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불교를 만나다] 詩와 불교적 성찰, 삶을 깨우는 낯선 만남
[詩, 불교를 만나다] 詩와 불교적 성찰, 삶을 깨우는 낯선 만남
- 기자명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1. 프롤로그
‘생각’ 근원은 낯선 상황과 조우
의미 함축 詩, 사유 즐거움 불러
경전·법문 요약 ‘게송’ 시와 유사
시·불교 연결점 찾는 성찰의 재미
생각(生覺), 삶이 깨어나다
언제부턴가 불교 관련 수업을 할 때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서 시작을 한다. 내가 왜 불교를 믿는지,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가 지나치게 기복적이거나 때로는 왜곡된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앙은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폐하게 만든다. 종교가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종교를 걱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종교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도 제기된다. 사유가 결여된 무조건적 믿음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생각하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을 했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생각 없이 사는 경우가 많다. 대개는 어제와 같은 오늘, 업(業)에 이끌린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에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사람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생각이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과 조우할 때 일어난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익숙한 환경이 아니라 낯선 상황에서 생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운전을 하다 갑자기 시동이 꺼지면 차가 고장 났나 하고 생각을 한다. 육식을 좋아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채식만 한다거나, 긴 머리를 고집하던 아내가 머리를 짧게 자르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모두 낯선 상황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 역시 낯선 상황과 만나면서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계엄령 발동이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생각하였다. 시민들은 한밤중임에도 여의도로 달려와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민의의 전당 국회를 지켜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게 가장 놀라는 지점이기도 하다. 2024년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것보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시민의 힘으로 계엄을 해제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젊은이를 향한 기성세대의 편견과 선입견 또한 보기 좋게 깨졌다. 이제 더 이상 ‘요즘 애들은 이기적이고 생각 없이 산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젊은 10대와 20대들이 거리로 나와 주권자의 권리를 외치면서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지켜냈으니 말이다. 낯설고 비극적인 상황을 오히려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생생한 교육 현장으로 바꾼 셈이다. 12·3 ‘서울의 밤’과 탄핵 정국이라는 낯선 상황은 우리 스스로를 일깨우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젊은 싯다르타를 출가와 성도로 이끈 것도 실은 낯선 상황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궁궐에서 항상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이라는 익숙함 속에 있었지만, 어느 날 몰래 성문 밖을 나가 낯선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늙고 병든 사람과 죽은 시체를 만나게 된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아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는 6년간의 고행 끝에 마침내 성도에 이른다. 잠자고 있던 그의 삶(生)이 깨어난(覺) 것이다. 낯선 만남은 한 사람을 위대한 성자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낯선 상황과의 만남을 시와 불교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필자는 동화나 대중가요, 위대한 철학자와 종교인이 남긴 마지막 말 등을 통해 불교, 혹은 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글을 써왔다. 불교의 외연을 넓혀 철학과 문학 등 인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영역을 시로 확대하려 한다.
산문이 비교적 설명적이라면, 시는 압축적이다. 시인은 짧은 문장 속에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활용해서 다양하게 그려 넣는다. 때로는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장치를 동원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시가 어렵다고 여기는 이유일 게다. 그래서 시어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면 생각을 깊이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잠들어있는 우리의 삶(生)이 깨어나면(覺) 얼마나 좋겠는가. 시는 인간에게 사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좋은 소재다.
시(詩)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말씀 언(言) 자와 절 사(寺) 자가 합쳐져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만 보면 시는 ‘절에서 하는 말’이 된다. 물론 시(詩)라는 글자는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부터 존재했으니, 그런 의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와 절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깨침의 노래인 오도송(悟道頌)이나 입적의 노래인 열반송(涅槃頌) 모두 한 편의 시가 아니던가. 경전에도 수많은 게송(偈頌), 즉 시가 등장한다.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고 그것을 한 편의 짧은 시로 요약해서 마치는 경우가 많다. 시와 불교의 인연이 보통은 아닌 셈이다.
시와 불교의 낯선 만남
지난 몇 년 동안 교계신문에 대중가요와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가요에 담긴 불교적 의미를 찾아내 오늘의 시선에서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다보니 해당 노래를 부른 가수가 글을 읽고 연락을 해와 인연을 맺은 경우도 있다. ‘동행’을 부른 최성수 가수가 대표적이다. 가수는 어느 날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을 만들었다며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시를 음미하면서 낯선 상황이 가져다주는 성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감상해보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엄마는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되는 줄 알았다고 노래한다. “찬밥 한 덩이로 부뚜막에 앉아 대충 때워도”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자식은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알았는데, 평소와는 다른 낯선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엄마가 한밤중에 소리 죽여 우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이를 지켜본 본 자식은 그제야 비로소 엄마라는 존재를 깨닫고 이런 성찰을 한다.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다. 시인의 지적처럼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되는 엄마는 없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그런 엄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엄마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런 엄마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다만 자식들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혼자 울고 있는 엄마의 낯선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자각하게 된다. 당신도 나처럼 똑같이 아프고 힘들다는 사실을. 낯선 상황과 만나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잠자고 있던 삶(生)이 깨어나는(覺) 순간이다.
이처럼 낯선 상황과의 만남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져다준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 글은 시와 불교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고 그 속에 담긴 불교적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인문학의 근본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오늘의 시선에서 성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소개하는 시와 불교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본래 불교적 의미를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간극을 나름의 논리와 해석을 통해 좁히려 한다. 개인적으로 즐거운 사유의 시간이 될 것 같다.
과연 시와 불교가 만나면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시라는 인문학의 바다에 풍덩 빠져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고 불교라는 새로운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려 한다. 아마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도 들을 것이다. 그래도 즐거운 여정이 되지 않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와 불교가 만나는 여행에 동참하면 좋겠다.
이일야 학장은...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과 사)부처님세상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13회 불교출판문화상 대상)와 〈철학자와 함께 읽는 동화〉(2020세종도서), 〈불교에 대해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