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의 진짜 의미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로, 현대 철학을 출발시킨 사람이라고 일컬어진다. 합리주의적 사고가 주류를 이뤘던 서양 근대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며, 인간의 어두운 에너지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이성을 너무 따르다 보니 정신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만큼 유명한 철학의 명언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이자 현대 철학을 시작한 사람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독일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만 딱 놓고 보면 왜 이렇게까지 명성을 얻게 된 건지조금 의아하다. 왜냐하면 니체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이미 종교가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등장과 여타 근대과학의 발전으로 많은 사람이 점점 기독교적인 신앙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니체가 선포하기 이전에도 이미 유럽에서 신은 죽어가고 있었으며, 다만 누가 장례를 치러주느냐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올 만한 타이밍에 나온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명성을 얻게 된 건 어째서일까?
보통 명언 뒤에는 방대한 배경이 있기 마련이다. 니체의 명언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까닭은, 그 뒤에 자리 잡은 니체의 커다란 철학 체계/135/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봤을 때 큰 울림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현대 철학의 시작을 알렸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가 기존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유럽의 이성주의적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돌덩이를 던졌기 때문이다. 아니, 바윗덩어리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기독교는 니체가 파괴하고자 했던 거대한 이성주의적 체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기독교가 몰락했다고 선언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 말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던 이성주의적인 전통이 이제 깨질 때가 됐다는, 또한 그렇게 낡은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현대가 시작한다는 선언을 담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성주의가 뭐가 그리 잘못 됐길래 니체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했던 걸까? 우리는 흔히 이성을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성을 따르면 세상이 문제없이 돌아가고, 이성에서 벗어날 때 문제가 생기는 게 일반적인 것 같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을 깼다. 그는 사람들이 이성을 너무 따르다 보니 정신적으로 병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가끔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 이성적으로만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해서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주식투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성적으로 실적과 주가를 계산해보면 절대로 사면 안 되는 주식이 있다. 그런데 꼭 그런 주식이 이슈를 타고 갑자기 몇 배가 오르곤 한다. 또는 철저한 계산 끝에/프리드리히 니체136/ 안전한 우량주라고 생각해서 산 주식이 나락으로 가는 일도 종종 있다. 이처럼 이성만을 따라가는 게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지금까지 인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왔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매일매일 의존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아주 수준 높은 이성의 산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니체는 이성 전체를 문제 삼은 게 아니다. 과학자들이 열심히 세상의 진리를 알아내고자 이성적으로 애쓰는 데 니체가 가서 돌을 던진 게 아니다. 그보다 니체가 진정으로 반대하고자 한 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양 진영을 엄격하게 나누고, 이성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비이성은 가둬버리는 불균형적인 전통이다.
유럽 사회에서 이성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성은 세상을 관통하는 객관적인 원리이자 질서로 이해되었다. 전통적으로 이성과 항상 함께 묶였던 것이 질서와 빛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태양신 아폴론은 이성의 신이자 질서의 신, 빛의 신이다. 이런 이미지 아래에서 이성은 찬란하게 세상을 비추고 질서 정연하게 세상 만물을 정돈하는 힘으로 생각되었다. 반면 이성과 항상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혼돈과 어둠이다. 도취, 감정의 폭발, 광란 같은 것들이 이성에 반하는 것들로 생각되어 왔다./신은 죽었다 진짜 의미137/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는 기독교의 전통 아래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리스로마 신화까지는 그래도 질서의 힘과 混沌의 힘이 서로 뒤섞이는 방식으로 세상이 이해되었다면, 기독교의 전통 아래에서는 전지전능한 신이 절대적인 이성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밝게 비추는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이런 이성주의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 신과 이성의 이름에 반하는 것은 모두 사탄이 된다. 약간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취급되며, 질서 밖에 나는 여성은 마녀가 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통해 파괴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렇게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나누고 이성 밖에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함으로써 오직 이성의 힘만으로 질서 정연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질서 있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 아래 오히려 더 비이성적이고 꽉 막힌 처사를 하게 된다. 때로 그들은 더욱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신의 이성과 질서를 선한 것으로 보고 사탄의 비이성과 혼돈을 악한 것으로 생각했던 중세 유럽인은 마을의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을 마녀로 규정해 고문하고 처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은 어느 집단보다도 사회를 더욱 질서 있게 통치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끔찍한 전쟁과 수백만 유대인의 학살이었다.
이성과 질서에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환상과 다르게, 실제 세상은 항상 비이성과 혼돈의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사람/프리드리히 니체138/
안에는 질서를 추구하는 마음가짐, 법칙에 따라 세상을 통찰하려는 정신만큼이나 혼돈과 일탈을 추구하는 경향이 함께 들어있다. 따라서 비이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프레임 씌워 내몰아버리고, 오직 이성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파악하고 사회를 조직하려는 일은 결국 인간의 정신과 사회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니체는 비이성이 어둠에 갇히고 이성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는 이분법적 구조에 바윗덩어리를 던졌던 사람 중 한 명이다.그는 이전 사람들보다 더 솔직하고자 했다. '솔직히 우리 다 속으로는 무질서한 생각, 나쁜 생각 하고 있잖아?' 니체는 이런 물음을 사람들에게 던지고자 했다. 이성, 질서, 빛, 신, 선함 등등을 묶어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삶과 세계의 의미를 규정하고자했던 예전 사람들에게 니체의 이런 파격적 질문은 큰 충격이었다. 니체의 이러한 문제 제기 이후로, 많은 사람이 이제 이성과비이성을 모두 이해하고 그 둘 모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 변화는 현대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은 죽었다 진짜 의미/139
규칙을 파괴하는 자, 초인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건너가야 할 다리일 뿐이다.“
고양된 상태에 이르거나 다양한 선택지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그러한 선택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삶이 무겁다는 사실까지는 어렴풋이 인식하지만, 거기서 그냥 기존에 살아가던 굴레에 맞게 계속해서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택하는 길이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삶의 무게가 바위처럼 나를 짓누르는 순간 그 바위를 깨뜨리고, 샘솟는 긍정적 에너지로 모든 무력함을 극복해내곤 한다. 그는 삶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니체는 그런 사람을 초인이라고 불렀다. 초인은 우리를 부정적인 에너지가 감도는 낮은 땅에 묶어두는 족쇄를 끊어낸다. 그리고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삶을 긍정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초능력자 같은 게 아니다. 초인은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남게 하고, 계속해서 낮은 곳에 묶어두려는 수많은 족쇄를 벗어던질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주변의 많은 관습, 도덕 규칙, 다른 사람의 말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삶을 짓누르며 우리를 낮은 곳에 묶어두는 가장 대표적인 힘이다. 겉보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이고 당연히 따라야 할 것처럼 보이는 규칙과 관습은 사실 현 상태를 어찌어찌 잘 유지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나약한 사람들의 규칙에 불과하다. 니체의 생각에 따르면, 다수의 나약한 사람들, 즉 삶을 짓누르는 바위를 던져낼 힘이(프리드리히 니체142) 없는 다수의 사람이 소수의 강한 사람을 견제하고, 적당히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자신들의 약한 삶을 안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이 온갖 규칙과 관습이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라."라는 도덕적인 규칙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니체는 이런 규칙이 사실 약한 다수의 사람이 강한 소수의 사람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규칙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같은 규칙도 마찬가지다. 이 외에도,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거다, 저렇게 사는 게 좋은 거다 등등 주변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반복하는 수많은 틀에 박힌 말은 삶의 무게를 충분히 극복해내지 못하는 다수의 기준에 맞춰서 생겨난 말들일 뿐인지도 모른다.
약한 다수의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규칙과 전통에 잘 복종해서 살아봤자,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묵직해진 삶의 짐뿐이다. 그 전통을 만들어내고 지켜온 사람들도 삶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을 뿐인데, 그들의 말을 따라 똑같은 삶을 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초인은 그런 기존의 규칙을 과감히 거부한다. 여러 규칙과 주변의 말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닌 건 과감히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니체의 초인 사상은 매우 공격적이고 폭력적이고 반
규칙을 파괴하는 지
143
●괴델의 신 존재 증명에 관한 전제 – 이것들은 기도문
-안셀무스의 신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인지될 수 없는 어떤 것’ – 아퀴나스는 논증 거부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신’은 가장 완벽한 존재이다. - 가장 완벽한 존재가 가진 본성의 부분으로서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
명제 :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한다
전제 : 존재는 완전성의 일부이다
-괴델은 여기에 긍정성을 부여하여 존재 증명 시도. 괴델은 존재론적 증명(1970)에서 다섯 공리를 제시했다. 명제를 공리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의문 - 공리의 증명/타당성 문제/모순(矛盾) 함유. ●∴괴델의 3정의(定義)와 5공리(公理)와 2정리(定理)를 수용할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긍정성과 절대성을 부여. 즉 결승선에 앞에 세워주고 경기하는 것과 같다/
-칸트는 세 가지 선험론(先驗論)적 개념을 설정했고 신은 선험적 개념에 포함된다고 설정.
첫째, 칸트는 신 개념이 ‘무한’과 관련한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 유도된다고 주장. 이러한 입장에 따라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3장 4절에서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비판.
둘째, 결국 ‘존재’는 논리적 술어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의 핵심.
신의 조건 및 성질은 無矛盾性 無誤謬性 完全性 無限性 肯定性 最上性을 만족해야 한다. 오늘날 신학적 세계관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의 신학을 ‘합리적 신학‘이라고 표명하였다. 합리적 방식에는 수학의 논리가 포함된다. 그 신학은 철학적 형이상학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나의 이론은 중심 모나드[즉 신]을 가진 모나드 이론이다. 나의 철학은 합리적 관념론 낙관론 신학적 철학이다.
“실재로서의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하다.“
도봉생각 – 괴델은 유일신자로서 루터교도이다. 과학자적 양심에 따라 논리실증주의를 충족하는 신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으나, 순환 및 억지논리에 흐르는 것을 극복하지/넘지/ 못해 결국 생전에 발표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므로 사후에 주변 사람들이 발표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크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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