惺惺寂寂法(성성적적법) - 숙정(肅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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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惺惺(성성)법
惺惺(성성)은 인지기능자인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 또는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 알아차리는 정도는 뚜렷할 수도 있고 희미할 수도 있다.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서는 흐릿하게 알아차리고 있다가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면서도 그것을 선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며 또 그 사이사이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말한다. 이 照心(조심)을 뚜렷하게 또 계속하여 깨어있게 함으로써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성성법이다.
성성공부를 하려면 맨 처음 필요한 것이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몸으로 체득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은 깨어있지 못한 상태와 대비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체감하면 체득이 된다. 이를 위한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방을 약간 어둡게 하여 몰입하기 쉽게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재미있는 비디오를 본다. 한창 몰입되어 있을 때 보조자가 불을 켜든지 소리를 내든지 하여 그 몰입상태를 갑자기 깬다. 그러면 몰입에서 깨어나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이때 바로 직전의 몰입하였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와 비교하여 그 차이를 구분하여 체감한다. "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과 "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의 차이이다. 이것을 분명히 체득될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면 된다.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그렇지 못한 상태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체득하였으면 비로소 照心(조심)의 능력을 강화하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는 희미하지 않고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차리는 상태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의 효용이 있다.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照心(조심)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고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지구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照心(조심)의 능력이 효율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지 않다면 알아차리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공부능률에 차이가 생긴다. 심한 경우 거의 공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대상이 알아차리기도 쉽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도 잘 유지되는 것이 있는 반면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그 알아차리는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본다고 하자. 그 알아차리는 대상이 물체일 수도 있고 물체를 보는 動心(동심)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 보는 動心(동심)이 대상이라고 하자. 처음에는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 알아차리는 照心(조심)은 어디로 가버리고 동심만 물체를 쳐다보고 있게 된다. 즉, "動心(동심)이 그 물체를 보고 있는" 상태는 유지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보는 동심조차도 어디로 가버리고 맨 눈만 멍하니 물체를 마주하고 있게 된다.
이에 비하여 궁금하여 알고 싶은 어떤 한 가지 의문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면 비교적 알아차리는 것을 뚜렷하고 오래 유지할 수 있다.
照心(조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고 있다면 그 상태를 뚜렷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으므로 대상은 어떤 것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일상생활에서는 일의 처리를 위하여 다소의 生滅心(생멸심)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照心(조심)이 뚜렷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 생멸심의 생멸 중에도 照心(조심)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간단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또한 照心(조심)을 유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照心(조심)의 힘이 강화되면 그러한 생멸심조차도 세세히 照觀(조관)할 수 있으므로 그 생멸심의 선악을 변별하여 그 생멸심을 선으로 향하게 하고 악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덕을 닦는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다. 이것을 省察(성찰)이라고 한다.
照心(조심)이 照觀(조관)하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되는 動心(동심)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은 照心(조심)은 惺惺(성성)하고 動心(동심)은 寂寂(적적)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상태를 惺惺寂寂(성성적적)이라한다.
照觀(조관)의 대상을 照心(조심) 자신으로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回光反照(회광반조)라 한다.
照心(조심)의 능력이 어떤 정도 이상으로 강화되면 육신(肉身)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인지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육안(肉眼)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肉耳(육이)가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本神(본신)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즉 本神(본신)이 나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니 父母未生前(부모미생전)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된 선입관 등을 소멸시킬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形氣(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자기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며 그것이 자기의 사유물이라고 잘못 인지하여 그것을 사사롭게 여겼던 形氣之私(형기지사)가 있다.
만일 그것을 살펴본다면 그 형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독립된 개체가 아니며 더구나 자기의 사유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사로움은 자연히 소멸되게 된다. 그리하여 公心(공심)을 회복하게 되며 형기지사로부터 파생되었던 사욕도 근본적으로 소멸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아무리 인지능력이 강화되었다하더라도 그러한 점을 실제로 살피지 않는다면 그 형기지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며 그것은 그의 가치관에 따르는 것이므로 어떤 가치관을 갖느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 된다.
- 寂寂(적적)법과 專一(전일)법
動心(동심)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寂寂(적적)이라 한다. 動心(동심)을 사용하여 일을 하다가 일이 끝나고 그 動心(동심)이 소멸되어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적적상태이다. 만일 성성의 상태를 분명히 체득하여 照心(조심)이 동심의 동태를 照觀(조관)할 수 있다면 적적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있고 동심의 생멸도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으므로 적적상태를 구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요령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 요령은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한 종류는 어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방법이고 다른 한 종류는 호흡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적적의 상태에 놓여지면 심신의 모든 기능이 깊은 휴식을 취하게 되고 많은 양의 三元(삼원)이 응결하여 經絡(경락)에 모여들게 된다. 이 현상은 삼원의 정제효율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삼원의 정제량이 많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정제는 삼원의 휘발과 응결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정제량이 많지 않은 것은 휘발은 많이 되지만 응결되는 양이 적었기 때문이다.
적적은 전혀 동심이 없는 상태이므로 아무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만 적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적적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혀 동심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을 하려면 동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 때 수많은 동심이 산만하게 생멸한다면 照心(조심)이 동심을 정밀하게 照觀(조관)하는 것이 어려워지므로 모든 동심을 올바르게 움직이도록 돌보아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산만하게 생멸하는 동심들은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동심이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낼 수 있고 또 照心(조심)이 그 동심을 충분히 조관하여 돌보아줄 수 있으려면 한 개의 동심만 생겨서 그 동심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동심의 專一(전일)이다.
그래서 동심의 전일은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을 제대로 해내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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