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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로마제국의 멸망

서로마제국의 멸망

분류 서로마 제국

 

로마 제국
Imperium Romanum (라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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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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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서로마 제국의 최대 강역[1]
395년 ~ 4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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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서로마 제국
위치 남유럽서유럽북아프리카
동방 동로마 제국(395-1453)
수도 메디올라눔(밀라노) (395년 ~ 402년)
라벤나 (402년 ~ 455년)
로마(455년~473년)
라벤나(473년~476년)
언어 라틴어 (공용어)
갈리아어
게르만어
베르베르어
기타 지방 언어
종교 고대 로마 다신교 (380년 이전)
니케아파 기독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임페라토르)
주요 황제 호노리우스 (395년 ~ 42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422년 ~ 455년)
마요리아누스(457년 ~ 461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년 ~ 476년)
주요 실권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성립 이전 최종 분할 통치 이전 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
오도아케르의 정권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부르군트 왕국
수아송 왕국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역대 황제

3.2. 최종 분할 이전

3.3스틸리코와 알라리크

3.4훈족과 아에티우스

3.5최후의 순간

4. 멸망 이후

5. 관련 문서

6. 관련 창작물

7. 역사보기 틀

 

1. 개요[편집]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일컫는 용어.

 

395년 1월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들이 제위를 승계하면서 최종 분할된 로마 제국 중 서부지방을 서술한다. 81년간 존속하였고, 476년에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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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최후까지도 갈리아 북부와 이탈리아 반도달마티아 지역은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고, 아직 게르만족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명군 자질이 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황제에게 조금 더 오랜 시간이 주어졌다면 훨씬 더 오래 존속했을 수도 있었다.

2. 상세[편집]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가 메디올라눔(밀라노)에서 사망하자 아르카디우스는 제국 동부를, 호노리우스는 제국 서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은 훨씬 이전부터 동-서 양 영역에 각각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이후, 이미 동-서에 각각 정제와 부제가 있었으며, 한동안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율리아누스 치세하에서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이후 다시 양쪽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일도, 서방참제 에우게니우스를 토벌한 394년 9월부터 그가 사망한 395년 1월까지의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던 찰나의 기간이었다. 제국의 분할 통치가 영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395년을 흔히 분열의 시기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후에도 동-서 두 제국은 '하나의 로마'라는 보편적 인식을 유지했으며, 5세기의 다사다난했던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 제국의 분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역사 서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도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 상실'이다.

 

분할 이전부터 자금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제국 동부와는 달리 제국 서부는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고 게르만족의 침공에도 항상 시달려야 했다. 동로마를 12세기 말까지 강대국으로 지탱해주던 그리스 및 소아시아, 로마의 빵 바구니라 불리던 이집트 등 알짜배기 지역은 모두 동로마가 가져갔다. 지금이야 서로마 지역(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과 동로마 지역(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옛 유고 연방, 터키,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을 비교하면 쟁쟁한 선진국들이 포진한 서로마 지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지만, 당시에는 농업생산량과 교역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동방에 비해 국력이 떨어졌다. 영국, 스페인은 현대에도 농사짓기 썩 좋은 국가가 아니고, 프랑스는 농사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간이 덜 되어 숲이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양 무역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오히려 세계와 더 연결이 잘 된 지역이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이 대세이던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는 무역로에서 동떨어진 변방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현재 알제리와 튀니지가 위치한 북아프리카 지역이 당시에도 크기는 작지만 서로마에서 가장 세수가 잘 걷히는 비옥한 땅이었다.

 

제국 분할 이후 50여 년간 서로마는 스틸리코콘스탄티우스 3세[8]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무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오레스테스 등의 실권자가 황제를 쥐락펴락하였으며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

 

동로마는 수도 밖의 거의 모든 땅이 적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치열한 공성전 끝에 수도가 함락되는 방향으로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했지만, 서로마의 멸망 과정은 사뭇 다르고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의 형태가, 서로마 중앙정부에서 더 이상 제대로 이민족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역이용당해서 하나하나씩 지방 속주의 영토와 서로마 군대의 주요 보직이 게르만인에게 넘어가다가 마침내 오도아케르가 동로마에 바치는 형식을 빌려서 서로마 황제직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멸망한 것이다.

3. 역사[편집]


크게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시대, 제국 분할 이전 (~395)

스틸리코의 섭정시기 (395년 ~ 408년)

무능한 호노리우스의 삽질과 1차 로마 약탈 (408년 ~ 410년)

콘스탄티우스 3세의 재건시기 (411년 ~ 421년)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 상실 (422년 ~ 433년)

아에티우스의 집권과 훈족의 침공 (433년 ~ 454년)

두번째 로마 약탈과 혼란기 (454년 ~ 457년)

마지막 제국 재건 시도 (457년 ~ 468년)

종말 (468년 ~ 476년)

3.1. 역대 황제[편집]


자세한 것은 서로마의 역대 황제를 참조.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로마 제국의 서방 속주들을 통치하게 된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처형하는 등 무능의 극치를 달렸고 그의 통치 시기에 로마 약탈과 브리타니아 속주가 로마의 영향력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의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암살당했고 그의 사후 서로마 제국의 붕괴는 더욱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 게르만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황제들이 등극하기 시작했고[9] 마지막에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가 퇴위당하면서 제국은 소멸한다.

3.2. 최종 분할 이전[편집]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제국의 멸망은 제정이 시작됨에 따라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넓어지는 국경을 방어할 병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면서, 제국은 많은 군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제국의 행정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방의 많은 수의 군대를 제국이 통제하기 힘들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군인 황제시기를 거치면서 황제가 수시로 교체되자 황제의 권위는 추락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자 각지에서 반란을 비롯한 불온한 움직임이 심상치않게 가시화되었다.

준 내전상태에 빠진 제국은 행정력의 약화와 더붙어 야만족의 침공이 이어지면서 로마 제국은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혼란 속에 제대로 된 정치는 불가능했고 군사력의 약화로 이민족의 침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면서 황제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는등 제국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연이어 발생하는 반란과 급상승하는 물가와 국경지대의 불안에 대응하기위해 제국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전제정을 실시하기 전까지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않았다.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전제정을 실시함으로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됐지만 거의 1백년 동안 지속된 내전에 제국의 경제와 행정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렇기에 군인 황제시기 동안 약화되어 누더기가 된 제국을 황제 한 명이 통치하는건 힘들었고 제국을 분할해 1명의 정제와 3명의 부제를 두어 제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로마제국은 부제들의 내전에 돌입한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막시미아누스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3명의 부제가 추가적으로 더 출현해 제국을 사실상 5등분해 다스렸다.

 

내전의 승자는 콘스탄티누스 1세로 쟁쟁한 경쟁자인 4명을 배제하고 313년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즉위한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비교적 안정화되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대제의 아들 콘스탄스와 콘스탄티누스 2세의 내전과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제국은 서서히 약해졌다.

요비아누스 사후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4명이 제국을 4등분해 통치했지만 전장에서 전사하거나, 암살당하는 등 결말이 좋지않았고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다시 재통합되기 전까지 제국은 분할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각지에서 난립하는 부제들을 격파하고 불안정한 지방을 안정화시켰다. 그리고 당시 논쟁거리였던 기독교 교리 문제를 해결했고 이교금지 정책을 실시해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후 제국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3.3. 스틸리코와 알라리크[편집]


기원후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서거한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여파가 제국의 국경을 강타하기 시작했고, 제국 내부는 각종 부정부패나 반란의 위기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가 어린 호노리우스 황제 대신 대제의 사위이자 최고사령관(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크 밀리타이)인 스틸리코가 전권을 쥐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 권력의 공백을 훌륭히 채웠으며 그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온전히 승계할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여러 쟁쟁한 경쟁자들의 도전에도, 대제의 두 아들 중 호노리우스는 로마제국의 서방속주들을 승계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의 포에데타리 중 하나로서 다키아 지방[10]에 거주한 서고트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서고트족은 알라리크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트라키아 속주를 포함한 일대를 약탈하고 파괴한 알라리크는 아드리아노플을 함락시키며 동로마 제국을 유린했다.

동로마 제국의 동방 군단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에프탈을 견제하기 위해 소아시아에 주로 전개되어 있었고 서방군단들은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지휘했지만 사후 스틸리코 휘하로 배속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했기에 알라리크의 침공에 동로마 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요청으로 스틸리코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에 상륙해 알라리크를 압박해 포위에 성공했지만 당시 동로마의 재상인 루피누스의 간계로 아르카디우스는 스틸리코의 휘하의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송환하도록 요구해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격파하지 못했고 협상으로 마무리 지었다.

 

397년 알라리크는 또다시 거병하여 그리스 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는데 스틸리코가 이끌고 온 서로마 제국군에 의해 또다시 포위당했지만 알라리크는 탈출하는데 성공해 역으로 동로마 제국과 협상해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북아프리카에서 9만의 병력을 규합한 반란군 수장 길도는 순식간에 마우레타니아 속주 대부분을 장악하고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길도는 로마에 대한 식량 수출을 금지함으로서 제국이 식량난을 겪도록 유도했다. 식량 수급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로마를 노린 조치로 볼 수 있다. 이 조치의 여파로 로마제국 내의 식량가격이 폭등하자 스틸리코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식량들을 사들이도록 명령하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스틸리코는 로마 원로원을 통해 길도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하도록 했으며 길도의 정적인 마스케젤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 그로 하여금 길도를 저지하도록 했다. 마스케젤이 이끄는 로마군과 휘하 사병의 연합군 5천명은 마우레타니아 속주에 상륙해 길도의 9만의 반란군을 섬멸했으며 북아프리카 속주를 제국에 잔류시켰다.

 

칼레도니아의 픽트인들을 비롯한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브리타니아 속주는 399년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일부 무너지며 야만인들의 공세에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이에 스틸리코는 직접 바다를 건너 앵글로색슨 해적들을 비롯해 픽트인들을 몰아내며 브리타니아를 안정화시켰다.

 

401년 야만족 중 고트족의 세력이 크게 일었는데 알라리크는 또 다른 고트족 부족과 몇몇 다른 부족과 연합했고 또 다른 부족장인 라다가이수트와 함께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스틸리코는 이 유래없는 대대적인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제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모든 부대에 소집령을 내렸고 이는 제국의 국경방위력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401년 말 스틸리코는 로마군을 지휘해 라다가이수트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해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알라리크는 그틈을 노려 호노리우스 황제가 숨어있는 라벤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바람처럼 달려온 스틸리코는 다음해 4월달 베로나 근교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했고 부하의 대부분을 잃고 간신히 일리리쿰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죽이지 않았고 이는 황제의 신임을 잃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407~8년 알라리크와 라다가이수트는, 다시 한번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틸리코는 재침공을 격멸했다만 스틸리코는 의심병이 도진 호노리우스에게 라벤나로 송환되어 처형된다.

 

한편 408년 겨울 반달, 프랑크, 알레만니 등 게르만 부족들은 강추위로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 제국 영내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엄청난 약탈을 일삼으며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흩어졌고 이는 서로마 제국의 많은 속주들의 파괴와 상실로 이어지면서 제국에 치명타가 되었다. 항상 철처히 지키던 라인강 방어선이 허무하게 돌파당한 이유는 스틸리코가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라인강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군을 빼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스틸리코의 숙청과 서로마 정부의 게르만족 병사에 대한 학살, 그리고 고트족의 침입으로 제국 중심부가 혼란에 빠지면서 갈리아의 제국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파국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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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년 스틸리코가 숙청된 뒤, 410년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첫 번째 로마 약탈을 저질렀는데, 기원전 390년의 그것에서 무려 800년 만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천 년 뒤, 로마는 비슷한 상황에 또 빠지고 만다(...) 서고트족은 스틸리코의 로마군에게 깨진 이후 로마의 동맹이 되었으나 스틸리코가 숙청되면서 서고트족과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포위만 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르는 정도로 끝내려 했으나 라벤나에 있던 황제 호노리우스의 정치력 부족으로 인해 협상은 실패했고 결국 알라리크는 로마를 함락시켜 버렸다. 사실상 서로마 제국은 이때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3.4. 훈족과 아에티우스[편집]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 425년에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즉위했다. 서로마는 이미 방어 능력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고 갈리아, 이베리아 반도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를 반달족고트족, 그리고 수에비족에게 털리면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11]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서로마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직까지 상당한 여력이 남아있었던 서로마는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히스파니아에서 서고트족과 수에비족이 강성해지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고 반달족에게서 북아프리카 속주를 지켜내지 못하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마기스테르 밀리툰의 지위를 두고 보나파키우스와 아에티우스간의 치열한 암투가 이어졌는데 아에티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는 보나파키우스를 지원했지만 아에티우스가 승리함으로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군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451년~452년에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갈리아와 북이탈리아를 공격했고[12] 서로마는 대대적인 침공에 무력하게 무너지는가 했지만 다행히, 아이티우스가 여러 게르만 부족과 연합해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간신히 저지하여 갈리아의 남부와 이탈리아만은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막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는 로마에게도 큰 피해였다. 투입된 로마군의 3분의 2가 전사하는 격전이였고 이 큰 병력 손실에 이듬해에 벌어진 아틸라의 두번째 침공은 막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회군한다.

 

그러나 아이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음모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에는 서로마 황제들은 동로마에서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원로원에서 선출되게 되었다. 아이티우스도 죽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죽자, 455년 반달족이 두 번째 '로마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도 허무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3.5. 최후의 순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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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우스 사후 로마 제국의 세력도. 이미 서로마는 잉글랜드에서 철수하였고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를 빼앗긴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 곳곳에 야만족 세력이 눌러 앉게 되었고, 그 바람에 서로마의 영토는 누더기로 변해버렸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본거지 이탈리아 반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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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뒤 마지막 20년은 스틸리코나 아이티우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어떻게든 지탱해나가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사실상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 출신 권신들의 입김을 받은 9명의 황제가 연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무력하게 몰락해 가는 시절이었다. 다만 이걸 외세에 의해 망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게르만 출신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오도아케르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간신들이지, 외세는 아니었다.

 

이 무렵을 전후해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13]브리타니아[14]히스파니아[15]북아프리카의 '변경'에 프랑크족부르군트족앵글로색슨족, 서고트족, 수에비족반달족 등이 잇따라 침공해 정착함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치력이 감소해, 점차적으로 이탈리아 일대만 다스리는 수준까지 황권이 축소됐다. 물론 최후의 순간까지도 갈리아 북부[16] 그리고 발칸 반도 일부 지역, 달마티아 지역[17]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인구를 유지했기 때문에 내부 개혁과 안정에 성공하면 건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살

 

5세기 중반까지 서로마는 재기를 하기 위해 2차례의 반달 원정을 시도했다. 1차인 461년에는 서로마가 300척의 배를 준비해 무리해서 반달을 치려고 하지만 노련한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의 화공 작전에 함선이 싹 다 불타버렸다. 낙담한 황제 마요리아누스는 라벤나로 돌아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궁정 관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고 나서 궁정 관료의 좌장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인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나, 4년 후 다시 리키메르에게 독살당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황제로 안테미우스를 보내줬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동, 서로마는 반달족을 치려 했다.

 

동로마의 주도 아래 10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편성되고 카르타고로 쳐들어가는데 동로마 황제의 처남이었던 총사령관 바실리스쿠스는 군사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었다. 반달왕 겐세리크는 평화 협정을 핑계로 항구에 함대를 주둔할 것을 권했고 바실리쿠스는 그대로 해 버린다. 그러자 겐세리크는 7년 전 경험을 되살려 다시 화공을 시전하고 함대는 활활 잘도 타기 시작한다.지난 전쟁에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한 로마군 그렇게 허무하게 서로마 재생 작전은 망해버렸고 서로마는 동로마에게도 버려져 역량이 크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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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6년 게르만 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18]와 제국의 실권자인 오레스테스[19]가 분쟁을 일으킨 끝에 오레스테스와 그의 형제 파울루스가 오도아케르에게 제거되고, 오레스테스가 세운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는 멸망했다.[20] 물론 동로마 황제의 눈치를 본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의 폐위 직후, 황제의 '어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면서,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청했다.[21] 황제 제노는 "일찍이 오레스테스가 쫓아낸 율리우스 네포스(로물루스 황제의 전임자)가 아직 (달마티아에) 건재하지 않느냐"며 네포스 복위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는 정작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사실상 이 문제를 방치하여[22] 사실상 서방제국의 소멸을 인정하였다. 그래도 달마티아에서 기반을 닦아 온 전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의 임명을 얻어 다시 복귀하게 되었지만 이탈리아 수복 계획을 세우던 중 480년 암살되었고, 같은 해 오도아케르의 침공에 달마티아가 무너지며 서로마는 완전히 끝이 났다. 로마 국가와 제정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 창시자 아우구스투스와 최후의 황제는 이름이 같았는데[23]건국 1,229년 만의 멸망이었다.[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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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년 말의 유럽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 동고트 왕국
수에비 왕국
율리우스 네포스 동로마 제국

·

반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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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멸망 이후[편집]


서로마의 희망이었던 마요리아누스가 죽고 나서 세워진 '수아송 왕국(Regnum Syagrii)'은 서로마 제국의 한 축인 갈리아 지역이 떨어져 나가면서 세워진 로마인 국가로, 최후의 갈리아 총독이었던 아에기디우스가 초대 왕으로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486년 프랑크족의 남하로 인해 시작된 전쟁에서 지고 수아송 왕국은 멸망했다(시아그리우스는 포로로 붙잡혀 다음 해에 처형됐다.).

 

황위를 찬탈한 오도아케르는 17년 동안 이탈리아와 달마티아를 지배하다가 이후 493년, 동로마의 황제인 제노의 명을 받고 (실제로는 이이제이동상이몽이었지만) 쳐들어온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에게 죽임을 당한다.

 

로마 제국의 서방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서유럽 전역은 크나큰 정치적, 문화적 혼란이 발생하는데 당시 영국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로마의 선진 기술들이 거의 모조리 상실되고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보다 후퇴하는 모습도 나타나게 된다. 그 피해는 대단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세력들의 충돌이 완화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체계를 이룬 1~2세기 정도 지난 다음에서야 회복세를 이룰 정도.

 

훗날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날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로마 월계관을 받으면서 서로마 제국의 후계를 잇는다고 공언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된다.

다른 로마계들도 있었는데 중앙 정부의 붕괴에서 살아남은 예로 북아프리카 서쪽에 살아남은 로마 전초들이 있었다. ( 물론 로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지만), 반달족 주변 야만족들과 계속 싸워 나가면서 로마-무어 왕국 등 국가도 세우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던 중, 6세기 초반에 이르러 옛 고토를  중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만나 다시 합치기도 한다.

 

동로마 제국의 원정군은 서로마의 고토 수복을 위해 전쟁을 했지만 전체 서로마 영토 전체를 되찾지는 못하고 아프리카 북부와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남부 지역밖에 수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페스트의 창궐로 점령지 대부분이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이슬람 제국의 발흥과 롬바르드의 침공으로 다시 빼앗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