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국력이 융성할 때 중국엔 늘 ‘帝國의 피’가 흘렀다/2010.09.19 00:20


“중국인들은 모든 정복자들을 거꾸로 정복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민족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이다. 중국을 한때 정복했던 몽골·거란·만주족이 한족(漢族) 문화에 동화된 사실(史實)을 압축한 표현이다. 중국의 마지막 세 왕조는 원(元)-명(明)-청(淸)이었다. 한족의 중국은 이민족들이 정복한 영토와 역사와 문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중화제국(中華帝國)’을 구축했다. ‘팍스 몽골리카’ 시기에 몽골인은 서유럽·인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면적 3300만㎢)을 점령했다. 로마제국의 최대 판도보다 5.6배나 더 넓었다. 청나라 전성기였던 18세기에 만주족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훨씬 넓은 영토(1470만㎢)를 지배했다. 중국 역사 속에는 국력이 강할 때면 주변국을 정복하는 ‘제국의 DNA’가 흐른다. 그럴 때마다 주변국들은 전쟁과 평화 사이의 갈림길에 섰다. 예컨대 몽골 제국은 티베트와 대리국(大理國:현재 윈난(雲南) 지역), 고려를 복속시켰다. 하지만 독립국으로 남은 지역은 한반도뿐이다. 몽골 제국 이후 치열했던 역사를 되돌아본다.

G2로 떠오른 중국, 주목해야 할 ‘차이나 파워’의 향방



 

중국 대륙에선 통일이 오래되면 갈라지고, 분열이 오래되면 통합됐다. 진시황 통일 이후 2200년간 치세와 난세가 교차했다. 역대 왕조들의 영토는 확장과 수축을 시계추처럼 반복했다. 한족 왕조의 ‘소(小)중국’이 분열 시대를 겪다가 이민족과 혼혈 왕조가 세운 ‘대(大)중국’으로 바뀌곤 했다.

G2로 떠오른 중국, 주목해야 할 ‘차이나 파워’의 향방

진(秦)·한 제국은 현대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넓이였다. 북방한계선은 만리장성, 서쪽은 실크로드를 겨우 개척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혼혈 왕조인 당(唐)은 북방과 서방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송(宋)은 다시 한나라와 비슷한 ‘소중국’으로 돌아갔다. 요(遼), 금(金), 서하(西夏) 이후 등장한 몽골 제국은 ‘대중국’으로 부활했다.

주원장이 세운 명은 ‘소중국’에 머문 반면 만주족의 청은 ‘대중국’을 복원했다. 청나라 멸망 이후 외세 침략과 혁명, 내전 등 수십 년간의 혼란 끝에 1949년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대중국’의 전통을 잇고 있다.

‘대중국’ 중에서도 최대 판도를 자랑한 몽골인의 대원(大元)과 만주족의 대청(大淸). ‘중국’이란 프레임만 가지고는 세울 수 없는 제국이었다. 대원과 대청은 내륙아시아에서 탄생한 정치세력이 중국을 정복한 다음, 중국 고유의 정치·경제·문화 역량을 흡수·포용하면서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섰다. 몽골과 만주족은 또 중국을 둘러싸고 있던 이민족들에 대해 정복·응징·포섭을 통해 거대한 연대를 이뤄냈다. 티베트, 위구르, 남만(南蠻) 등을 묶는 이른바 ‘이민족 연방’을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대원·대청 제국을 한족의 다른 왕조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이를 ‘중국 왕조’ 중 하나로 당연시하는 것은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이적(夷狄)의 제국’이 구축한 외경(外境)을 중화제국의 외경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실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중국이 비(非)중국에 편입된 것이지 중국이 비중국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세계사적인 ‘이민족 연대’가 이뤄졌을 때 한반도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고려, 외교력으로 독립국 위상 유지
“고려는 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서, 당 태종이 친정을 했어도 복속시키지 못했다. 지금 그 세자가 내게 스스로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대원을 세운 쿠빌라이(1215~1924:몽골의 5대 칸)가 칸 즉위 전인 1259년 말 고려 태자 전(<500E>:훗날 원종)을 만나서 한 말이다. 이 만남은 뭉케(4대 칸)가 1259년 남송(南宋) 친정 도중 급사한 뒤,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 사이에 치열한 후계싸움이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 이뤄졌다. 당시 고려는 1230년 압록강을 건너온 몽골 기병의 말발굽 아래 30년간 전 국토가 유린된 상태였다. 대몽 강경론을 펼치던 최씨 정권이 정변으로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내부적으로 투항을 결정했다. 특사로 태자가 파견됐다.

태자가 중국에 도착해 보니 1인자 뭉케는 이미 사망했고, 실력자 아릭 부케는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빌라이는 장강(長江) 북쪽에서 동조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권력의 갑작스러운 공백에 제국이 동요할 때였다. 정세를 관망하던 태자는 쿠빌라이와 만난 자리에서도 투항을 선언하지 않았다. 때마침 부친 고종(高宗)의 부음 소식을 들은 태자는 쿠빌라이가 개평(開平:현재 내몽고 남부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개최한 쿠릴타이(몽골식 권력계승을 위한 대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귀국했다. 나름대로 몸값 높이기에 들어간 셈이다.

쿠빌라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고려에 조서를 보내 “지금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자는 오직 고려와 송나라뿐”이라며 신속(臣屬:군신관계)을 강요했다. 조서에는 회유책도 포함돼 있었다. 귀국 후 왕위에 오른 원종은 다시 한번 승부수를 걸었다. 고려는 몽골의 후계싸움에서 쿠빌라이의 손을 들어주는 대가로 ▶압록강 유역의 몽골군 철수 ▶다루가치(원이 설치한 민정기관) 철수 등 여섯 항목의 양보를 얻어냈다. 이때의 여·몽 화의 덕에 고려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 위상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269년 고려의 권신이던 임연(林衍)이 쿠데타를 일으켜 원종을 폐위시켰다. 마침 쿠빌라이를 만난 뒤 귀국 중이던 세자 심(諶:훗날 충렬왕)이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세자는 쿠빌라이에게 병력 3000명을 받아 함께 돌아왔다. 원종은 복위됐고, 이에 대한 감사 표시로 몽골의 공주와 세자의 혼인을 요청했다. 고심하던 쿠빌라이는 “짐의 친자식들은 이미 모두 시집을 갔으니, 형제들과 의논하겠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반몽 항쟁세력인 삼별초의 난은 쿠빌라이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다. 고려와 남송의 연맹 가능성을 우려하던 쿠빌라이는 1274년 친딸 쿠틀룩 켈미시와 세자 심을 결혼시켰다. 이로써 고려왕은 속국의 군주임과 동시에 황실의 부마라는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다. 이런 부마국 관계는 공민왕까지 5~6대에 걸쳐 계속됐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고려의 정치적 위상은 몽골 제국 안에서도 매우 특이한 사례”라며 그 이유를 고려의 절묘한 투항 시점과 협상술로 설명한다.

서하·대리국·티베트, 다른 길 걸어
티베트와 윈난 등 중국의 서부 지역도 몽골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의 간쑤(甘肅)성 일대는 탕구트 족이 세운 독립왕조 서하(西夏·1038~1227)가 지배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서하에 침입했다. 서하의 군주는 항복하고 군대를 지원했지만 훗날 칭기즈칸이 서아시아 원정에 나설 때에는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서하는 몽골과 동맹을 파기하고 여진족과 연대했다. 서하의 배신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1225년 서하를 철저하고 잔혹하게 말살했다.

윈난을 지배하던 대리국(大理國·938 ~1253)은 쿠빌라이의 침공에 힘없이 무너진 이후 아예 대륙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반면 티베트는 몽골 제국과 ‘스님-시주(施主)’라는 독특한 관계를 맺었다. 정복이나 복속과는 다른 차원의 동맹관계였다.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지시로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특히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팍빠를 종교적인 스승으로 모셨다. 둘이 만나면 팍빠를 윗자리에 앉힐 정도였다. 칸에 즉위한 쿠빌라이는 팍빠를 나라와 황제의 스승으로 선언하고, 대보법왕(大寶法王)에 책봉했다. 즉 세속 정치는 몽골 칸이, 영적인 종교 문제는 티베트 라마교가 맡는 일종의 분업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런 관계는 명나라 시기에 명목적인 조공관계로 이어지다 청 제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됐다.

이민족 지배자와 달리 한족의 중국은 중화사상을 신봉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황명조훈(皇明祖訓)’이란 유훈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방의 모든 오랑캐들은 산과 바다로 막혀 있어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부릴 수가 없다.…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일시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하지 말라. 단, 호융(胡戎:몽골을 가리킴)과 중국은 변경을 맞대 대대로 전쟁을 해왔으니 조심스럽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즉, 명나라는 선제공격보다 방어에 주력한 것이다. 주원장이 조선, 일본, 유구(琉球:오키나와), 안남(安南:베트남) 등을 ‘정벌해서는 안 될 15개 나라’로 열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선언에 불과했다. 고려-여진-몽골 연합의 탄생을 두려워한 주원장은 요동 장악에 성공하자 고려와 단교하고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다. 이에 고려는 최영을 앞세워 요동정벌을 추진했는데, 이 결정이 잘못됐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뒤 조선을 세워 친명사대(親明事大)를 표방했다.

청 태종, ‘삼전도 치욕’ 뒤 조선을 배려
“상(上: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칸(홍타이지)은 남쪽을 향해 앉았다. 상은 동북쪽 상석에서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세 명이 차례로 앉았다.…칸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여러 신하들에게 ‘이제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라’고 말했다.”
1637년 음력 1월30일, 청군과 45일간 대치하던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삼궤구고두(三<8DEA>九叩頭)에 이어 펼쳐진 연회의 좌석 배치는 꽤나 흥미롭다. 당시 중원 정복을 꿈꾸던 홍타이지가 최고 상석에 앉았다. 조선 국왕 인조는 2인자의 자리에 앉았다. 패전국 수장에 대한 대우로는 파격적이었다.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훗날 순치제의 섭정으로 활약한 도르곤마저 인조보다 아랫자리에 앉았다. 이날 삼전도의 이벤트는 만주족이 중국 점령 전에 만주·몽골의 다른 종족들을 포섭할 때 삼궤구고두와 활 쏘기를 했던 전통과 일치한다.

더욱이 조선이 항복한 후 청이 파견한 칙사들은 한인 관료가 아닌 팔기(八旗) 출신 고관들이었다. 같은 조공국이었던 유구·안남에 직급이 낮은 한족 문관을 파견했던 것과 격이 달랐다. 청은 조공 사절에게 베푼 공식 연회 요리에서도 조선 사절, 몽골 부마,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에게는 5등급의 요리를 하사했다. 다른 나라의 사절들보다 한 단계 높은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淸제국 영토, 현대 중국의 1.5배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유전자가 하나의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키메라는 청 제국의 성격과 ‘멋지게’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출간 예정) 조선과 유구가 다른 범주에 속한 이유도 청나라의 서로 다른 DNA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음은 청 제국의 수립 과정이다.

누르하치가 24살(1583년) 때 30명을 이끌고 시작한 제국 건설의 꿈은 180년 후 6대 손 건륭제가 현대 중국의 1.5배에 달하는 영토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267년간 지속된 청 제국은 몽골 제국의 대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초원으로 쫓겨간 것과 달랐다.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만주문자와 팔기제도를 만든 것은 청 제국 건설의 첫 단계였다. 2대 홍타이지는 우선 몽골 제국의 후계자인 내몽골의 차하르 세력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여진(女眞)을 만주(滿洲)로 바꾼 홍타이지는 1636년 후금을 대청(大淸)으로 바꾸면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황제 추대식에 조선의 동참을 요구했다. 인조는 정묘호란 패배 뒤 후금의 한(汗) 홍타이지는 인정했지만, 대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획득’에 나서 성공했다. 그는 만주팔기·팔기몽고·팔기한군(漢軍)으로 이뤄진 만·몽·한의 제국을 세우고 명나라와의 결전을 시작했다. 키메라의 근간이자 머리에 해당하는 만주·몽골 유전자가 완성된 것이다. 조선도 여기에 속했다. 명나라에 앞서 대청의 우익인 몽골과 함께 제국의 좌익에 편입된 것이다.

명의 농민반란은 청 제국의 완성을 촉진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숭정제)가 자살한 것이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팔기군은 주저 없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장악했다. 그해 10월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이미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로 즉위한다. 이제 키메라의 몸통, 즉 한족 유전자를 결합한 것이다.

강희·옹정·건륭제는 외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자치구) 등을 차례로 제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키메라의 팔 다리에 해당하는 번부(藩部)가 완성됐다. 이들 지역은 이민족을 관리하는 이번원(理藩院)이라는 별도 행정조직을 통해 다스렸다.
만(滿)-한(漢)-번(藩), 머리-몸통-사지의 DNA가 각각 다른 키메라라는 대청 세계제국, 즉 ‘팍스 만주리카’는 이렇게 완성됐다. 청나라 황제는 ‘소중국’ 한족의 세상에서는 수명천자, 몽골 유목민에게는 대칸, 티베트 세계에서는 문수보살(불법의 수호자) 황제, 위구르의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 만주 기인(旗人)들에게는 누르하치의 계승자로 비춰졌다. 몽골 제국과 명 제국, 즉 이민족과 한족을 아우르는 ‘듀얼 엠파이어’가 대청제국의 본질이었다.

내년은 대청제국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청나라를 계승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사를 편찬하는 ‘청사공정(淸史工程)’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국은 56개 민족을 포괄하는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내적 통합을 추구하는 한편, 밖으로는 G2 시대를 모색하고 있다. 바야흐로 ‘제국의 DNA’를 표출하려는 시기인 것이다. 한·중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한국이 ‘차이나 파워’의 향방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