 하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믿었다.

그 후 등장한 사람이 저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384~기원전 322)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우주의 크기는 유한하며, 모든 장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로 가득 차 있어서 공허한 공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데모크리토스 등이 주장한 원자론을 부정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공허에 원자가 흩어져 존재한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공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그 후 200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인정되었다.

공허의 존재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대립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이 '원자'로 되어 있으며 원자는 공허 속을 운동한다고 주장했다(왼쪽).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불, 물, 흙, 공기'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공허의 존재를 부정했다(오른쪽). 또 천계(우주)도 에테르라는 제5의 원소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공허한 공간에 천체가 떠다니고 있다 - 데모크리토스의 생각
원자가 '공허' 속을 운동한다 -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
물질이 주위를 가득 채운다 - 에테르가 천계를 채운다
공기-불-흙-물 : 만물은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다.

 

 

column 3

'공자와 노자'에서 볼 수 있는 동양 철학의 윤리

윤리학이라는 말을 넓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는 사상 전반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동양 철학의 다수도 윤리학 측면을 지니게 된다. 단 현대 서양 철학에서는 윤리학이라는 말이 한정적으로 사용된다. 공리주의나 칸트주의 등 대표적인 논의를 중심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의 규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동양 철학에서는 어떤 성격을 몸에 지녀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된다. 이것은 현대 윤리학으로 말하면 '德 윤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이나 타이완에서는 덕 윤리학 관점에서 중국 철학을 현대 윤리학 안에 자리매김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동양 사상 가운데서도 공자(기원전 551?~기원전 479?)와 노자(?~?)의 사상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아 가치의 형성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로 발전했다.

실력주의 전성시대에 도덕을 말했다

공자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1경~기원전 5세기경)의 사상가이다. 이 시대는 질서가 흐트러지고 각지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패권을 다투는 실력주의 전성시대였다. 그때까지의 사회 구조가 사라지고 사회 불안이 급속히 퍼지는 가운데 공자는 인간 사회의 이상인 '도덕'을 강조했다. 도덕은 공자 사상의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동양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자 사상의 핵심 '인(仁)이란?

공자 사상 체계의 핵심에 '인'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의 기본적 의미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이른바 기독교적 사랑과는 다르다. 인에는 '공(恭)·관(寬)·신(信)·민(敏)·혜(惠)'이라는 다섯 가지 미덕이 있다.


상대방과 교류를 할 때 삼가고 존경하면 모욕을 받는 일이 없다(공).

마음이 넓고 온순하면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관).

성실하면 타인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다(신).

근면하게 노력하면 공헌을 할 수 있다(민).

자애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베풀면 사람을 부릴 수 있다(혜).

사람과 사람의 상호 관계(사회)의 이상형을 실현하기 위한 공자의 사상은 윤리의 틀을 넘어 문화가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진다.

공자는 가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위해 도덕 윤리를 생각했다

공자 사상의 기초인 '인'은 한자 사전으로 알려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그 의미의 구성 요소로 사람(人) 2명이 있을 때 인(仁)이라는 한자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인은 사람과 사람의 상호 관계 속에서 중요시되는 도덕 윤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 도쿠가와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는 공자가 창설한 유학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1690년에는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사저에 있던 공자묘와 사숙을 유시마로 옮겼는데, 이것이 유시마 세이도의 성립이다.


노자의 '도(道)’란?

역사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이 쓴 《사기》에 의하면 노자는 공자와 같은 연대의 사람이라고 한다. 노자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며 최종적으로는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도(道)'라고 표현했다.

예컨대 '아름답다'는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은 '추하다'는 생각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들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영원불변의 본질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구성되며, 생겼다 사라지고 끊임없이 형태를 계속 바꾸고 있다. 그 같은 존재에 대응하려면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어야 한다.

노자는 도를 자주 물에 비유했다/上善若水. 그에 따르면 사람이나 물체가 더 좋은 상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물처럼 온갖 물체에 혜택을 주면서 싸우는 일 없이 몸을 낮추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것이 노자의 윤리관이며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을 배양한 중세 · 근세 철학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은 13세기 이후 유럽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참된 지(知)’를 탐구한 철학자들의 여러 가지 사고와 실험이 17세기 무렵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제2장에서는 ‘중세·근세 철학’을 다룬다. 이 시대의 철학은 아직 철학과 과학이 나누어져 발전하지 않았다. ‘중세·근세 철학'이 과학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28. 오컴의 면도날

30. 근대 과학의 이념을 만들다

32. 자의식

34. 물리학과 결정론

36. 경험론 ①
38. 과학의 탄생
40. Column 4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슬람에 전해진 뒤 유럽에 재유입되었다
42. Column 5 신의 기댓값은 무한대? '파스칼의 내기‘

 

오컴의 면도날

 

오컴이 '신'을 철학에서 분리철학이 부활했다

여러 철학자에 의해 발전한 그리스 철학은 약 1000년 동안 유럽에서 불우한 시대를 맞게 된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철학이 유럽인들로부터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예컨대 자연 관찰의 중요성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원형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리하여 철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와 같은 합리성을 잃고 종교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40쪽 참조). 그리고 11세기부터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십자군 원정'에 의해 轉機가 찾아왔다. 이슬람과 유럽이 뒤섞임으로써 그리스 철학의 원형이 약 1000년의 시간을 지나 유럽으로 다시 유입된 것이다.

신의 영역과 철학의 영역을 '면도날'로 분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12세기 무렵부터 유럽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었지만 기독교와 알력을 빚게 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는 '세계에 기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여러 가지 차이가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철학의 이성적인 자세를 긍정하면서도 신에 대해 생각하는 '신학'이야말로 최상위의 학문이며, 철학은 그 아래에 위치한다고 주장했다. 신학과 철학의 상하 관계를 제시하면서 양자의 대립을 조정하려 했던 이 생각은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유명한 말에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컴(1285~1347)은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주장했다. 오컴은 '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를 갖지 않은) 존재나 개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 이상의 가정은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생각에 의해 관찰(경험)을 중시하는 철학과, 신 등의 개념을 사용하는 신학이 단절되었으며, 철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개념은 현대 과학의 지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13세기 무렵 활동한 이탈리아 태생의 신학자. 신학을 최상위의 학문이라고 하면서 그 아래 철학을 두었다. <신학 대전>을 저술해 당시의 신학을 알기 쉽게 정리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오컴

1285년 영국의 오컴에서 태어난 신학자·철학자. '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면도날'로 신학과 철학을 분리
신학의 영역(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것)을 철학의 영역(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에서 면도날로 분리하는 이미지이다. A씨와 B씨 등 개별 인물, 그리고 사과 A나 사과 B 등 하나하나의 사과는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에 포함되며, 인간의 개념이나 사과의 개념 등은 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것에 포함된다.

 

오컴의 면도날

신학의 영역(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것)
신의 개념
물고기의 개념

꽃의 개념-인간의 개념-사과의 개념

철학의 영역(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

꽃A, 사과 A, 꽃 B, 사과 B, 물고기 A, B씨, 물고기 B

 

근대 과학의 이념을 만들다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

과학의 탄생을 뒷받침한 철학자

14세기에 신학과 분리된 철학은 그 후의 중세 후기 및 근세에 눈에 띄게 발전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도 과학과 철학은 구별되지 않았다. 철학자들에 의해 과학이 탐구되고, 많은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천체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요하네스 케플러 (1571~1630), 아이작 뉴턴(1642~1727) 등의 철학자들이 지동설을 지지했다. 그때까지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에 근거한 세계관은 철학자들의 합리적인 검증 · 이론에 의해 뒤집혔다.


그러한 과학 발전기에 '근대과학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철학자가 나타난다. 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을 제안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1561년 영국 태생. 법률가, 정치가로 활약하면서 학문 연구의 존재 방식을 이야기한 철학서 《학문의 진보》를 출판했다. 60세에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는 철학 연구에 전념했지만, 눈 속에서 닭의 몸에 눈을 채워 넣는 냉동 실험을 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렴에 걸려 65세에 사망했다.

선입견을 버리고 실험을 통해 올바른 지식을 탐구

베이컨은 자연 현상을 관찰할 때는 선입견(idola, 이돌라)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여러 가지 선입견이 관찰 결과를 왜곡시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낼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예컨대 교회 권위의 기반이 되는 천동설이 옳다고 배운 사람들은 '천동설이 옳다'는 선입견에 의해 관찰 결과를 왜곡시켜보았다. 이와 같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자 '지동설'이라는 더욱 합리적인 결론에 이를 수 없었다.

베이컨은 나아가 실험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실험을 거듭해 물체의 운동 법칙에 다가간 갈릴레이처럼 주의 깊게 실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지식을 조금씩 획득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에 과학의 기본으로 자리 잡은 실험의 의의는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확립되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이 있다. 이 말은 경험에 의한 지식이야말로 자연을 규명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선입견을 없앤 관찰과 실험을 통해 올바른 지식을 얻는 방법을 베이컨은 '귀납법'이라고 불렀다. 그 신중한 태도야말로 과학의 탄생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지구 주위를 태양이 들고 있다는 ‘천동설‘에서,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로 세계관이 전환된 모습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