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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9000년 전 평등사회 …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



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상>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신석기 시대 유적을 찾은 한국 학술교류단. 유적지 보호를 위해 거대한 돔이 설치돼 있다.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신석기 시대 유적을 찾은 한국 학술교류단. 유적지 보호를 위해 거대한 돔이 설치돼 있다.

이희수 한양대(문화인류학) 교수는 “대사건의 현장”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세계 최초의 계획도시로 꼽히는 터키 남부 차탈회이위크 유적을 보고나서다. 고도 1000m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 잡은 차탈회이위크는 신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대변하는 곳이다. 수렵·채취에 의존하던 인류의 농경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보존 상태가 훌륭한 곳으로 평가돼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터키 차탈회이위크
기원전 7500년 세계 첫 계획도시
벌집 같은 진흙 가옥 다닥다닥
공동체 리더십, 방 크기도 같아

지난 21일 현장을 찾았다. 25년째 발굴단을 이끌고 있는 이안 호더(69) 미 스탠퍼드대(고고학) 교수가 한국 방문객을 맞았다. 그가 먼저 유적 앞에 재현한 9000년 전 거주지 모형으로 방문단을 안내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붕 위로 걸어 다녔습니다. 집 위에 집을 짓는 독특한 구조지요. 지붕 아래로 낸 나무 사다리를 타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남쪽에 화로를 만들어 조리와 난방을 했고, 북쪽에 조상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한 방에서 유골 62구를 발굴한 적도 있습니다. 또 벽면에는 황소나 사슴, 표범과 멧돼지 등의 형상을 그렸어요. 일상과 제의(祭儀)가 동일한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죠.”
 
차탈회이위크 유적지 벽화를 재연한 모습. 야생 황소를 사냥하고, 길들이는 모습이다.

차탈회이위크 유적지 벽화를 재연한 모습. 야생 황소를 사냥하고, 길들이는 모습이다.

질의 :기원전 7500~5700년 시대 유적이다.
응답 :“전성기 때 8000여 명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한 집에서 수백 년 살았다. 더 이상 살 수 없으면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새집을 올렸다. 최대 25개 가구를 올려 쌓았다. 그렇게 쌓다 보니 유적 자체가 언덕 모양이 됐다.”
 
질의 :집마다 크기가 비슷한데.
응답 :“가로·세로 2~4m, 높이 3m 남짓이다. 나무로 지붕과 들보를 만들었다. 방마다 구조·규모가 같다. 매우 평등한(egalitarian) 사회였다. 벽화에 나타난 동물을 볼 때 가축화 초기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질의 :평등사회라고 보는 근거가 있나.
응답 :“방의 크기가 균일하다는 게 첫째 증거다. 둘째, 관공서(public house)가 발견되지 않았다. 지도자(리더)나 CEO가 없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지위가 동일했다. 마을 자체가 공동체 리더십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 방에서 나온 유골 치아를 DNA 분석했는데 한 집안의 것이 아니었다. 혈연이 아닌 마을 단위로 공유생활을 했다. 폭력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남녀 역할 분담도 없었다.”
앙카라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있는 신석기인 거주지 모형.

앙카라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있는 신석기인 거주지 모형.

 
질의 :남녀 또한 평등했다고 볼 수 있나.
응답 :“그렇다. 모계사회도, 부계사회도 아니었다. 당시 식생활을 조사한 결과 남녀 차이가 없었다. 같은 노동을 했다는 의미다. 발견된 유골의 성비도 동일했다. 공동육아로 마을이 유지된 것이다. 각 집은 작은 구멍으로 연결됐는데, 이곳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기다리며 산 것 같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체제가 매우 복잡했다.”
 
유적지 모형 뒤로 인공 언덕 두 개가 보였다. 호더 교수를 따라 발굴 현장을 찾았다. 높이 20m의 남쪽 언덕 아래로 기원전 7100~6100년 시대의 밀집 거주지가 수직으로 펼쳐졌다. 전후좌우 위아래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마치 거대한 벌집, 혹은 개미집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선사시대 다양한 도구와 토기, 밀·보리 등 곡식 낱알, 소·양·염소 등 가축 사육 흔적이 발견됐다. 언덕 상층부에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성상(像·지모신·사진)도 다수 출토됐다. 해당 유물은 터키 수도 앙카라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초입에 전시돼 있다.
 
차탈회이위크 남북 양쪽 언덕에는 통틀어 약 1만 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두 마을 사이에서 교혼(交婚)이 이뤄지며 대단위 촌락이 형성됐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호더 교수는 특히 무덤의 제의성, 벽화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집집마다 마련한 무덤은 먼저 간 조상을 기억하려는 역사(history) 행위였으며, 동물벽화는 고대 4대 문명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종교적 상징에 눈을 떴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 4대 문명은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김종일 서울대(고고미술사) 교수는 “차탈회이위크 유적은 20세기 세계 고고학의 주요 이정표다. 종교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돌려놓은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예컨대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종교는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지극히 평등사회였던 이곳에서 종교의 맹아(萌芽)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호더 교수는 “신석기시대 사회 또한 강력한 신념 체계로 묶여 있었다”며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살아간 그들에게서 많은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방문은 한국-터키 수교 60년을 기념하는 학술·문화교류 행사로 기획됐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주목받는 터키의 고대문명 유적을 순례했다. 이희수 교수는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테페 유적에선 1만2000년 전의 대규모 신전이 발견돼 큰 충격을 주었다”며 “인류 문명의 기원과 전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터키=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9000년 전 평등사회 …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