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뿌리를 찾아서 <상>
터키 차탈회이위크
기원전 7500년 세계 첫 계획도시
벌집 같은 진흙 가옥 다닥다닥
공동체 리더십, 방 크기도 같아
“당시 사람들은 지붕 위로 걸어 다녔습니다. 집 위에 집을 짓는 독특한 구조지요. 지붕 아래로 낸 나무 사다리를 타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 남쪽에 화로를 만들어 조리와 난방을 했고, 북쪽에 조상의 시신을 묻는 무덤을 만들었어요. 한 방에서 유골 62구를 발굴한 적도 있습니다. 또 벽면에는 황소나 사슴, 표범과 멧돼지 등의 형상을 그렸어요. 일상과 제의(祭儀)가 동일한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죠.”
- 질의 :기원전 7500~5700년 시대 유적이다.
- 응답 :“전성기 때 8000여 명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진흙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한 집에서 수백 년 살았다. 더 이상 살 수 없으면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새집을 올렸다. 최대 25개 가구를 올려 쌓았다. 그렇게 쌓다 보니 유적 자체가 언덕 모양이 됐다.”
- 질의 :집마다 크기가 비슷한데.
- 응답 :“가로·세로 2~4m, 높이 3m 남짓이다. 나무로 지붕과 들보를 만들었다. 방마다 구조·규모가 같다. 매우 평등한(egalitarian) 사회였다. 벽화에 나타난 동물을 볼 때 가축화 초기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 질의 :평등사회라고 보는 근거가 있나.
- 응답 :“방의 크기가 균일하다는 게 첫째 증거다. 둘째, 관공서(public house)가 발견되지 않았다. 지도자(리더)나 CEO가 없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지위가 동일했다. 마을 자체가 공동체 리더십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 방에서 나온 유골 치아를 DNA 분석했는데 한 집안의 것이 아니었다. 혈연이 아닌 마을 단위로 공유생활을 했다. 폭력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남녀 역할 분담도 없었다.”
- 질의 :남녀 또한 평등했다고 볼 수 있나.
- 응답 :“그렇다. 모계사회도, 부계사회도 아니었다. 당시 식생활을 조사한 결과 남녀 차이가 없었다. 같은 노동을 했다는 의미다. 발견된 유골의 성비도 동일했다. 공동육아로 마을이 유지된 것이다. 각 집은 작은 구멍으로 연결됐는데, 이곳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기다리며 산 것 같다.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체제가 매우 복잡했다.”
차탈회이위크 남북 양쪽 언덕에는 통틀어 약 1만 가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두 마을 사이에서 교혼(交婚)이 이뤄지며 대단위 촌락이 형성됐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호더 교수는 특히 무덤의 제의성, 벽화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집집마다 마련한 무덤은 먼저 간 조상을 기억하려는 역사(history) 행위였으며, 동물벽화는 고대 4대 문명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종교적 상징에 눈을 떴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등 4대 문명은 기원전 3500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이번 방문은 한국-터키 수교 60년을 기념하는 학술·문화교류 행사로 기획됐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주목받는 터키의 고대문명 유적을 순례했다. 이희수 교수는 “터키 동남부 괴베클리테페 유적에선 1만2000년 전의 대규모 신전이 발견돼 큰 충격을 주었다”며 “인류 문명의 기원과 전개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터키=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9000년 전 평등사회 … 계급도 남녀 차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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