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세 가지가 있는데 창조, 우연, 전변이다. 신학은 창조론이고, 자연과학에서는 우주 자체의 법칙으로 스스로 만들어졌다고 보니 신학 입장에서는 우연론이다. 중국철학은 無의 전변설로서 무에서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본다.
인도는 태초에 영원불멸의 존재(싸뜨,Sat, 有)가 있어서 이로부터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보았다(有의 전변).
모든 종교는 근본 존재인 싸뜨가 있으나 불교에선 실재가 없다. 불교의 무아란 일체 만법에는 독자적이고 고정적인 제 성품이 없다는 뜻이다. 브라만, 아뜨만, 푸드갈라, 지와는 인도종교의 핵심으로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외재신은 기독교의 여호와 신이 대표적이다. 천주교에서 신이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내재신을 의미한다. 불가에서 흔히 네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하면 내재신을 믿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불교는 외재신, 내재신을 둘 다 인정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신, 영혼, 주재자 등이 있는 것을 자성이라고 하는데, 불교에서는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다. 무자성이 자성이다. 경전에 보면 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는 했어도 네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고 한 적은 없다.
육근, 육경, 육식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존재가 부처이고, 무아임을 아는 것이 불성이다. 천도교는 내재신으로서 사람 마음속에 하늘님이 있다고 보고 자기 마음에 기도를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마음에 안과 밖이 없다고 본다. 마음이 아픈 것이지 마음 안에 아픔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소승의 제법무아는 근본 존재인 싸뜨를 부정하는 설법이고 더 나아가 대승의 무아는 근경식 어디에도 제 성품이 없다는 뜻이다. 제 성품(자성)은 인연을 빌리지 않고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교에서는 만법에 이 자성이 없다고 가르친다. 무자성이 자성이다. 고정불변의 자성이 있다고 하면 외도다.
근, 경, 식이 모두 허망하다는 것은 나, 대상, 분별이 모두 조건으로 일어나서 허깨비라는 것이다. 제 성품이 없는 이치를 중생이 망각하고 實有로 집착해서 얽매임이 일어난다. 자체 성품이 없고 다 조건으로 일어난 법이라 자아가 없다. ' 나' 라는 주체가 있어서 생각하고 밥먹고 걷는다고 착각한다. ‘나’ 가 없음을 불성으로 깨달으면 작용도 없음을 알게 된다. 작용의 주체가 있다면 작용이 있는 것이고 작용의 주체가 없다면 작용이 없는 것이다. 무아의 성품을 요달하면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함이 있는 이유는 그 주체로서의 자아가 마음속에 강력히 살아있어서 모든 행위에 주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작용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작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평생 법을 설하였으나 법을 설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부처도 중생도 법도 없다는, 주재자가 부서진 깨우침이다. 육조단경의 핵심인 무념, 무상, 무주는 작용의 주체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불성을 깨우치면 법문을 온종일 들어도 듣는 주재자가 없음을 알고 듣는다. 그러나 중생은 이를 알지 못하고 ‘나’가 있음에 너무 깊게 물들어있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도 四苦八亂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아로서 고집멸도를 밝히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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