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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204쪽 1970~1976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204쪽 1970~1976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정선거 감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 수천 명이 정부의 방해공작을 피하기 위해 신민당 참관인으로 등록하고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학생운동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 사례였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8%, 득표수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 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긴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을 하면 총통이 될 것이라고 한 김대중 후보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거칠 것 없는 태도로 독재의 길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언론 검열과 언론인 탄압을 크게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의 ‘톱스타’는 단연 시인 김지하였다. 정부는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을 도적으로 묘사한 담시(譚詩)「오적(五賊)」을 발표한 그를 구속했다. 잠시 풀려나 있으면서 다음 작품 「비어 (語)」를 발표하자 곧바로 반공법」을 걸어 다시 구속했고 잡지 『사상계』와 『씨울의 소리』를 등록 취소했으며 잡지『다리』의 필자와 편집자들을 「반공법」위반으로 구속했다.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언론사 경영진과 편집 간부를 협박·회유해 보도를 통제했다. 정부는 사법부도 장악했다. 검찰이 공안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현직 판사들에 대해 수뢰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판사들의 집단 사표 제출과 법관 독립선언이 이어졌다. 하지만 판사들은 결국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들어갔고 헌법의 3권 분립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1971년 하반기가 되자 권력형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교련폐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다시 불붙었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군을 투입해 무려 2,000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했다. 시위 주동자를 제적하고 서클을 해체했으며 교내 간행물을 폐간하고 제적 학생과 교련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을 강제 징집했다.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원생 조영래와 서울대생 심재권 · 이신범·장기표·김근태 등이 정부기관 습격과 혁명위원회 구성 등 9단계의 국가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그래도 민심이 가라앉지 않자 '북한의 남침 책동 강화’를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안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해 대통령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노동3권 등 헌법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했다. 친위쿠데타 예행연습이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극적인 사건을 두 번 일으켰다. 첫 번째는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동시에 발표한 7.4남북공동성명」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파트너가 비밀리에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명을 받아 대리서명한 공동성명이었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입각해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성명이 나오자 국민은 군사이념적 대결이 끝나고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에 들떴다. 두

번째 사건은 불과 석 달 후 일으킨 유신쿠데타였다. 10월 17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남북대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냉전시대에 만든 헌법을 고쳐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광화문에 탱크를 세우고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 민간 주요 시설에 군 병력을 투입했으며 국회의 권한을 국무회의에 넘기고, 모든 형태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현직 대통령이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용의주도한 독재자여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했고 계획대로 집행했다. 계엄령 선포 열흘째였던 10월 26일 비상국무회의가 개헌안을 심의하게 한 다음 27일 곧바로 공고했다. 11월 21일 계엄령 아래서 토론이나 찬반운동은 완전히 봉쇄한 가운데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유권자의 91.9%가 투표했고 투표자의 91.5%가 찬성했다. 3선 개헌도 흔쾌히 찬성하지는 않았던 국민이 종신집권을 열어주는 헌법개정안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진 것은 공포 분위기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반혁명이었던 5·16과 달리 10월 유신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한 완성형 반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 국가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전락했다.

 

유신헌법의 핵심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 성향 인사의 출마를 막고 지지자들만 대의원이 되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꿈을 이뤘다. 둘째,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국회의원을 한 선거구에서 둘씩 뽑도록 선거법을 고쳤다. 여당의원과 대통령이 임명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합쳐 의원 정수의 3분의 2가 되게 만든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국정감사권마저 폐지해 국회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법률을 통과시키는 ‘통법부’로 개조했다. 셋째,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무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어서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헌법을 개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 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랬던 그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구속 기소됐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막았다는 등의 '사소한 범죄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으니, 웃지 못할 역사의 희극이 아닐 수 없다.

 

 

1992년 12월 11일,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은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에서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용 부산경찰청장, 김대규 부산 기무부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등 공무원들을 상대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진영에서 이 대화를 도청ㆍ폭로해 큰 파문이 일었지만 위기감을 느낀 부산·경남 유권자들은 김영삼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 사건은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지역감정 조장, 유권자들의 비이성적 투표행태 등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30여 년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도 우리 국민은 그 후진성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계엄령을 해제한 직후인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했다. 읍·면·동에서 한 명씩 모두 2,359명을 뽑았는데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밝혀서도 안 됐다. 1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유세도 공약 발표도 없이 단독 출마해 100% 찬성으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이 됐고 1978년 똑같은 연극을 해서 제9대 대통령이 됐다. 유신체제는 선거제도 그 자체를 없애버린 완벽한 독재였기에 국민이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 말고는 민주화를 이룰 방법이 없었다.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성장기1: 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대구 수성못유원지 뒤편 산자락에 있는 수성관광호텔(현 ‘호텔수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묵었던 방에 자수를 넣은 8폭 병풍과 생활소품을 1970년대 모습 그대로 진열해놓고 있다. 나는 중학생 시절 대구공항에서 그 호텔로 가는 신천변 길가에 위치한 학교에 다닌 탓에 종종 행사에 불려나가곤 했다. 양팔 간격으로 길가에 늘어서 있다가 시커먼 승용차가 줄지어 가면 손을 흔들고 손뼉을 치는 게 임무였다. 대통령이 어느 차에 탔는지 알 수 없어서 후미 차량이 다 지나갈 때까지, '건성건성 치지 않고' 열렬히 박수를 쳤고 예정과 달리 헬기로 지나갈 때는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 사회선생님은 유신체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서양 사람과 체형이 달라서 양복을 입으려면 수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유신체제는 서양의 민주주의를 우리 현실에 맞게 손질한 '한국적 민주주의'다.” 어딘지 미심쩍었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시험문제가 달라졌을 뿐 우리 일상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18대 1975년 고등학생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일주일에 나를 표면적을 읽고 등교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얼룩무늬 교련복 앞함에 흰색 머플러를 하고 종아리에는 일본 군인들처럼 '각반'을 찼다. 나무총을 들고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익혔고 카빈총을 1분 안에 분해·조립하는 법을 배웠으며 섭씨 36도를 웃도는 땡볕 아래 '연병장’에서 얼차려를 받았다. 춘계행군대회(봄소풍)와 추계행군대회(가을소풍) 때는 목총을 메고 네 시간을 걸어가 점심 도시락을 먹은 다음 다시 네 시간을 걸어 학교로 돌아왔다. 가을마다 '검열관' 앞에서 행진과 분열, 총검술을 시연했다. 선거가 없어졌고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바뀌었으며 반장은 소대장, 학년회장은 대대장, 전교회장은 연대장이 됐다. 학도호국단 간부는 학교에서 임명했고 애국조회 때 교장선생님에 대하여 경례!’ 구호는 ‘임석상관(臨席上官)에 대하여 받들어 총!'으로 바뀌었다. 머리카락 길이는 2cm 이하여야 했다.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오로지 학교의 방침에 복종하면서 대입 예비고사와 본고사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던 우리에게 유신체제는 학교가 군대로 변하는 것이었다.

 

학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교장선생님에게 대들지 못한 것처럼 국민은 대통령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학교든 사회든, 오직 복종할 의무만 있었다. 유신 이후 1979년 10월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이 구속당하고 박해받은 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유신정권의 철권통치는 너무나 강력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목적'에 입각한 조직사건을 연달아 터뜨렸다. 1973년의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내란음모 혐의를 씌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시인 김남주와 역사학자 박석무를 엮어 넣은 '전남대 함성지 사건', 박형규·권호경·김동완 등 기독교 목회자들을 구속한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한 일은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거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한 것뿐이었다. 구속영장도 없이 수십 일씩 불법 구금한 가운데 고문을 해서 진술서를 받아냈지만 북한과 연계되거나 내란을 모의한 증거는 없었다.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그를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사건이다. 이 작전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이 35년 지난 2008년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줬고 대학가에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가자 중앙정보부는 10월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는데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목숨을 잃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으며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2006년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에서 일어났고 경기고, 대광고 등 고등학교까지 번졌다.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해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하면서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적은 유인물을 뿌렸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 가입·연락·선전뿐 아니라 수업거부·집회·농성, 관련 사실에 대한 보도행위까지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하며 형량을 최소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로 정했다. 비상군법회의는 이철·유인태·김병곤·나병식·김지하·이현배·여정남에게 사형을, 유근일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사형을 구형받은 후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했던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대통령도 그들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0년 전 지하로 잠복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재건하려 했다고 발표한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 또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은 달랐다. 정부는 그들이 재일조총련 간첩과 함께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했고 군법회의는 민청학련 관련자까지 포함해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실상을 알린 것은 김지하 시인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75년 2월 석방된 그는 『동아일보』

에 연재한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하재완·이수병 등 인혁당 사건 구속자들에게 들은 중앙정보부의 잔혹한 고문과 허위조작 실상을 폭로했다. 이 수기는 김지하 시인의 재구속,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기자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졌다.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광고를 취소해『동아일보』광고의 지면이 백지로 나오자 시민들이 돈을 보내 『동아일보』를 격려하는 광고를 실었다. 내 기억에 최후까지 남은 기업광고는 안국약품의 감기약 ‘투수코친’이었다. “동아일보 만세, 투수코친도 만세!”라고 쓴 독자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민청학련 사건은 반정부투쟁을 압살하려 했던 정부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았다. 1974년 12월 25일 민주화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윤보선·백낙준·유진오·김재준·김수환·정일형·강신명·김대중·윤형중·함석헌·이병린·천관우·이희승·이태영·김영삼·홍성우·함세웅·한승헌 등 저명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합한 것이다. 김영삼 씨를 총재로 선출한 신민당이 적극적인 개헌투쟁에 나서자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역공을 취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기 위해 국민투표를 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에 자신이 있었다. 언론자유와 토론을 모두 봉쇄한 가운데 행정조직을 동원해 찬반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야당이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1975년 2월 12일 국민투표를 밀어붙였다. 투표율 79.8%에 찬성률 73.1%가 나왔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당시의 투표율 91.9%에 찬성률 91.5%와 비교하면 둘 다 현저히 낮았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4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한 한국형 민주화

박정희는 왜 그들을 죽였을까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이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등 대학생이 아닌 인혁당 관련 피고인 8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하자 정부는 다음날 새벽 지체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함세웅 신부 등 가톨릭 사제들이 장례미사를 지내려고 하자 경찰은 크레인을 동원해 영구차를 탈취해서 일부 시신을 화장해버렸다. 시신에 남은 고문 흔적도 함께 사라졌다. 문정현 신부는 영구차 탈취를 막다가 차에 깔렸고 그때 입은 부상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이후 열린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고 재심 재판장은 사법부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국가의 배상금 지급을 결정했다.

 

베트남에 사회주의 통일 정부가 들어선 1975년 봄 박정희 대통령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 헌법에 대한 부정·반대·왜곡·비방, 헌법개정 청원 선전·선동,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 행위’ 등을 처벌대상으로 규정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 학생의 집회·시위·정치 관여를 금지하고 위반한 학생과 학교와 단체에 대해서는 주무장관이 제적·해임·해산·폐쇄 조처를 취할 수 있게 했으며, 이런 조처를 사법적 심사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법부의 권한도 박탈해버렸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허가 없이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어서 기자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문 채 살지 않으면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1979년 10월까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400여 명이었고 1,000여 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나중에 헌법재판소는 1호부터 9호까지 모든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정부는 대학생들을 무더기로 제적하고 감옥과 병영으로 보냈으며 정부를 비판한 대학교수와 기자를 해고했다. 한신대의 안병무·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이계준·양인응·김규삼, 고려대의 이문영·김용준·김윤환·이세기 교수를 해직했고 재임용 심사제도를 도입해 이화여대 김윤숙, 덕성여대 염무웅, 한양대 리영희, 연세대 성내운·송리성 등 400명이 넘는 교수들을 쫓아냈다. 『동아일보』와『조선일보』 사주들은 정부에 굴복해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검찰은 1976년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문동환·윤반웅·이문영·안병무·서남동·은명기·문익환·이태영·함세웅·김승훈·김대중과 이희호 부부·정일형 의원을 연행하고 ‘정부전복 선동' 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됐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생애와 사상, 죽음의 진상에 관해서는 고상만,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돌베개, 2012 참조. 고상만은 2003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서 장준하 선생의문사 사건을 맡았던 인물이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 선생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소규모 교내시위만 벌어졌다. 대학 교정에 사복형사와 전투경찰이 상주하면서 선언문 첫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시위 주동자를 체포했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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