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붓다의 14무기(無記)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붓다의 침묵에 대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붓다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 무지했거나 아니면 실천적인 행동가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불교 「전유경(箭喩經, Cūlamālunkya-sutta)」에 붓다는 형이상학자를 마치 화살을 맞고 치료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 화살이 어떤 화살인지 어디서 날아 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바보와 같은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왜냐하면 화살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은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전에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 고로 형이상학적 추구란 영적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로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원시불교 당시 사상계에서는 초경험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 논의의 대상으로 되었는데 이에 대한 여러 학설이 서로 대립되어 날카로운 논쟁을 하였다. 즉 모두 자신의 주장만이 진리라고 하였는데 불타는 이러한 논쟁은 부질없는 희론(戱論)으로 간주하였다. 고로 그는 부질없는 논쟁을 배척하면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답변했다. 왜냐하면 붓다는 여러 가지 철학적인 견해가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고 있는 편견(偏見)으로 이러한 집착을 떠나서 마음의 적정(寂靜)이 희론이 적멸(寂滅)된 진정한 열반이라는 것이다. 회의론자(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상대적이라고 보아서 진리의 절대성을 의심하고 궁극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 밧차고따(Vacchagotta)가 붓다와 그의 제자들에게 물은 질문인 14무기(十四無記, 難問)란 ‘무조건적 존재자’에 대한 것들로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영원한가, 아닌가, 양자(兩者: 영원하면서 영원하지 않는 것)인가, 양자가 아닌가?
2)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有限)한가, 무한(無限)한가, 양자인가, 양자가 아닌가?
3) 여래(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아닌가, 양자인가, 양자가 아닌가?
4) 영혼은 육체와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가?
위의 변항들의 구성을 보면 우선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가 기본을 이루는데 이 기본적 변항 두 가지를 연언적(連言的, and)으로 긍정함으로서 제3의 변항이 된다. 그리고 두 가지를 선언적(選言的, or)으로 부정함으로써 네 번째 변항이 된다. 붓다의 무기가 유명한 중관파의 사구(四句, Catuṣkoṭi)와 같다는 점이다. 붓다는 모든 사변 체계는 독단론(주관적 편견으로 어떤 판단을 주장하거나 긍정하는 이론, Diṭṭhi-vāda)이라 취급하면서 상주론(常主論)이나 단멸론(斷滅論) 사이의 대립에 대해 붓다 자신의 근본적 대립을 내세웠다.
질문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직접 대답할 수 있는 것
둘째, 대답하기 전에 분석 작업을 요하는 복합적인 질문
셋째, 그에 대해 반문함으로써 답변을 대신할 수 있는 질문
넷째, 전혀 대답할 수 없는 질문(Sthāpanīya)
2. 실재(實在)란 사고(思考)를 초월해 있다.
붓다는 다른 사상가들과 달리, 우리의 경험에 의해 초월적인 절대를 인지(認知)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여래(如來)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여래’ 또는 ‘절대’는 사량(思量)과 형상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여래는 마치 대양과 같이 너무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대양을 여기서 대양이 시작한다든지 그렇지 않다든지 하는 말은 당치 않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진상(眞相)에 대해서는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하다.
독단론자들은 초월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과 혼동해서 형상(色)이나 감수작용(受) 그리고 식별작용(識) 따위를 자아(自我)라고 부른다. 반면에 붓다는 그런 것들을 ‘자아’라고 보지 않고 또 자아가 형상(色)을 소유한다거나 자아 속에 형상이 있다거나 형상 속에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붓다는 실재(實在)란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밧차고따가 침묵의 답을 듣고 자리를 뜨자 붓다는 자신의 견해를 아난에게 이야기했는데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그 유랑자(밧차고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만약 내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아난이여, 상주론자(常主論者)인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의 편에 서는 것이 된다. 아난이여, 그렇다고 만일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아난이여, 단멸론자((斷滅論者)인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의 편에 서는 것이다. 게다가 아난이여, 그 유랑자가 ‘자아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있다고 대답했다면 나의 대답이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지혜와 일치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또 아난이여, 유랑자 밧차고따가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당혹해 하는 밧차고따를 더욱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나는 확실히 자아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밧차고따의 질문에 붓다가 그렇다거나 아니라고 했다면, 즉 네 가지 변항들 가운데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말했다면 붓다는 자신이 맹렬하게 비난했던 그 독단론의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비판이라 모든 현상들을 오염시키는 상대성을 초월하는 작업인데, 그는 경험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태도에 충실하였기에 다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사변(四辨, 생각하고 분별함)이란 모두 독단적으로 다만 이론이다. 밧차고따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지만 붓다는 자기 자신만의 이론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오, 밧차고따여, 여래란 모든 이론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밧차여, 여래는 이것을 알고 있다. 형상의 성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형상이 일어나고 어떻게 형상이 사라지는지.... 그리하여 여래는 해탈을 얻었느니라. (여래는) 자아에 대한 모든 상상이나 주저함, 잘못된 지식에서 자유로운 만큼 집착에서 자유로우니라. 또는 자아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소멸하였고, 꺼져 버렸고, 방기(放棄)되었고, 포기되었느니라.
붓다는 상주론(常主論, Śāśvata-vāda)이나 단멸론(斷滅論, Uccheda-vāda), 또는 긍정과 부정의 평범한 대립을 독단론과 비판론간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대체시켰다. 이것이 바로 중도적 입장(Madhyamā pratipad)이다. 하지만 이 중도적 입장이란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한 제3의 입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양자를 파기(破棄)한 무입장(無立場)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한 차원의 높은 데 있다.
3. 붓다의 침묵의 의미
붓다는 진리를 설함에 있어서 조금도 숨기거나 지체하지 않았으며 또 숨김이나 또는 차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가르쳤다. 형이상학을 무시했기 때문에 침묵을 지킨 것이 아니다. 다만 붓다는 그 시대의 철학사상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범한 형이상학자였다. 철두철미한 분석을 통하여 붓다는 우리 인간의 ‘이성’의 독단적 진행 과정을 파기하고 초월한 단계위에 도달 해 있었다.
붓다는 자신의 교리와 영적수행의 목적이 되는 열반이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열반’이란 모든 고통과 변화를 초월한 것이며 고요하고 노쇠하지 않으며 더러움 없고 평화로우며 지복(至福)의 상태라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을 불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다. 붓다는 절대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존재라든지 비존재라는 경험적 용어의 옷을 입히거나 규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침묵은 ‘무조건적인 실재’가 그 성격상 말로 표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알고 있었다.
라다크리쉬난 박사는 붓다의 침묵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일, 붓다가 ‘절대’의 본질을 규정하기를 거부했거나, 부정적인 정의(定義)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면, 그것은 단지 절대적 존재는 모든 한정(限定)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면 어째서 붓다는 절대의 실재성을 어떤 용어로 표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붓다는 절대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말로 ‘절대’를 설명할 경우, 그가 최초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했던 그런 원칙을 어기고 상대의 세계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절대란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세계는 그 한계 내의 어디에서도 절대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
우빠니샤드에서 브라흐만(절대)을 언어나 생각으로 구사할 수 없어 ‘네띠, 네띠(neti, neti)라고 규정하는 방식은 붓다의 침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교와 우빠니샤드 철학사상이 다른 것은 브라흐만은 한정(限定)을 벗어난 니르다르마(Nirdharmaka, 어떤 법이나 요소도 갖지 않는)이다. 그러므로 비실재라기 보다는 유일한 실재이면서 전 우주의 영혼이다.
4. 이제설(二諦論)
진제와 속제, 이제설은 불교의 중요한 교의(敎義)이다. 이제설(二諦論)은 산스끄리트, Satyadvaya로 진제(眞諦, Paramārtha-satya)와 속제(俗諦, Saṃvṛti-satya)로 붓다와 중관불교(中觀佛敎)의 가장 중요한 특색이다. 특히 중관불교는 붓다의 침묵을 이 이제설에 의거하여 잘 설명해서 사람들을 미혹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이제설은 우빠니샤드와 원시불교의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관학파만이 이제설을 중심적 이론의 주제로 구분했고 그리고 조직적으로 구성 또는 체계화 시켰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속제에 속하며 반면에 절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반면에 중관불교의 창시자 용수(Nāgārjuna, C. 150-250 C.E.)는 이 절대를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즉 절대는 긍정적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 때문에 중관불교는 타 학파나 철학자들로부터 부정주의 또는 허무주의라는 비방도 받기도 하였다. 용수는 공관(空觀)이 ‘아무것도 없음’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렬하게 경고했다. 용수는 이러한 공관을 ‘아무것도 없음’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자들이 진제와 속제 사이의 구분의 중요함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용수는 공관 이론은 이 이제설에 의하여 탐구되어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진리의 두 종류, 진제와 속제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사실 용수는 속제의 실재인, 물질, 동작, 인연, 팔정도, 연기설, 붓다, 용수 등은 속제적인 관점에서 수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공관 즉 실재의 특징은 진제에 흡수되어진다. 이제의 독특한 특징은 이들이 ‘틀린 것’이나 ‘옳은 것,’ 또는 ‘잘못된 것’이나 ‘진실한 것’ 등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속제는 결코 진제가 될 수 없지만 진제는 항상 속제로 변환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관불교에서는 진제와 속제의 사이의 구별은 실재(Reality)에 있어서 지식(인식, Epistemic)에 관한 것이지, 다름(differenc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는 다만 하나이지 둘(advaya)이 아니다.
1) 속제(俗諦, Saṃvṛti-satya, Empirical Truth)
일본의 나가오(Nagao) 교수는 속제의 산스끄리트를 언어학적인 면에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구분하였다. 하나는 'saṃ-√vṛ → Saṃvṛti(삼브리띠)로 ‘진리를 숨기다’라는 뜻으로 이는 무명 또는 무지(Ignorance)로 인하여 진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saṃ-√vṛ → ‘Saṃvṛtti’로 ‘되다’ 또는 ‘시작하다’라는 의미로 중관불교는 전자를 수용하는 반면에 유식에서는 후자를 선택해서 사용한다. 게다가 불교 경전이나 이러한 경들의 논(論)들은 전자의 스펠링을 사용한다.
용수는 말하기를 “진제는 속제 없이는 표현될 수가 없다고 속제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열반은 진제의 깨달음 없이는 도달되어지지 않는다.” 속제는 불교의 방편(方便)에 의해서 손가락에 비유되어진다. 즉 「Laṅkāvatāra-sūtra」의하면 다음과 같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데 필요하지만 그러나 손가락 자체는 달을 가리키는 데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와 같이 진제는 속제를 통하여 말하여지는데 이는 진제를 위하여 속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비유는 노인이 너무 늙어서 혼자서 걸을 수 없지만 그는 지팡이를 의지해서는 걸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이 불교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다. 이와 같이 속제는 열반에 도달하는데 소용없다고 하거나 또는 진제와 속제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즉 진제는 말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데 이 말은 관습 또는 관례적이면서 조건적이다. 그러므로 속제는 다만 방법이며, 반면에 진제는 목표(目標, End)이다. 즉 현상적인 면에서 보면 이들의 관계는 다 서로 의존한다.
2) 진제(眞諦, Paramārtha-satya)
진제란 불교가 말하는 궁극의 참된 실재로 승의라는 뜻이다. ‘승(勝, Parama)’과 ‘의(義, artha)’의 복합어로 ‘승의’란 최승(最勝)의 무분별지(無分別智)에 의해서 알려질 세계이며 동시에 최승(最勝)의 무분별지가 작용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무분별이기 때문에 모든 희론에 희론되지 않는 적정이요, 무분별이기 때문에 차별이 아닌 절대적인 진리이다.
용수는 인간의 삶의 목표는 깨달음으로 이 깨달음(Nirvāṇa)을 존재론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진여(Absolute), 진제(Paramārtha-satya), 공(Śūnyatā) 또는 실재(또는 실상, Tattva)라고 한다. 즉 이 진제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진제는 표현되어지지 않으며, 단지 스스로(One's own-self)에 의해서 깨달아진다. 진제(Reality)는 단지 부정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해되고 깨달아지는데 마치 우리가 속제를 제거해 버리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이미 실재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고로 중관불교가 진제를 설명하는데 사용한 방편으로 부정적인 표현은 부정주의나 허무주의가 아니다.
[출처] 붓다의 14무기(無記)|작성자 수처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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