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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오온. 색수상행식의 개념 구별

오온. 색수상행식의 개념 구별

여기 한 사건이 있다.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냈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육체(色) - 사랑하는 감정(受)-이별을 슬퍼하고 아쉬워하는 하는 감정(受) - 손을 흔들고 떠나는 여자사람과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남자사람(想. 이미지)이 떠오른다 - 슬프고 아쉬운 마음에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의지(行)와 여자는 손을 떨치고 간다(行) - 결국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울고 있다. 슬픈 이별이라는 인식(識) - 즉 대상(境), 감각기관(根)이 전체를 인식(識)하여 내 몸 안에 받아들인다. 이것이 생각-이것이 찰나찰나 지나간다. 이것을 生住異滅이라 하고 그중 行을 일으키는 것은 가장 에너지가 형상적 이미지 곧 想만 업습(?)으로 남아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색-몸의 눈으로 끔찍한 귀신을 본다

식-귀신을 봐서 안다/아? 귀신이네

상-귀신은 무서운 것일가는 기억/고정관념이 떠오른다/귀신은 무서운 거야

수-싫은 느낌, 불쾌한 느낌이 생긴다/소름 끼쳐

행-도망치고 싶은 의지/숨어야 해, TV를 거버릴까!


내 앞에 놓인 꽃이 있다.

꽃 자체는 색

꽃을 보고 느끼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수

그것을 어떤 꽃이라고 아는 것을 상

그 곷을 대하면서 솟아나는 호불호의 감정은 행

이 모두를 파악하는 것을 식


우리는 이 마음과 몸[名色, nāma-rūpa]3)을 고찰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정말 ‘나의’ 느낌인지, ‘나의’ 인식인지, ‘나의’ 기억인지, ‘나의’ 생각인지, ‘나의’ 의식이 하는 ‘나의’ 알아차림인지 의심해보려 들지도 않는다. 관(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의심을 품어보기 조차 못 한다. 그리고 이런 관 공부를 하려면 일상의 견해나 관점으로부터 떨어진 꽤 널찍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소유욕이자 애착이 곧 집착이다. 그런 집착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실을 바로 볼[觀] 수 없다. 집착이 가로막기 때문에 진실을 못 보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집착에 의해 모두 왜곡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아, 나는 이제 집착하기를 그만 두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가당치 않다. 급한 마음으로 덤빌 일이 아니다. 그 ‘나’를 제거해 내는 과정, 즉 마음과 몸이 하나의 완전한 개체라 믿기를 그만 두게 되는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상을 해서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고 성취를 이루었다고 하려면 맨 먼저, 마음 따로 몸 따로라는 것쯤은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일치하여 움직이는 어떤 하나의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마음이 따로 있어서 몸으로 하여금 움직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신을 좀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는 첫걸음에 해당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이것은 느낌이구나”[受], 그리고 “이 느낌에다 내가 지금 이름을 붙여주고 있구나”[想], “이것이 내가 이 느낌에 대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구나”[行], “의식이 그 일어난 느낌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느낌이란 현상으로 실현될 수 있었구나”[識] 하고 일일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오취온 중 마음에 속하는 이 네 가지를 따로따로 분해해 보도록 하자. 그 하나하나를,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동안에,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해 뒤쫓아 가며 사유하고 있는 ‘현재’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그것을 떼어내어 따로따로 살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명색이 정말 ‘내’가 아니구나 하고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넷[受, 想, 行, 識]은 한갓 현상으로서 발생하였다가 잠시 머물고서는 스러져버린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의식이 어떤 대상에 머무는 시간은 과연 몇 순간이나 될까? 생각들은 얼마동안이나 지속될까? 그리고 과연 우리가 그 생각들을 원해서 불러들였던 것일까?



 

괴로운 느낌(樂受)·

즐거운 느낌(苦受)·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