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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 1.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 1.

 

길가메시[ Gilgamesh ]

 

바빌로니아 문학작품 중 남아있는 대표작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인 영웅이다. 반신반인으로 전설상의 국가인 우루크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길가메시 신화는 수메르에서 단편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카드어로 정리되었으며, 특히 니네베 왕궁서고() 출토의 아시리아어 판본은 현존하는 약 2000행의 장편이다.

 

영웅 길가메시와 엔키두와의 싸움 끝에 우정이 싹터 둘이서 삼나무 숲으로의 원정, 숲의 괴물인 훔바바(Humbaba) 정벌, 여신 이슈타르의 유혹, 엔키두의 죽음, 영원한 생명을 구도하는 방랑, 우트나피슈팀(Utnapishtim)과의 만남과 그가 말하는 대홍수 이야기 등이 기술되어 있다. 길가메시는 가축의 수호신, 목축의 신으로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악마를 막는 영웅으로도 다루어졌다.

 

미술작품에서는 엔키두와 더불어 종종 원통인장(), 용기(), 올트스타트 등에 야수와 격투하는 장면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성문을 지키는 인면수신상(라마스)의 군상()과 함께 길가메시의 거상이 세워졌다. 코르사바드 출토의 아시리아 제국시대 작품(B.C.8세기, 루브르 박물관 소장)은 그 좋은 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가메시 [Gilgamesh]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1. 개요

 

2.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

 

2.1. 길가메시와 아카2.2. 길가메시와 생명의 땅2.3. 길가메시의 죽음

 

3. 바빌론의 길가메시 신화4. 여담5. 대중문화에서

 

1. 개요

 

길가메시(Gilgamesh‎) 또는 빌가메시(???[1]; Bil-ga-meš)[2]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수메르의 도시 우루크(??) 제1왕조를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왕이다. 그의 이야기는 몇 가지 신화적 인용과 고고학적 발굴, 특히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해 유명해졌다.

길가메시의 '길가(빌가)'는 '늙은이, 조상', '메시'는 '젊은이, 영웅'이라는 뜻이다. 이는 즉 '늙은이가 젊어지지 못하고 젊은이가 늙은이가 되는 운명'을 암시하는 이름이며, '왕권은 받았으나 불멸은 그의 것이 아닌 운명'을 뜻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왕 루갈반다,[3] 어머니는 들소의 여신 닌순인 반신(半神)이며 신의 피가 3분의 2만큼 섞였다고 한다. 생일 별자리는 황소자리인데, 별자리는 그냥 생일을 따라 정해진 게 아니라 춘분점에 맞춰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여 신성성을 드높이는 장치이다. 서사시가 시리즈물로 정리될 당시인 바빌로니아-아시리아 시대에는 양자리가 아니라 황소자리가 춘분점에 있었다고 한다.[4]

2.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

수메르의 왕 목록에 따르면, 길가메시는 에레크(우루크) 왕국의 다섯 번째 왕이다. 수메르식 시간대에 따르면 에레크(우루크) 왕국은 대홍수 뒤에 세워진 두 번째 왕국이다. 길가메시가 등장하는 토판은 몇 가지가 존재한다.[5]

2.1. 길가메시와 아카

대홍수가 있은 뒤 최초로 세워진 나라는 키쉬(Kish) 왕국이었다. 신흥 강국 에레크(우루크)의 길가메시와 오래된 강국(대홍수 직후에 하늘이 인정한 왕권을 가진 나라) 키쉬의 마지막 왕 아카[6]는 서로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키쉬의 왕 아카는 에레크(우루크)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에레크(우루크) 왕국을 포위한다. 이때 길가메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고 아카가 패배하지만, 결국 두 왕국은 화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이다. 그 이후로 하늘에서 내려온 왕권이 키쉬에서 에레크(우루크)로 넘어갔다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

이 토판에서는 어떤 신적 존재도 등장하지 않는다.

2.2. 길가메시와 생명의 땅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위협은 죽음이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을 보고[7] 죽음 앞에서는 자기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생명의 땅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을 한다. 여행 도중 길가메시는 여러번 꿈을 꾸게 되는데 한번은 꿈에서 엔키두가 나타나 생명의 땅을 찾기 위해 태양신 우투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우투는 길가메시의 모험은 너무 무모하기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완강한 요구에 밀려서 하는 수 없이 길가메시를 도와 험준한 일곱 산을 넘을 수 있도록 해준다.

길가메시는 생명의 땅에 도착해 우트나피쉬팀을 만난다. 영생을 얻은 그에게서 기어코 영생하게 해주는 불로초를 받고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도중에 뱀이 그것을 물어갔고 길가메시는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우루크로 돌아간다.

2.3. 길가메시의 죽음

길가메시는 엔릴이 꿈 속에 나타나 신들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만은 명예, 부, 그리고 승리를 보장해주었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이 신화의 두 번째 단락은 장례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본문에서 길가메시는 죽게 되며,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송가가 담겨 있다.

3. 바빌론의 길가메시 신화

 

기록된 서사시들 중에서는 가장 오랜(最古)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버전에 따르면 길가메시는 도시국가 우루크의 왕으로 3분의 2가 신이고 3분의 1만이 인간인, 다소 기묘한 혈통을 가지고 있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반반씩 섞는 유전자 조합에서 어떻게 하면 2/3가 나오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산술적인 유전자 계산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능력"이 1/3, 2/3이라고 봐야 된다. 길가메시가 가진 능력이 인간보다는 신에 더 가까웠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5m 나 되는 키와 괴물과 싸울 수 있는 힘은 '신의 능력'이고, 결국 죽는 것은 '인간의 능력(한계)'인 셈.

그는 자신의 영웅적인 힘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덜 성숙해 있었다. 길가메시는 온 세상을 둘러보고 우루크로 돌아온 후,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다는 사실에 취해 자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백성들을 괴롭히고 초야권을 만들어 결혼하는 처녀의 첫날밤을 자신이 치르는 등의 악행을 일삼아 백성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8] 참다못한 백성들이 천신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벌할 것을 호소하자, 이에 아누는 인간과 길가메시를 창조한 여신 아루루를 시켜 그의 짝을 만들게 하였다. 아루루가 손을 물에 넣어 씻고서 찰흙(검붉은 흙, adama)을 떼어낸 후 그것을 대초원에 뿌리자 거기에서 용감무쌍한 엔키두가 창조되었다. 이후 장성한 엔키두가 길가메시의 악행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길가메시를 찾아가 결투를 벌인 끝에 무승부로 싸움을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참고로 아카드어 버전에서는 엔키두와 길가메시의 관계가 거의 동등해 보이지만, 수메르어 버전에서는 엔키두가 하인으로 나온다. 두 사람이 친구가 된 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조언을 받아들여 악한 폭군에서부터 개과천선하여 숲의 괴수 후와와(훔바바)를 물리치는 등 개념 군주로 탈바꿈한다. 이후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엔키두가 저주(질병)로 사망한 후에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죽음이 두려워져서인지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온 세상을 여행하며 지식을 쌓았다. 이때 저승까지 갔다는 전승도 있다.

홍수에서 살아남아 불로불사가 된 우트나피쉬팀[9][10]을 찾아가지만, 불로불사는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좌절한다.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점토판 손상 부분)에서 나오는 주문을 다 들으면 불로불사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말에 길가메시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다 했지만, 결국 사흘을 채 못 채우고 서서 잠들어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우트나피쉬팀이 대홍수 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설명하며 영생은 신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하자, 길가메시가 더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영생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절망해 그대로 쓰러져 7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설명한 책도 있다. 대신에 늙음은 피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하지만, 그마저도 지나가던 뱀이 훔쳐 먹어서 좌절해 다시 우루크로 돌아갔다고 한다.

길가메시는 비록 좌절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의 헛됨을 깨닫고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죽은 뒤에는 사후세계의 왕이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정확히는 하급 신(lesser god).

 

4. 여담

 

이 서사시에 기록된 영웅이자 왕이 성경에 나오는 지상 최초의 권력자 니므롯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영국인 조지 스미스(George Smith)는 고대 도시 니네베에서 발굴되어 영국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진 수천 점의 파편을 연구했으며, 이 점토판에 기록된 대홍수와 성경의 연관성을 비교 발표해 학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이끈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1862년에[11]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 성경에 나오는 니므롯이라 주장했는데, 당시 학자들도 그의 주장에 동의해 한동안 이 점토판의 내용을 '니므롯 서사시'라 불렀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홍수 신화 발견을 선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연구했던 대홍수 신화는 아주 기다란 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서사시의 주인공은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니므롯이 아니며,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그 서사시를 길가메시 서사시라 부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학계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니네베로 날아가 추가 발굴 작업에 임했지만, 몸이 약했던 까닭에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발굴 현장에서 요절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원형이라는 설이 있다. 그렇게 되면 엔키두와 함께 떠나는 모험은 헤라클레스가 겪는 열두 가지 고난의 원본이 되는 셈. 둘 다 황소를 격퇴하거나 사자를 죽이고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는 등 일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 서사시는 전체 모습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원형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증명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전 세계 수메르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석학으로 추앙받는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Samuel Noah Kramer)는 저서에서 그리스, 인도, 튜턴의 영웅시대가 수메르 영웅 시대와 서로 내용이나 형식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고,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셋 중 가장 오래된 그리스 영웅 시대보다 무려 1500년 이상 앞서는 수메르 영웅 시대에서 서사시의 기원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저술했다. 수메르 고고학이라는 학문을 근본부터 뒤집는 충격적인 발견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학계에서 인정하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기 때문이다.

 

수메르 판본과 바빌로니아(셈족, 아카드어) 판본이 존재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엄밀히 말해 바빌로니아 판본이다. 수메르 영웅 서사시는 같은 인물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에피소드별로 파편화되어 있으며 무미건조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것을 가지고 후대인 바빌로니아 시인들이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웅의 개성이나 감정 묘사를 집어넣어 각색한 것. 물론 바빌로니아 판본에 상응하는 대부분의 수메르 점토판이 있는 데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나 주제가 똑같기 때문에 그 기원이 수메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는 그의 저서에서 바빌로니아 판본에만 존재하는 부분이 그들만의 창작인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수메르 원전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면서,[12] 파편화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세련되게 다듬어 통합된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의 혁신이요, 성취라고 추켜세웠다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동료였던 엔키두와 함께 양성애자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직접적인 동성 간 연애 묘사는 나오지 않으나, 출토된 점토판의 엔키두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듣는 장면에서, 길가메시는 '너의 아내처럼 사랑하고(ramu), 포옹하고, 애무하게 될(hababu) 자'라는 예언을 듣는다. 

 

5. 대중문화에서

피터 히스토리아 - 여기서 길가메시가 영웅이 아닌 침략자이자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신화속 길가메시도 신의 시련을 받고 영웅으로 성장하기전까지는 이 작품의 길가메시와 같은 포악한 망나니라고하니 작위적인 각색이 아닌 영웅이 되기전의 길가메시의 모습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1] 유니코드 6.0의 쐐기문자를 지원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코드는 차례대로 U+1224b, U+120b5, U+12229 이다.

 

.[2] 수메르인들은 당시 빌가메시라고 불렀다.

 

[3] 서사시와 달리 수메르 역대 왕조 석판에서는 길가메시의 아버지가 리라라고 한다. 허나 김산해의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는 리라를 영혼으로 해석했다.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4] 각각의 길가메시 설화들이 별개로 발생하고 나서 수천 년쯤 구전되다가 채록되고, 채록된 뒤에도 다시 수천 년을 파편적으로만 나누어 기록되었다가, 기원전 24세기가 되어서야 바빌론에서 이걸 각색도 끼얹고서 짜맞춘다. 당연히 처음 채록된 시대 내지는 원형 설화가 발생했던 시대의 춘분점은 달랐을 것이다. 아니면 별자리 개념이나 춘분점 개념 자체가 없었거나.

 

[5]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조철수,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2003)를 볼 것.

 

[6] 아카드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이름이다.

 

[7] 가뭄의 신인 구갈안나, 즉 하늘의 황소를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죽인 후에 신들은 회의를 했는데 여기서 엔키두를 죽이자는 결론이 나온다.

 

[8] 피터 히스토리아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편에서도 이런 길가메시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고 있다.

 

[9] 여담이지만, 우트나피쉬팀의 홍수는 엔릴이 인간과 신의 혼혈 때문에 빡쳐서 일으켰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도 길가메시가 신과 인간의 혼혈인 것을 보면 신이나 인간이나 정신 못 차린 듯. 물론 홍수 설화의 다른 판본으로는 그냥 시끄럽다고 인간을 싹 쓸어버리자는 정신 나간 계획들을 세웠다고 한다.

 

[10] 엔릴은 신과 인간의 혼혈들이 늘어나면서 큰 문제를 일으키자 홍수를 일으켜 인간들을 쓸어버렸는데, 너무도 잔인한 그 광경을 하늘에서 지켜보면서 내심 엄청난 후회를 한다. 그래서 우트나피쉬팀이 인간들을 보존한 것을 알았을 때 입장을 바꿔 그 공로를 치하했고, 그동안 하찮게 여기던 인간에게는 본격적으로 문명을 전수해준다. 그리고 대홍수 이후에는 신과 인간들끼리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허용을 해줬는데, 길가메시는 대홍수 이후에 태어난 반인반신이다.

 

[11] 그가 언제 논문을 정리해 발표했는지는 책마다 몇 년씩 차이를 보인다. 이 문서에서는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의 저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1862년으로 적는다.

 

[12] 실제로 '엔키두와 우정을 쌓는 과정', '엔키두의 죽음과 매장'은 바빌로니아 판본에만 있으며, '길가메시의 죽음'은 수메르 판본에만 있다. 게다가 '길가메시, 엔키두, 그리고 저승세계'같이 두 판본에 모두 존재하지만 바빌로니아 판본의 이야기 구조에는 전혀 맞지 않는 에피소드도 존재하기 때문에 관련된 점토판의 추가 발굴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